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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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 한복판에서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차라리 생각이란 걸 하지 않으면, 더 편하고 즐거울 거예요.

하지만 내 맘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더군요.」

 

이제는 절대로 닿을 수도, 갈 수도 없는 시공간에서 벌어진 사투가 펼쳐진다.
하지만 《얼어붙은 바다》를 읽는 순간, 그 치열한 싸움은 내 생각 속에서 '현재'가 된다.

 

낯선 소설이었다. 그리고 친근한 소설이었다. 말도 안되는 두 가지 느낌이 교차하는 소설, 그런 소설이었다. 《얼어붙은 바다》는.

 

낯설다는 표현은,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욕설과 비속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불쾌했다. 이뿐만 아니라, 《얼어붙은 바다》의 배경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 삼았던 시대, 고래기름에서 등유로 연료가 교체되던 때로 추론컨대 아마도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 일  때였다. 이것만으로도 낯선데, 영국 중북부 지방에서 배 한 척이 북쪽 바다로 고래를 사냥하러 떠나는  배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다. 나는 겪어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이 모든 것이 낯선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근했다. 소설 속 텍스트를 읽다 보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얼어붙은 바다》는 멀리 떨어져서 지나간 이야기를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마치 내 눈앞에 펼쳐진 듯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이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소설 속 문장에 담겨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진행되는 일인 양 서술한 이야기 구조, 과거 회상조차 현재성을 띠는 듯한 문장들은 지금 나와 가장 동떨어진 소설 속 상황을 내 앞에서 펼쳐진 문제로 끌어 놓는다.

 

바깥은 영하 18도, 남실바람이 불었고,

바다는 진창으로 변한 런던의 눈과 같은 색깔, 같은 점도였다.

영국 해안가 러윅에 정박한 볼런티어(Volunteer) 호가 북쪽 바다로 출항한다. 고래를 잡아, 그 기름을 채취하는 것이 주목적인 포경선답게 이 일에 필요한 선원들을 배에 태운다. 작살꾼, 난파를 대비한 목수, 선장 그리고 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북극해를 향한다. 인도에서 돌아온 전직 군의관 패트릭 섬너, 작살꾼으로 고래를 사냥하는 헨리 드랙스, 선장 브라운리, 일등 항해서 캐번디시 등 이들은 추위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 위라는 극한 상황에 놓인다. 이 극한 상황을 모두가 함께 극복하는 모습을 그려도 좋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언 맥과이어는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마치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처럼 갑작스러운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라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듯이 이언 맥과이어의 《얼어붙은 바다》는 북극해 위에 포경선 위에서 동일한 질문을 한다.

 

 

섬너는 가끔 궁금하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 주변의 세상이 거짓인가?

걱정과 비통, 지루함과 걱정의 세상 말이다.

섬너가 다른 것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그 둘 다 진실일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거친 바다 위 배 위에서 자신의 작은 손길에도 기쁨을 느끼지만 항해 중간중간 잔인하고 추잡한 행동을 일삼는 선원들은 섬너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다리, 팔, 몸통, 머리. 그가 관심을 갖고 걱정한 것은 그들의 육체뿐이었다. 선원들의 나머지 다른 부분 - 그들의 도덕적 성격과 영혼 -에 섬너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선원들을 교화해 유덕한 존재로 끌어올리는 것은 자신의 임무나 과업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을 판단하고, 달래고 위무하며, 친구가 되는 것 역시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번 항해는 그저 남다른 겨울 바다 항해일 뿐이다. 북극곰, 고래, 바다표범, 바다코끼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동물원을 가대했지만, 겨울 바다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감도는 공간이 아닌 고래의 피와 사람의 피가 뒤엉킨 바다 그 자체였다.

 

 

분노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납득할 수 있는 설명과 해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격렬한 분노가 위세를 더하며 그를 집어삼켰다.

회색의 기다란 파도가 에너지를 응축해,

마침내 해안을 덮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야생 동물원을 기대한 군의관 섬너는 인간의 야생성을 목도한다. 섬너를 찾아온 열세 살  남짓의 한 소년 사환 조지프가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누구라도 저질러서는 안되는 폭력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범인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바꿀 수 없는 명백한 사실도 함께 알게 된다.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이때도 그의 관심 대상은 도덕적 성격과 영혼이 아니다. 그는 폭행과 살인이라는 명백한 범죄 행위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자신이 조금 더 조지프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질 때 살인범이 자신을 노리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도 그에겐 없다. 그는 오로지 사실과 범죄 그리고 진범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공허한 자유가 그를 휘몰아쳤고,

분명 그는 이를 즐겼다. 사실 그것은 부랑자나 짐승의 자유였다.

 

《얼어붙은 바다》를 처음부터 읽은 사람이라면 그 범인이 누군지 알 것이다. 작살수로 승선한 드랙스가 그 범인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으로 저질러서는 안되는 잔혹함을 거침없이 드러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미 승선하기 전, 바닷가 부두에서 한 소년을 성폭행한 그가 이 배 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속 범인이다. 하지만, 배 안에 있던 게이인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받는다. 자신이 잡힐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마치 그 마수에서 벗어난 듯 그는 당당하게 행동한다.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그의 행동과 심리를 읽을 때면, 인간이 이렇게나 잔인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집요한 섬너의 추리로 인해 드랙스는 자신의 팔뚝에 남은 조지프의 이가 결정적 증거로 돌아와 그는 잡힌다. 그는 선장을 죽이는 잔인무도함을 보인다. 만약 이렇게 소설이 끝났다면, 권선징악이라는 보편적 이야기로. 선의 경계에 선 선과 완전한 악의 대비가 드러난 소설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끝내지 않는다. 갑자기 배는 난파하게 되고 드랙스는 제한적 자유를 얻게 된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드랙스는 거친 언사와 인간의 추잡함이 난무했던 배이지만 최소한의 인간다움과 이성이 존재했던 배와 낯선 야만의 땅에 공포와 두려움을 불어넣는다.

 


분노는 신속하고 예리하지만,

갈증은 시간을 길게 끌며 오래 지속된다.

분노에는 항상 끝이 있다. 피범벅의 피날레 말이다.

하지만, 갈등이 바닥을 알 수 없고, 무한하다.

날씨가 맹렬하고 험악했는데도

은밀한 안온함을 느꼈다는 것이 확실히 이상했다.

마치 저승 같았다.

실제 세계는 잊어버리고, 그와 관련 없는 별개의 세계인 것 같았다.

뱅글뱅글 휘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섬너 자신뿐이었다.

 

폭력과 살인을 저지른 범인보다 더 두려운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언젠가 자신들이 구조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들은 점차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선원들은 《15소년 표류기》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다. 생존을 위해 떠나는 사람과 생존을 위해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리고 섬너는 이 모든을 의사인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이성을 따라 곰을 사냥하기 위해 떠난다. 그는 걸으며 이 모든 상황의 예측하고 꿈으로 꾼 사람의 이야기가 마음으로 생각한다.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화되자, 그는 혼란을 느낀다. 자신을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과 자신의 감정 앞에 섬너는 조지프의 죽음 때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과 마주한다.

 

 

내게 화난 모양이라고, 섬너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년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섬너가 연민과 부끄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헝클어진 수염 가장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섬너는 자신이 약화돼, 형체를 잃고,

슬픔과 후회가 뒤범벅된 죽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섬너가 극한의 상황에 본 소년은 누구였을까. 조지프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을까. 혹은 다른 사람이었을까. 그가 흘린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그는 부끄러워했을까. 이 대목을 읽을 때 난 섬너의 눈물이 철저히 자신만을 생각한 자신, 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돌아본 것일까. 혹은 스스로가 억울했던 순간 그 이후 세상을 원망했던 것이었을까.

이 생각은 《얼어붙은 바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반전처럼 머리를 쨍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론이었다.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가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 과정은 정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정말 얼어붙은 바다에 혼자 서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 소설이었다.

글을 쓰며 든 생각인데, 《얼어붙은 바다》는 한번 읽어서 알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 속에 담긴 것들이 많아, 생각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지금 한 번 읽고 난 뒤, 생각이 얼어붙은 듯,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인물에 주목해서 보느냐에 따라 바다에서 잔인함을 발견할 수 있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신비로움을 발견할 수 있고, 고독을 발견할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면이라고, 이언 맥과이어는 《얼어붙은 바다》를 통해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다움은 다음에 읽을 땐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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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 - 우석훈의 국가발 사기 감시 프로젝트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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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라고 있을까?
백범 김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과 글을 읽으며 가슴 벅차올랐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때 처음 이 문장이 담긴 글을 읽으며 감동받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 같은 문장을 보면서 든 생각은 다르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건..." 더 말이나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한 채 씁쓸한 느낌만 머릿속을 맴돈다. 왜 그럴까. 내가 신문과 방송에서 이따금씩 마주한 우리나라는 이런 모습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어떻게든 잘 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당연한 사회,
'돈(재력)', '학벌(학력)', '권력' 앞에 인간이 라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사라진 사회,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도, 타인에 대한 공감도 상실한 사회.

그럼,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것일까.
 
2016년 11월 나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섰었다. 우리나라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지켜지는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마 그 자리에 섰던 많은 국민들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때만큼 뜨겁지는 않을지라도, 우리나라가 더 좋은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 바람을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권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하지만 국가나 우리 사회가 정말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좋아졌을까. 아니, 앞으로 좋아질 수 있을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 우석훈은 이렇게 말한다.

 

참 어려운 질문이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 우석훈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세상이 좋아지겠느냐고 물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쉬운 방법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틀릴 확률도 없다.

쉽기는 하지만 비겁한 선택이다.

 

침묵하지 않고 말하기로 결심한 그는 세상에 대해, 국가에 대해, 사회에 대해 현실에 대해 철저하게 고발한다. '괴짜' 경제학자라고 불리는 우석훈의 시각이 녹아진 《국가의 사기》 속 이야기는 언론에서도 방송에서도  좀처럼 다루기 힘든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다각적인 측면에서 고민한 흔적이 담겨있다. 국가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았을 때 개인이 겪게 되는 위험 요인이 무엇인지, 우리나라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국가 권력의 문제, 교육 문제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사교육과 대학 문제, 그리고 각종 공기업과 전문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는 클랜 현상에 대해 낱낱이 분석한다. 주제 하나하나가 다큐멘터리 한 편으로 다루기 충분한 내용이지만 이를 간결한 문장으로, 문제의 핵심을 추려 정리했다. 여러 문제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촘촘히 논리적으로 엮어낸 주제들은 《국가의 사기》라는 큰 주제로 엮어진다.

 

 

 

 

밀실에서 논의하는 것을 광장으로 가지고 나오는 일은 좋은 일이다.

 

《국가의 사기》는 보통 대한민국 국민이면 좀처럼 알 수 없는 국가의 모습을 드러낸다. 우석훈 교수가 분석한 국가 운영 실태는 알면 알수록 충격적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난제 그 자체다. 클랜이 행정 각 분야에서 어떻게 형성되어왔으며, 정권의 정책적 결정 혹은 사법부의 판례가 공고화하게 된 과정까지 남김없이 말한다. 그리고 이를 알아 이 문제가 더는 나아가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 그는 '책'을 통한 공론화 방법을 택했다. 깊이 있고, 다각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갈 수 있는 책이라는 매체의 속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고, 활용할 줄 알기에 가능한 방법이었고, 좋은 전략이었다.

책을 읽으며 어느 한 부분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나의 무지에 놀랐고, 이성적 판단과 논리가 부재한 결정과정 그리고 그 과정이 만든 결과에 놀랐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더 불행할 수밖에 없으며, 더 큰 불행의 늪으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합법' '자유'라는 이름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특히 클랜 현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유착관계, 관행, 제도, 사회 메커니즘들은 충격적이었다. 클랜은 "'집단'을 뜻하지만, 그 어원인 프랑스어 형용사 클랑데스탱에는 '숨어서 하는' 혹은 '비밀스러운'이라는 의미"로 은밀한 곳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기 힘들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힘들고, 실제로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혹은 알게 되더라도, "어차피 사람 사는 데서 늘 생겨나는 현상"으로 생각해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점 역시 문제다.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놓여 있다.

국가는 무엇이고,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왜 실패하게 되는가?

만약에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저자는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은 문제인지, 그저 사람 사는 데서 생길 수 있는 문제이니 넘겨도 되는 모습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한다. 수자원 공사, 원자력 발전과 같은 공기업 문제가 전문적인 영역이라는 틀에서 유착이 발생하기 쉬운지 행정부처 내에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실패하는 국가는 있지만, 공무원과 정부가 실패하는 일은 없게 만드는 행태에 대해 말한다. 직접적으로 '?'를 붙인 질문도 있지만 현실을 고발하는 그의 이야기 뒤에 자연스레 스스로 '?'를 떠올리게끔 한다.

 

《국가의 사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토건족'(건축)과 '교육'문제에 대한 부분이었다.

 

1. 건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건족에 대한 건축과 집 소유 문제와 얽힌 문제에 놓인 위험한 사고방식을 경고한다. 건축이 투기와 발전의 대상이 되었을 때 발생하는 것을 다양한 부문에서 들여다본다. 안전하지 않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기뻐하고, 낡은 아파트의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30년만 지나면 재건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물이 박수받는 이상한 모습을 비판한다. 왜, 튼튼한 건물이 아니라, 개발할 수 있는 건물을 원했는지 그 과정을 이야기한다. 또 건축과 건물에 대한 이해가 젠트리피케이션이 우리나라에서 더 극렬하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개발 메커니즘에서 함께 설명한다. 그는 "건물은 고쳐가면서 쓰고, 지역은 정비하면서 보존하는 것이다. 그게 성숙한 도시이고, 선진국의 도시다. 꼭 왕궁과 박물관만 보존하는 게 아니다. 잘 사는 동네든, 못 사는 동네든, 귀족의 건물이든 하녀들이 거주하던 방이든, 그 자체로 박물관처럼 구조화되는 것, 그게 현대 지리학에서 말하는 '도심의 박물관화'라는 개념이다. 우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 도시들이 이 길을 걸어간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걸어갈 길이 위험천만한 건물에서 다가올 미래 이익을 고대하며 사는 것인지 지금도 앞으로도 튼튼할 건물에서 사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서울이라는 대한민국의 상징이 묻어난 도시에 사는 나에게 생각과 고민을 주었다.

 

 

2.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17년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사교육비는 1인당 25만 6,000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렇게 많은 사교육비를 사용하지만 이 선택이 학생의 미래는커녕 가정의 행복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을 말한다. 우리도 모두 알고 있지만 포기할 수 없는 치킨게임 상황을 그도 알고 있다. 그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교육의 본질에 대해 말한다. "교육은 국가가 시민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이고, 거래는 국가와 학교 사이에서 벌어진다. 학교를 정부 안에 내부화하면 그게 국립학교 혹은 국립대학 시스템이고, 외부화시키면 사립 고등학교와 사립대학이 된다. 일반적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교육에서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가 교육이라는 공공 서비스를 사적 서비스처럼 생각하며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왜 오해일 수밖에 없는지 말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시장보다 더 큰 사교육 시장은 면밀히 살펴보며, 부가가치가 무엇이며 산업적으로 육성해나가야 할 이유가 있는지 묻는다.

 

 

 

 

문제를 푸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각의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우리 모두 동의하지 않을까?

 

그가 좀처럼 들여다보기 쉽지 않은 국가의 민낯을 거침없이 공개하는 이유는 "국가가 집단적으로 벌이는 사기극이나 사기적 구조는 개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조를 지금 바꾸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는 한계에 직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 안정성, 문화적 다양성, 개인의 행복 등 다양한 부문도 더 큰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 《국가의 사기》는 현실을 고발한다. 보통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많은 책은 비판은 날카롭게 하지만, 대안은 흐지부지한 경우가 많다. 《국가의 사기》는 다르다. 굵직굵직한 문제에 대해 말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비판만 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답답함을 주지 않는다. 그의 방법은 지금의 상황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작은 방법들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방안들이었다. 그런데, 이 점이 난 불편했다. 논리적이지 않아서, 현실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어서 말이다. 또 《국가의 사기》 속 문제들이 좀처럼 쉽게 해결하기 힘든 문제이며, 국가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사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방식은 적절하며, 그 메시지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토대는 우리가 좀처럼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주를 이루었고, 이는 국가라는 보이지만 정확한 실체를 잡을 수 없는 것의 생태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물론 《국가의 사기》에서 말하는 것이 음모론이나, 사기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 주장 역시 공론의 장에 나와 점검할 수 있다면, 이 역시 매우 의미 있다. 《국가의 사기》의 역할은, 예비 타당성 검토와 비슷하다. 시기를 고려한다면, 국가 타당성 검토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에 대해 시민 차원에서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작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고 있다. 국가에서 추진하는 사안들에 대한 질문과 답, 문제 제기와 반박이 이루어지는 것만큼 건강한 시민사회는 없다.

 

그리고 그 시민사회의 중심에는 김구 선생님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는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희망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실제 우리 사회를, 국가를 바꿀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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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토리노를 달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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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동계올림픽 생중계

 

 

 

"나는 지금도 동계 올림픽이 뭔지 잘 몰라.
보통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계 올림픽에 비하면 인기가 없잖아."


"좋은 성적을 거둬야 매스컴이 주목하니까.
옛날에는 겨울이면 국내 대회도 TV에서 중계했어.
하지만 지금은 거의 없지.
완전히 심심한 스포츠가 되어버렸어."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을 히가시노 게이고가 본다면 어떨까? 일본 추리소설의 대명사 히가시노 게이고가 에세이를 쓴다면 어떤 글쓰기가 나올까? 흥미로운 추리소설 같은 글쓰기가 시작될까? 그의 매혹적인 추리소설을 몇 권 읽었기에. 그가 쓰는 에세이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그리고 그 기대는 실망이 아니라, 기묘한 반전으로 다가왔다. 아주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와 함께 말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첫 문장이다. 《꿈은 토리노를 달린다》 역시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름 없는 고양이가 등장했던 것과 달리 이름이 있는 인간 같은 고양이 혹은 고양이 같은 인간이 등장하는 소설. 아니, 에세이를 썼다. 히가시노 게이오는 자신의 (인간으로 변한) 고양이 유메미치와 함께 토리노 동계 올림픽을 관람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쓴 책이 《꿈은 토리노를 달린다》다. 메달을 두고 본다면, 아쉬웠던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대해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과 애정을 담아 그 감상과 생각을 밝힌다. 동계올림픽 마니아다운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명 그리고 이따금씩 나오는 투덜거리는 말을 따라가다 보면 유메미치와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동계올림픽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동계올림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에세이는 끊임없이 이 질문을 독자에게 건넨다. 하계올림픽이 아닌, 동계올림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종목들을 알고 있는지, 그 종목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종목에 우리나라는 어떤 선수가 나가고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끝으로 당신에게 동계올림픽은 무엇인지 묻는다.

 

 

 

나에게 동계올림픽은, '김연아'다. 그녀가 금메달을 땄던 2010 밴쿠버 올림픽. 그녀가 은메달을 땄던 2014 소치 올림픽. 그리고 그녀가 홍보위를 맡은 2018 평창 올림픽. 그 이전에 동계올림픽도 봤었지만, 그리 많은 것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 솔직히 히가시노 게이고가 에세이로 쓴 '토리노 올림픽'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읽으며 역시 우리가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4년마다 돌아오는 동계올림픽에 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를 좋아했던 가족과 함께 그녀의 경기를 좋아했었지 동계올림픽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적 없었다.

 

 

 

정말 그럴까. 결국 메달을 따느냐 못 따느냐 하는 문제이지. 이기지 못해도 감동을 주는 건 분명하지. 하지만 그건 주목받는다는 걸 전제로 할 때야. 관심 없어서 보지도 않는데 아무리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난대도 일본인은 감동하지 않아. 애초에 어차피 모르는데 어쩌겠어.

 

 

히가시노 게이고는 동계올림픽에 대한 무관심한 반응을 자신의 애묘에게 툭툭 말한다. 비인기 종목, 메달을 따지 못한 종목을 보며, 왜 메달을 받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 분석한다. 선수를 한 사람 한 사람 분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키점프에서 세대교체에 실패한 이유, 북유럽 국가 선수들이 유리한 이유를 시니컬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방인처럼 서있는 감정에 대해 거침없이 말한다. 자기가 말하다가 감정이 올라와 톡 쏘는 말이 올림픽에 무관심한 나에게 따끔한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읽다 보면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말이 아슬아슬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마치 겨울바람처럼.

 

"이번에 일본의 메달은 하나밖에 없어. 하지만 입상자를 낸 종목 수에는 주목하고 싶어. 스피드스케이트와 크로스컨트리에 스키점프, 프리스타일스키, 게다가 알파인스키에서도 입상자가 나왔어. 이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아무리 메달을 많이 따더라도 하나의 경기밖에 즐기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올림픽은 보고 싶지 않아."

 

 

아무래도 올림픽 매달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는 메달 외에 올림픽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의미하는 바에 대해 이야기한다. 토리노 올림픽에서 메달을 하나 밖에 따지 못했기에 하는 말일까. 그러기엔 그의 말이 꽤 의미심장하다.

 

 

"그 결과 쇼트트랙에서 메달을 다소 딴다고 해도 그게 의미가 있어? 나는 메달 수만으로 올림픽 결과를 평가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해. 이렇게 많은 종목에서 입상자가 나왔잖아. 다양한 종목에서 메달을 노리는 게 동계 올림픽을 들기는 거 아니야? 좋은 예시가 여자 컬링이야. 선수들의 건투로 지금껏 컬링 같은 거 하나도 모르던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게 됐어? 그런 것들이 쌓여서 동계 스포츠, 동계 올림픽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물론 그가 비교하는 대상이 우리나라는 점은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같은 체급을 가진 국가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게 우리나라 동계올림픽은 올림픽 막바지에 이루어지는 "쇼트트랙"에 집중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나 역시 동계올림픽 하면 쇼트트랙이 떠오른다. 다양한 종목에 선수들이 나아가지만, 본선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 하계올림픽이나 동계올림픽에서 좋은 기량을 보인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메달권과 관계없이 다양한 종목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이번 동계올림픽은 주최국이기 때문이긴 하지만, 많은 선수들이 올림픽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잊으면 안 돼…… 그걸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장소가 올림픽이야. 일본에도 겨울이 있고 눈이 내리고 연못이 어는 장소가 있다. 그러므로 동계 올림픽에 나간다. 국가로서 당연한 일이야. 메달을 딸 것 같은 종목만이 아니라, 20위나 30위에 오르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에게 조금 더 빛을 비춘다면 동계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변할 거라고 생각해.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은 우리나라에서 많은 종목의 선수들이 참가한다. 그 외에도 여러모로 뜻깊은 동계올림픽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동계 올림픽이 우리나라 동계 올림픽 인식이 조금 달라지는 계기가 되길. 나 역시 조금 더 다양하게 올림픽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관심을 보내야겠다. 그들이 경기가 끝나고 아쉬움에 고개 숙이기 보다 우리 모두가 "즐기는 축제"가 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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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
캐서린 M. 밸런트 지음, 아나 후안 그림,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미리 본 마지막
여정에 대하여

 

 

셉템버에게 얼마나 긴 여정이 있었는지 그 내용을 모른 채, 셉템버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었다.


1~4권 동안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셉템버를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는 보여준다. 이해할 수 없는 순간, 힘든 순간이 계속해서 찾아오고, 그때마다 셉템버는 지혜롭게 해결한다.

 

"왕관이 널 선택했어. 네가 바로 페어리랜드의 여왕이라고.

내 개인적으로는 더럽게 꿈틀거리는 벌레가

가득한 파이를 내놓고 먹으라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사실인 걸 어째.

네가 아무리 왕관을 잡아 뜯고 엉엉 울어대도

왕관은 너한테서 떨어지지 않을 거야. …"

 

갑자기 페어리랜드에 온 한 소녀가 있다. 이름은 셉템버. 그녀는 페어리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소녀에서 마흔 살이 되어보기도 했지만 왕관의 선택으로 여왕이 된 건, 당연히 셉템버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도도새의 알의 마법으로 과거의 모든 왕과 여왕들이 되살아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자기를 놓고 시시한 말다툼을 벌이는 사람들, 아침마다 똑같은 마법과 경이와 씩씩한 위험들을 반짝반짝 닦아놓는 일, 허구한 날 심술궂고 위험한 바다를 어여쁘게 떠돌아다니는 일, 세기마다 똑같은 늙은 폭군들과 용감한 영웅들을 데리고 노는 일에 정말이지 몹시 질린" 페어리랜드의 왕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왕이 된 것만으로도 기막힌 상황인데, 셉템버에게 왕위를 지키기 위한 경주에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페어리랜드의 심장"을 찾는 경주에 말이다.

 

셉템버의 내면에서부터 나온 차분함이 심장에 고여

모든 것을 매끈하고 깔끔하게 다듬었다.

오랜 세월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벌어진 일에, 셉템버는 당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다 요정 새터데이와 엘, 웜뱃, 나팔총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전부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셉템버를 위해 이 모험에 적극 동참한다. 친구들과 함께 해서일까. 셉템버는 얼떨결에 시작한 경주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그 경주에 참여한다. 그 과정은 여느 '경주'들처럼 긴장되고, 흥미롭다. 그리고 그 경주의 끝은 행복하고 완벽하기까지 하다. 5권만 읽은 나에게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만족스러운 결말이었고, 완결이었다.


 

페어리랜드의 '왕'이 된다는 건 무엇인가?

 

"당신이 세상을 지배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지배하는 건 당신 자신뿐이에요."

"왕이 되는 건 최고의 도둑질이야."

 

나는 《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를 읽으며 셉템버를 따라가다 보면, "권력"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만든다. 왕이 된다는 것에 대해 셉템버는 질문받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모험 중간중간 그녀의 마음과 생각에 쌓인다. 이렇게 셉템버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판타지 소설인지 철학 소설인지 헷갈린다.

 

"남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 너는 그것이 될 것이다."

"난 폭군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 폭군이 아닌 거예요."

 

사실 좋은 판타지 소설은 다 이렇듯 철학적인 이야기를 숨기고 있기 마련이다. 현실과 다른 환상의 세계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어떤 판타지 소설은 그 철학적 이야기를 티 나게 드러낸다. 마치 독자에게 철학을 가르치려는 어조로 말이다. 촌스럽게 말이다. 물론 이건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내 생각을 좀 더 붙여본다면 《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는 촌스러운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왜냐하면, 촌스럽게 썼다고 하기에 이 세계는 다채롭고 한 장 한 장 넘기는 순간이 즐거워 그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 그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전혀 없지. 하지만 권력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많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물건을 모두 한 곳에 모아두고 영원히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갖고 있다. 그들의 행동이 모두 비뚤어지고 힘들어지는 것은 순전히 그들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일들 때문이다.

 

페어리랜드의 왕이 되기로 마음먹은 뒤, 셉템버는 계속 자신의 자리를 시험하게 만드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숨기기도 하고, 친구를 잃기도 하고,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고, 상대에게 말하며 스스로에게 필요한 말을 찾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셉템버가 놓치는 이야기는 이렇게 저자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속삭여준다. "왕"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 길어지고, 셉템버에게 이야기가 많이 쌓이자 친구들과 이별 아닌 이별의 순간을 마주하기도 한다. 특히, 셉템버에게 특별한 새러데이와의 이별은 의미심장하다.

 

"네가 어떻게 날 잊어. 그러면 안 되잖아." 셉템버가 속삭였다.
"다른 건 다 잊어도 날 잊으면 안 되잖아. 우리를 잊으면 안 되잖아."

 

이 순간이 누구보다 셉템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것, 그 섬뜩하고 무서운 순간이 셉템버를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으로 만들었고, 솔직하게 만들었다. 사실 셉템버에게 어느 순간보다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새러데이의 시간이 뒤엉키고 난 뒤에 셉템버는 "심장"을 찾는 경주에서 확실히 앞서 나가 결국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승리 후 그녀는 페어리랜드의 왕으로 바로 즉위하지 못한다. 셉템버와 함께 경주했던 경쟁자들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 죽음은 꼭, 해리포터가 죽음(사실은 죽음이 아니었던 그 죽음)을 맞이했던 장면과 겹쳐 보였다.

 

"그리 잘 해내진 못했어요. 난 정말로 내가 이길 줄 알았거든요.

나는…… 나는 좋은 여왕이 될 것 같았어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 이에 대해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엔딩이란 말은 쓸데없다. 세상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러분이 이야기를 그만하기로 선택하는 지점은 하나뿐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영원히 이야기로 이어진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셉템버는 어떤 소녀를 만난다. "새로움"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어떤 소녀를 말이다. 그렇게 끝은 끝나고, 시작을 시작한다.


 

《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에서 꼭 전하고 싶은 진실은 이거다.

 

"모든 것에 심장이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어디에도 그 중심에 가장 중요한 것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은 다른 누가 부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만이 알 수 있다는 사실. 감정을 느끼고, 잃을까 봐 두렵고, 간절히 자신이 원하고 그래서 이를 지키기 위해 어떤 용기도 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심장이라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심장은 쉽게 멈추지 않고, 쉽게 끝낼 수는 없다는 걸 말해준다.

 

《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심장은 무엇입니까?라고.

그리고 그 심장을 멈추게도 하지 말라고 빙긋 웃으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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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헤르만 헤세가 쓴 산문,
그의 사랑이 녹아진 글들.

 


삶의 한가운데, 길을 잃고 멈춰 선 우리에게,
헤르만 헤세가 들려주는 그만의 작고 소중한 비밀
《우리가 사랑한 헤. 세. 헤세가 사랑한 책. 들.》!

 

"이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작품들의 배경은 언뜻 보기에는 성과 산, 골짜기와 정원, 가까운 해변이지만, 실제로는 시인의 영혼이다. 그의 영혼 안에서 이 세계의 온갖 현상들은 아름다운 하늘에 떠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부드럽고 말갛기도 하다."

 

독일이 자랑스러워하고, 전 세계가 사랑한 작가 헤르만 헤세.

그는 많은 소설을 남겼고, 시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작품으로 시공을 넘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채우고 있다. 그가 쓴 수많은 문학작품은 그가 할 수 있는 글과 언어로 만든 하나의 세계였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등 그는 작품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고백한 작품이 자신의 작품으로 밝혀질 때 한 글을 통해 한 말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그를 알 수 있는 것 같지만, 작품이라는 베일에 싸인 그를 본 건 아닐까.

 

평론이 캐내지 못하는 비밀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작가에게도 혼자서만 아는 작고 소중한 비밀을 지킬 권리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베일이 찢겨나간 다음 나는 《데미안》에 주어진 폰타네 상을 반납하고, 출판사에 앞으로 이 책의 새로운 판본에는 내 이름을 달아달라고 요청했다.

 

《우리가 사랑한 헤. 세. 헤세가 사랑한 책. 들.》은 헤르만 헤세가 책을 읽고 쓴 서평들을 엮은 책이다.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책에 대한 이야기이자, 누군가도 책들의 가치를 알아보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담긴 글이다.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던 글들로, 그가 얼마나 책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그의 편지다. '책'에 대해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 하지만 가만히 알려주지. 그대 자신 속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한 헤. 세. 헤세가 사랑한 책. 들.》의 책들은 그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길들이고, 책을 읽고 쓴 서평은 그 길에서 찾아낸 것이다. 여느 소설 평론집이나, 서평집을 떠올렸다면, 그 생각은 잠시 뒤로 미뤄두자. 작가가 생산한 1차 도서가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쓴 글들이 엮어진 2차 도서임에도 책들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들여다보며 만든 세계가 책 속에 가득 담겨있으니까. 그러므로, 이 글들은 평론가들과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했던, 하지만 그가 끝내 말하지 않았던 '헤르만 헤세' 자신에 대한 글들이다. 작가이자 독자였던 그가 어디에서 위로를 받았고, 어디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는지, 어디에서 행복에 젖어들어갔는지, 어디에서 사랑을 배웠는지, 신비로운 세계의 체험을 한 곳이 어딘지를 그의 글로 들려준다. 오로지 인간 헤르만 헤세의 글들이 촘촘히 채워져 있는, 《우리가 사랑한 헤. 세. 헤세가 사랑한 책. 들.》는 작은 틈 사이를 우리의 생각으로 빼곡히 채워나가게 만들어준다.

 


그에게 도스토옙스키란?

 

 

도스토옙스키는 그냥 천재적인 작가, 러시아 낱말을 완전히 장악한 사람, 러시아 영혼에 대한 속 깊은 해석자만이 아니다. 그는 고독한 모험가이며, 운명에 의해 기이하고도 눈에 띄게 선택된 사람, 총살 직전 마지막 순간에 은사를 입은 죄수, 고독하고 가여운 안내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한 헤. 세. 헤세가 사랑한 책. 들.》는 헤세의 절친한 친구이자 뛰어난 편집자였던 폴커 미헬스가 펴낸 헤세 전집 20건 중에 5권의 책을 원전으로 삼았으며, 이중 73편을 안인희 씨가 추린 것이다. 서평이기 때문에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평은 남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나에겐 도스토옙스키 부분들이 특별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이 작품(까라마조프가 형제들)은 결코 다함이 없다. 나는 며칠이라도 여기서 새로운 모습을 찾아보고 또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보여준다.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 하나가 더 생각난다.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했고, 그의 소설에 담긴 것을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연구하기로 마음먹으면 평생을 다해도 시간이 모자란다던 대학 스승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헤르만 헤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읽을 때마다, 도스토옙스키라는 문호의 이야기와 세계 속에 빠져들었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올 때면 새로운 것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사랑한 헤. 세. 헤세가 사랑한 책. 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도스토옙스키'다. 무려 3편의 서평과 작가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단지 3편의 서평을 써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미성년》, 《백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을 두고 쓴 글의 길이는 다른 산문보다 훨씬 길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 글 중간중간에 담긴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 등을 언급할 때면 그가 얼마나 도스토옙스키를 생각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비참할 때, 우리의 고통 감내 능력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고통받고 삶 전체가 그냥 하나의 타는 듯한 아픈 상처로 느껴질 때, 절망을 숨 쉬고, 희망 없음의 죽음을 죽을 때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 비참함으로 고독해지고 마비되어 막연히 삶을 건너다볼 때, 삶의 거칠고도 아름다운 잔임함을 더는 이해하지 못하고 더는 삶을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작가가 울리는 음악에 마음을 연다.

 

그의 표현에 적극 공감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버틸 힘이 없을 때, 끊임없는 죽음이 자신의 주변을 감돌 때를 도스토옙스키만큼 이해할 수 있는 작가는 없다.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봤었고, 그 경험이 그의 작품 곳곳에 묻어난다. 헤르만 헤세는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다. 20세기 초반 인류의 잔악함이 끝이었던,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피부로 느꼈고, 눈앞에서 목도했던 그에게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 건 당연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비참함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영혼을 발견하게 해주는 작품이기에. 난 헤르만 헤세의 생에서 가장 큰 위로를 준 작가가 도스토옙스키란 생각이 든다. 

 


그는 수많은 책들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73편의 글은 그가 걸었던 길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는 길을 잃어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그는 자신의 삶이 툭툭 묻은 지도를 건넨다.

 

그 지도가 바로, 《우리가 사랑한 헤. 세. 헤세가 사랑한 책.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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