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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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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질서 너머 삶과 죽음을 철학하는 사랑의 작별 인사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중요한 여러 경험에 이해 가능한 빛을 비추려는 시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떠올랐던 문장이다. 소설이지만 예견된 상실 앞에 인간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가하고 끊임없이 물으며 삶에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삶의 끝에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우리는 그럼에도 거대한 슬픔 앞에 불가능할 애도를 행하고자 할 때가 있음을 알고 있다. 만약 이 불가능함에 약간의 틈을 벌어준다면 어떨까? 물리적으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여 그리운 사람을 과거 속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도록 열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인간의 상실과 슬픔을 진정으로 어루만질 수 있을까. 정해진 끝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삶 속 빛을 잃지 않는 모순적인 희망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러한 특수한 사고 실험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여 상실과 슬픔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답하기 위한 철학적인 여정을 다룬 책, 바로 『시간의 계곡』이 되겠다.


산과 호수, 시내와 과수원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작은 마을은 언뜻 평범한 작은 시골 같지만,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서쪽에는 20년 전의 과거가, 동쪽에는 20년 후의 미래가 펼쳐지고 있는 또 다른 마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이의 경계를 넘는 것 또한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되는데, ‘현재’의 마을 자문관에게 비통함으로 인해 일상이 어려울 정도여서 불가피한 애도 여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할 경우만이 해당된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를 넘는 것은 자문관의 판단 아래 통제되는 배경 속에서 주인공 오딜은 어머니의 강한 권유로 ‘자문관’이 되고자 힘쓴다. 한편, 오딜은 다른 마을을 방문하는 ‘애도 여행’이 불필요하다고 믿으며 현재 속에서 슬픔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어느 날 마스크를 쓴 방문객을 발견한데다가 그들의 정체마저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누가 비극을 맞게 되는지 알게 된 오딜은 여전히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을까. 오딜은, 마을은, 그리고 자문 기관은 상실을 겪는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까.


고요하고 섬세하지만 돌진하는 듯한 서술에 몰입하며 읽었다. 작가가 직접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쓰였다는 걸 알게 되어 더욱 진솔하게 다가오기도 했는데, 미처 작별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다 느꼈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험과 고민이 담긴 소설인 만큼, 시간 여행이라는 환상적인 요소를 즐기면서도 기억과 감정, 상실과 극복의 상관성에 대해 잠시 고민해볼 수 있었던 깊이 있는 이 책을 오래도록 다시 펼쳐보게 될 듯하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이 문장은 피터 비에리의 『삶의 격』에서 발췌했어요!


추신. 제게도 과거의 마을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할까 생각해봤는데, 음… 적어도 세 번은 필요할 것 같아요. 어쩌면 아예 가지 않는 것도 나을지도요. 입맛이 씁쓸해졌던 상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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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프로그램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저울질하는 일이라고 네가 그랬잖아……. 만약 그게 네 직업이 된다면 아마 너는 슬픔에 점점 익숙해질 거야. 마치 슬픔이라는 감정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p.117


“현재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연약한 것이죠.”

p.133


“아닙니다. 서쪽으로 간 사람이 거기서 개입을 일으키면, 시간이 파도처럼 그를 덮쳐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삼켜버립니다. 아주 단순하고 무자비하게.”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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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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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불꽃을 쫓다 설자은 시리즈 2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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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번영 아래 도사리는 혼란의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자애로운 날카로움.


어느덧 두 번째 권으로 찾아온 설자은과 목인곤의 이야기이다. 첫 권인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에서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만나 왕의 대사가 되어 금성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게 되었는가에 다다르는 프롤로그 격의 작품이었다 한다면, 이번 두 번째 권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집사부의 힘을 빌려 사건을 해결하고 ‘베어야 할 것을 주저 없이 베는’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그래서인지 사건의 규모도, 그에 얽힌 사람들의 배경도 보다 복잡하고 비대해져 자은과 인곤에게 (그리고 독자인 나에게) 더 정교한 추리와 고민을 요했던 책이다.


『설자은, 불꽃을 쫓다』에는 세 개의 사건이 수록되어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금성 연쇄 방화 사건(「화마의 고삐」)과 자은의 납치 사건(「탑돌이의 밤」), 그리고 오소경으로 떠나려던 이들이 당한 산적 강도 사건(「용왕의 아들들」) 등이 펼쳐진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부터 자은과 인곤의 활약은 왕에게 지원을 받게 된다는 점인데, 그러면서 새로운 조력자들(말갈인 삼형제, 김노길보 등)이 등장하기도 하고 집사부의 권한으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된다. 이 덕분에 자은과 인곤이 수사할 수 있는 사건들의 범위가 금성 전체로 넓어지게 되어 통일신라 금성에서 충분히 있었을 법한 신라인과 실향민(혹은 망국민)들과의 조화와 갈등 등이 더욱 섬세하게 풀어졌던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더 마음에 남은 지점은 자은과 인곤의 개인적인 혼란과 고뇌였다. 두 사람은 왕명으로 ‘흰 매’가 되어 금성의 어두운 면을 파고들지만, 명랑한 공기 속에서 핏빛 현장을 자주 마주하는 일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무언가에 대한 깊은 고뇌로 이어지곤 한다. 또한 자은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는데, 백제인인 인곤, 말갈인인 삼형제 등과 만나고 그들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면모를 알게 되며 생각이 더 깊어진다. 이렇듯 세 개의 사건 속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재미와 함께 통일신라 사회라는 독특한 다민족 국가의 상황을 고려해볼 수 있었던 사려 깊은 이야기였다.


몇 개의 사건을 거치면서도 자은은 꾸준히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자 한다. 사람들이 광인을 구타할 때에도 상처를 치료해주고 옷가지를 쥐어주며,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이 맡은 소임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베어야 할 것을 분별해낸 즉시 자은은 망설임 없이 칼을 빼든다. 그런 자은의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은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인곤도 자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되어간다. 금성 너머 광대한 신라의 땅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두 사람의 자애로운 날카로움의 덕을 볼 수 있을까 궁금하지만, 그것은 그 다음의 이야기.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솔직하고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추신. 세 번째 권까지 확정된 설자은 시리즈인데, 당연히 다음 책도 읽어볼 생각이에요! 내년 말 즈음 출간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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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무엇을 베어야 할지 보는 순간 알 것이다. 아직 보지 못했기에 베지 못했음이야.”

p.17


“별것 아닌 상처를 입어도 가끔 그렇게 되는 이가 있지. (…) 왜 그럴까? 왜 어떤 상처는 그토록 덧나버릴까?”

p.62


“택한 상대와 묻어주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야. 중한 일이야.”

p.67


“어떤 궤를 벗어난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의 마음에 어둠이 남네. 이제 와선 자네 앞에서 세상 불행을 다 끌어안은 척했던 게 부끄럽지만, 나는 조금 굶었던 것만으로 안쪽에 어둠이 고였어. 음식을 삼키면 뱃속에서 그 그림자도 함께 흔들리지. 자네 안에 그런 게 남지 않았을 리가 없어.”

p.78


“무엇에 쫓기나? 지난날의 과오에 쫓기는 자가 많을 테고, 오지 않은 날들에 쫓기는 자도 더러 있을 테지. 어느 쪽인지만 명확히 알아도 덜 쫓길 텐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긍휼히 여기게. 쫓기다 사로잡힌 자들을.”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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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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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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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비트는 다른 우주 속에서 불변하는 인간에 대한 사색과 질문들


무려 ‘켄 리우의 신작’이다. 이외에 이 책을 읽어야 할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전에 한국에서 출간되었던 작가의 단편집과는 달리, 이번 작품은 영미권에서도 공식 출간된 작품이다! (『The Hidden Girl and Other Stores』로 만나볼 수 있다.) 이러한 아주 단순한 이유로 이 책을 읽고 싶었고, 마침내 읽게 되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탄탄한 과학적 논리로 무장하면서도 휴머니즘적 감동 또한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미 유명한 켄 리우의 작품의 특징은 이번 단편집에서도 도드라졌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첨예하게 다루어지는 뜨거운 이슈들(총기 난사 범죄, 인터넷 트롤링, 가상현실, 전쟁 난민, 환경 위기, 핵 폐기물 등)과 잊혀져 가는 역사적 설화(「섭은낭전」과 삼국지의 도원결의 등)를 조합해 독특하고도 예리한 SF 서사를 쌓아간다.


표제작인 「은랑전」은 8세기 당나라 대의 「섭은낭전」을 모티브로 삼아 펼쳐지는 SF 소설이다. 암살자로 훈련 받은 어린 소녀는 충성심과 의무, 자신이 믿는 옳은 가치를 위해 싸우게 되는데 (심지어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 상대가 될지라도!), 그 과정에서 그녀의 정체성과 운명에 대한 혼란과 폭로가 이어지게 된다. 이 단편에서는 작가가 역사적 요소를 환상적인 상상력과 어떻게 결합시키는지가 부각되면서도 현재의 삶의 가치들에 대해 재고해보게끔 하는 매력이 있었다.


표제작 외에도 역시 마음에 와닿는 작품들이 많았다. 역사 만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점이 도달 가능한 미래 세계에서 어떻게 재현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작가의 사변적인 시각으로 현대 문제를 탐구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비잔티움 엠퍼시움」에서는 가상 현실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도록 허용하는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기술이 어떻게 공감과 사회 정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그리고 공감의 본질과 착취의 가능성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등의 윤리적 질문을 내게 남겼다. 또한, 「추모와 기도」에서는 총기 난사로 인해 희생된 딸을 기억하고자 온라인 세계에서 조문을 연 부모에 대한 공격을 묘사하면서 비극과 분노의 반복과 대상화, 그리고 무의미한 폭력 앞에 노출된 인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은랑전』에 수록된 열세 개의 단편은 열세 개의 다른 우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작가가 그려내는 각기 다른 우주는 공감과 성찰, 진실과 탐구라는 공통된 주제로 엮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비범한 상상력과 일상의 사건을 조합하는 작가의 능력은 즐거움을 넘어 깨달음과 감동,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작은 전망을 함께 선물해주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솔직하고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추신. 영미판 『은랑전』에 없는 몇몇 단편은 다른 단편집에 수록되어 이미 출간되었었네요! 오리지널 단편집도 읽어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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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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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다면 무너지지 않는다 - 2500년 철학자의 말들로 벼려낸 인생의 기술
하임 샤피라 지음, 정지현 옮김 / 디플롯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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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동진 평론가 님의 채널에서 ‘자기계발서’를 조심하라는 주제의 영상을 보았다. 내 나름대로 자기계발서를 즐기지 않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평론가님의 의견은 어떨지 궁금했기에 30분 가량 되는 긴 영상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해서 봤었다. 그 중에 충격으로 다가왔던 대화는 ‘철학책 또한 일종의 자기계발서’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토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공자의 『논어』가 자기계발서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니. 신선한(?) 충격에 잠시 멍해졌지만, 이어지는 평론가님의 반박에 다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갖춘, 거대한 질문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의 집합체라 할 수 있으나, 동시대의 자기계발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답변의 요지였다. 진정한 자기계발을 원한다면 자기계발서보다는 철학 서적 등의 다른 분야를 탐독하는 것이 사고를 넓히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점에서 더 적합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영상을 마무리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읽은 철학 신간 『철학이 있다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더욱 반가운 책이었다. 동서양을 아우르며 지난 세기의 철학자와 사상가, 작가와 학자가 삶 속에서 고뇌하고 발견한 ‘지혜’가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담겨 있던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어떤 사상가이든 깊게 파고들면 들수록 난해하지만, 이 책은 깊은 철학적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작가의 사례와 철학자의 일화, 관련 서적에서 빌려온 인용구를 통해 요점을 전하는 데에 집중했기에 각오했던 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읽기 수월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책은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삶과 죽음에 대해 묻고, 삶에서의 행복과 의미에 대해 묻는다. 이어 이처럼 거대한 질문에 대해 여러 현자들의 답을 소개한다. 만리장성의 빼곡한 한자로부터 시작하여 에리히 프롬, 세이 쇼나곤, 장자와 혜자의 대화, 몽테뉴와 제인 오스틴까지 익숙하거나 낯선 학자들이 삶이라는 난제 앞에 내놓은 해답의 역사를 짚어나간다. 그리고 수천 년에 달하는 철학의 역사를 읽다 보면 어느덧 현자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 함께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책은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은 어떤 철학의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 혹여 당신의 삶에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묻는다. 만약 독자가 삶의 정답을 요구한다면, 책은 철학에 정해진 답이 없는 것처럼 삶에도 정답은 없다고 답한다. 다만 철학은 각자만의 해답을 길어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고, 그 해답이 있다면 삶은 흔들리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그 해답을 찾길 원한다면 이 책은 긴 여정의 탄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평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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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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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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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없으나, 자신의 삶은 이해할 수 있게 될*


조해진 작가님은 내겐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최근 우연히 동네 도서관에 비치된 한 계간지를 읽다가 『빛의 영원』 연재를 만나면서 처음 읽게 되었다. 이전 작품과 연결되는 지점이 간혹 보이는 듯해서 작가의 이전 작품을 찾다가, 넷플릭스 「로기완」의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탈북 청년, 브뤼셀, 르포르타주. 매력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도망치듯, 혹은 홀린 듯 흘러가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하여 이 작품으로 작가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함경도 출신 탈북 청년 L의 여정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플롯과, 그를 따라 무작정 벨기에로 향한 방송 작가 ‘나’의 플롯, 그리고 먼 땅에서 L의 흔적을 찾기 위해 김 작가가 만난 ‘박’의 플롯의 크게 세 가지 줄기가 이어진다. 윤주의 일로 인해 그녀와 재이 모두에게서 도망치듯 벨기에로 떠나온 김 작가는 이니셜 L, ‘로’가 이국 땅에서 겪었던 냉대와 멸시, 외로운 삶을 체험하고 ‘박’이 지닌 죄책감의 무게를 알게 되면서 지난한 일상 속에서 ‘나’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 고민하게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저마다의 절망과 상처를 품고 있다. 다른 이들은 짐작하지도, 끝내 이해하지도 못할 깊숙한 내면의 고통을 짊어지고 위태롭게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작품이 그리는 현실은 애달프고 암울하다. 그러나 소설은 그 자리에 멈추지 않는다. ‘로’는 ‘박’과 ‘라이카’를 만나 유대하며, ‘김 작가’는 ‘박’을 만나 서로를 거울 삼으며 절망 속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내고야 말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만 절망 속에 갇힌 사람은 저마다의 애환으로 인해 불행하기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하다는 것을 작품은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작품은 말한다.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고. 다만,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진심은 곧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에 가닿게 되어 마침내 다른 이와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첨예하고도 끈질긴 사실이 되었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솔직한 주관적인 감상평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목은 김연수 작가님의 추천사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이보다 더 적당한 말을 못 찾을 것 같아 가져오게 되었어요.


p.s. 최근에 읽고 있는 『기억의 기억들』과 질감이 비슷한 작품이어서 더 즐겁게 읽었습니다. 한 인물의 일기에 기록된 자취를 따라간다는 점이 재밌었네요.


p.s. 다음은 아마 소설집 『빛의 호위』를 읽어보지 않을까 싶어요. 단편도 궁금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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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p.7


“가장 아픈 진실은 그 모든 것이 다만 우리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것이다.”

p.74


“—살아남으시오. 

브로커는 이어 말한다.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보지 않겠소.”

p.104


“그러나 내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이다.”

p.151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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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2024.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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