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그 불확실했던 봄에 스며있던 적대감과 비통함을 문학적 재치와 따뜻한 유대로 녹여내기
그해 봄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한다. 처음은 도심의 한 변호사였다. 그 후, 전염병은 주거지로 옮겨져 하루가 다르게 감염자들을 늘려나갔다. 내가 머물던 카운티까지 그것이 오기까지는 한 달도 채 필요치 않았다. 집에는 막 백일을 넘긴 아기가 있었고, 마스크는 동이 났다. 집에서는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때부터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식사를 했다.
그해 봄에 학교는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마음을 닫았다. 나는 갓난아기가 걱정되어 외출할 때는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을 착용했다. 만나는 사람에게도 종종 나눠주었다. “진심으로 그깟 게 전염병을 막아줄 거라 믿나?” 길을 걷는 내 옆에 한 택시기사가 급하게 차를 멈추고 창 너머로 소리쳤을 때, 나는 그저 웃어 보이고 지나갔다. 아마 얼굴의 절반을 덮은 마스크 때문에 내 표정을 보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기억한다. 나는 내 마스크를 보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들이 경거망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를 바랐다.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나는 그곳을 떠났다. 마지막 기억이 적대감으로 점철되었다는 건 지금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
시그리드 누네즈의 『그해 봄의 불확실성』을 읽으며 당시의 기억을 자주 되짚었다. 이 책은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시대적 경험을 배경으로 삼아, 인간의 본질과 문학의 위안을 탐구한다. 굉장히 간결하고도 사색적인 문체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그 불확실한 일상 속에서 길을 잃은 인물들의 내면에 조용히 독자를 초대한다.
이야기는 한 노년의 소설가가 봄과 꽃의 이름에 대한 사유로 시작한다. 때는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서서히 혼란 속에 접어들고 있는 시점인데, 그러다 갑작스레 지인의 부탁으로 ‘유레카’라는 초록색 깃털의 앵무새를 맡게 된다. 일상에 앵무새가 한켠을 차지한 것도 잠시, 소설가의 일상에 한 명이 더 들어온다. 앞서 유레카를 돌보던 대학생인 ‘베치’가 한밤중에 불쑥 찾아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이 동거는 독특한 대비를 이루게 된다. 뉴욕이 결국 봉쇄되고 맨해튼이 유령 같은 도시가 되면서 이웃들은 차갑게 변하고 예민해진 가운데, 이 낯선 동거는 서로에게 묘한 위안이 되어간다. 이들을 통해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도 누군가는 살아가고, 사랑하며, 문학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일상의 단편들은 담담하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점이자 매력적인 점은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사색이 깊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 사이사이에 자리한 이 사색은 버지니아 울프로부터 시작해 찰스 디킨스, C.S. 루이스, 고다르, 앨런 긴즈버그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명인들을 인용한다. 덕분에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들을 수 있어 즐거운 독서가 되었다. 비록 드라마틱한 사건은 이 책에 없지만, 실제 우리가 겪은 세계 속 적대감과 비통함에 대해 담백하고도 문학적인 위안을 건네는 작가의 재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추신. 문학덕후들이 읽으면 너무나도 좋아할 것 같은 책이에요!! 꼭 작가님의 열 번째 장편소설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_
“나는 왜 평생 애도하며 사는 기분인지 알고 싶다.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도무지 사라지려 하질 않는다.”
p.20
“나는 코믹한 소설을 쓰고 싶었고, 내 인생에 대해 쓰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p.184
_
2025.03.12
@lilybooks_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