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충청남도 천안(天安)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아버지로부터 유교적 전통과 충효정신을 깨우치고,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한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문화를 접하면서 교육에 대한 꿈과 민족정신을 키워왔다.
1915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4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영명학교(永明學校)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寬玉)을 만났다. 그후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