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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란 이름의 기억 ㅣ 테익스칼란 제국 1
아케이디 마틴 지음, 김지원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7월
평점 :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 지금-여기의 질문으로 가득 찬 미래 제국의 대서사시
가장 좋아하는 장르를 고르라면 단연 추리/미스터리와 SF를 택하곤 한다. 전자는 논리적으로 사건을 추적해가다가 틀리는(!) 재미가 있고, 후자는 내가 아직 맞이하지 못한 미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 속에 푹 빠져들 수 있어 좋아하는 장르이다. 『듄』과 『파운데이션』을 영상물로 접하고 책도 읽으려던 중에 접한 새로운 SF 시리즈인 ‘테익스칼란 제국’ 시리즈는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휴고상을 연이어 수상한 작품이라니,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케이디 마틴의 『제국이란 이름의 기억』은 시리즈의 첫 권으로, 딱 보기엔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보인다. 거대한 우주 제국, 첩보와 음모, 복잡한 정치 상황, 그리고 외계 기술까지. 하지만 읽다 보면 금세 깨닫게 된다. 이건 단순한 SF가 아니다.
이야기는 르셀 스테이션이라는 작은 식민 기지 출신의 외교관, 마히트 디즈마르가 거대한 제국 ‘테익스칼란’에 새 대사로 파견되며 시작한다. 뇌에 전임자의 기억과 인격을 이식받고 출국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그 전임자가 의문사한 채 발견된다. 미스터리는 평범하게 끝나지 않고, 이 상황을 통해 정체성과 언어, 문화와 제국주의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즉, 음모를 해결해나가며 등장인물들은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속하고 싶은 ‘우리’는 나를 받아줄 것인가.
기억은 누구의 것이며, 타인의 기억을 가진 나는 진짜 ‘나’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주인공 마히트의 개인적인 정체성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성, 문화 동화와 저항, 언어의 권력 같은 테마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예컨대, 테익스칼란의 사람들은 시詩를 쓰고 인용하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교양과 정체성을 증명한다. 마히트는 그 언어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모든 은유와 인용을 완벽히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 여기서 그녀가 느끼는 소외감과 열등감, 그 안에 도사리는 분노와 질투 등 매우 현실적인 ‘외부인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이 치밀하게 구축된 세계관과 결합해 현실과 맞닿는다. 제국은 ‘야만인’을 끌어들이되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해를 말하면서도 끝내 이해하지 않는 현실이다.
테익스칼란이라는 제국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사유가 몹시 재미있는 책이다. 기술적으로는 초고도 문명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고전시대와 매우 닮아 있다. 시가 중심인 문화와 시민/야만인 구분, 형식적인 예절과 제례 등의 모습은 로마가 떠오르면서도 현대 강대국의 모습을 동시에 닮은 복합적인 국가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는 우주 전쟁도, 초월적 기술도 많지만 정작 가장 치열한 전장은 인간의 의식과 언어, 그리고 기억이 된다. 시와 은유가 외부인에게 권력의 장벽이 되는 세계에서 문학은 공감보다는 배제의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면 ‘제국이란 이름의 기억’이 과연 누구의 기억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오래 곱씹게 될 것이다. SF 팬은 물론, 세계 그 자체에 관심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되겠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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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트는 이제 모든 사람을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나누는 테익스칼란식 패턴에 빠져들었지만 방향은 그 반대, 거꾸로였다. 그녀는 그들만큼이나 인간적이었다. 그들은 그녀만큼이나 인간적이고.”
p.86
“그들의 이야기에서 오가는 암시와 인용을 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어린애 같다는 걸 알면서도 질투심이 들었다. 비시민이 시민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멍청한 갈망. 테익스칼란은 만족스럽게 갈망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갈망을 더욱 주입하도록 만들어졌다. 마히트도 그걸 알았다. 하지만 할 말을 삼킬 때마다, 단어나 구절에 나오는 정확한 함축적 의미를 모를 때마다 질투가 몸에 스며들었다.”
p.195
“테익스칼란 도시, 테익스칼란 언어, 테익스칼란 정치가 그녀를 온통 감염시킨 상황에서, 마히트 디즈마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그녀에게 걸맞지 않은 이마고, 빠르게 자라는 균류가 침입하듯이 그녀 안에서 자라나는 기억과 경험의 덩굴처럼.”
p.362
“기억에 남은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p.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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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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