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뉴 노멀'이라고 칭하며 빠르게 따라잡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곤 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강자가 약자가 될 수도 있는 시련의 시기이기도 하면서도 단번에 역전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다. 위기가 기회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또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팬데믹은 어떨까? 진보를 위한 '뉴 노멀'일까?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팬데믹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현상들에 대한 반박. 음모론자로 몰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우리에게 질문을 과감하게 던지는 이 책은 효형출판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전염병은 항상 있어왔고 또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 가고 있고 이제껏 만나지 못한 생명체와 만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질병과 만나게 되었다. 질병은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삶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코로나19가 시작되던 초기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레 죽었다. 중국은 엄청난 봉쇄를 실행했고 우한에서는 시신을 처리하지 못하여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불과 몇 달 사이 미국과 유럽에서도 같은 현상이 생겼다. 내가 살고 있던 대구에서도 갑자기 환자가 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서구사회와 같은 봉쇄는 없었다. 이번 팬데믹에 잘 대처했던 우리나라에 비해 유럽 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른 것 같다. 공권력이 동원되는 봉쇄의 모습은 긴장감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공안의 안내를 받으며 출퇴근도 공안과 함께 했던 중국 출장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나라 사정으로는 느낄 수 없는 공포가 분명 존재한다.


  이 책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역자의 질문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우리가 비상사태를 받아들이는 이유가 정말 팬데믹이 불러온 두려움 때문이기만 한 것일까?

인권과 자유는 살아 있는 인간들이 아무런 통제 없는 접촉에서만 가능한가?

세상을 바꾸자는 그의 정치가 혹시 인간만을 위한 지구의 모습은 아닐까?

  이 책이 주장하는 많은 것들과 함께 우리는 역자의 질문 또한 생각해야 한다. 둘의 생각은 배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삶의 지속과 함께 사회학적인 변화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멸망은 바이러스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싹을 틔운 파시즘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은 소위 선진국의 민낯을 보여주었고, 제3 지대를 살피지 않는 옹졸함은 변이의 변이를 만들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과 중국은 패권 전쟁을 시작하였고, 뒤처지면 안 되겠다는 조바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명분 삼아 러시아는 전쟁을 일으켰다. 자원 독점을 무기 삼아 유럽의 증오를 키우고 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지구 위의 인간의 삶을 위해 서로를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은 점점 더 폐쇄되고 민족주의가 강해지고 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던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것도 지금의 조 바이든이 트럼프보다 더 미국 중심주의적인 정책을 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저자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는 지금 100년 만에 파시스트가 총리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다. 조르자 멜로니는 자신의 정당의 뿌리가 무솔리니에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세상은 분명 바뀌고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바뀌고 있다. 서구에서 시작한 민주주의는 지금의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제도일까라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만들었던 '민주주의 2.0'의 사이트처럼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토론하고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그곳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고, 소외되고, 비난받는 세상이 되고 있다. 비단 이번 팬데믹의 백신 미접종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이런 위치에 자연스레 놓이게 된다. 그것은 분명 경제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려움은 군중 속에 들어갈 때 사라진다. 이번 팬데믹 상황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군중의 개인주의는 집단의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정치가들은 그것을 잘 이용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북한을 이용해서 그런 정치를 많이 했다. 세상이 망한다는 공포를 조장하며 다른 생각들을 압살 하곤 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펴려고 하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절차는 지켜야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기술-보건을 넘어서는 정책에서도 절차를 너무 쉽게 무시하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이 글의 주된 내용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항상 그렇듯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이거나 자신의 목표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단순히 비난하고 증오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정도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팬데믹 앞에 무력한 게 아니라 '무력할 의지'를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력한 의지'는 권력자에게 나의 의지를 힘없이 내어주고 만다.


  인간은 단일하게 존재할 수 없다. '접촉'이라는 단어가 혼자서 이뤄질 수 없듯 우리는 사회를 이루고 산다. 그 공동체가 가족이라는 작은 범위에서부터 범지구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접촉'은 그것이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단지, 랜선 위의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했을 때만큼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고민해 볼 수 있다. 인간의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 저주 일지 국가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 축복일지는 우리에게 달리지 않았을까.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항할 권리 -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가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에 철학은 있어도 철학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철학의 자리는 과학이 차지했고 빠르게 변하는 사회는 철학의 사유와 깨달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과거 위대한 철학자의 것들을 현대에 맞게 끼워 맞춰 가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철학서를 찾는 사람의 수는 점차 늘어가는 것 같다. 지금의 시대에는 인문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소리 높이는 사람들도 많다. 빠른 과학의 발전 속에서 인간마저 인간이길 고민하는 생각을 내려놓는 비인간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는 그런 것들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팬데믹 시대. 보건이라는 명분으로 법률을 넘어서는 통제를 가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함이겠지만 그 자체로서 이미 야만적인 결정이라고 얘기하는 이 책은 효형출판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저자는 어떻게 보면 현대에 적응한 몇 안 되는 철학자 인지도 모를 일이다. 팬데믹이 발생하고 봉쇄 정책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웹사이트에 기고를 시작했다. 시대와 속도전에 뒤처지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충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나를 위해 그리고 상대를 위한 배려라는 행동에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다. 농경 사회 유전자를 가진 우리는 협력의 유전자는 어느 나라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마스크를 쓰고 격리를 충실히 해내었다. 그럼에도 이탈자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생존이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도덕의 범위에서 조율될 수 있기 때문에 괜찮다.

  팬데믹이 확산될 때 진행한 백신 패스(유럽에서는 그린 패스)는 정부의 정책에 호의적인 나에게도 탐탁지 않은 정책이었다. 감염되어 자연스레 격리를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동선의 차별을 백신 접종 여부에 따른 차별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그렇게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중국이나 유럽의 상황은 우리보다 훨씬 심했다. 그야말로 동선이 완전히 제한당했다. 그 옛날 통행권을 사고팔던 시절보다 더 심하다. 통행권마저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에게 안전이란 있을 수 없고 단지 안전하다고 느끼고 살뿐이다. 이번 팬데믹에서 여러 국가들이 보여준 정책들은 '보건'이라는 탈을 쓴 '독재'라고 얘기라고 한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싶다. 독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야만의 정책이었다. 자본 독재 시대에 보건 독재 시대까지 겹친 상황이라고 할까.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인지한다. 인간에게 얼굴이란 인정을 받기 위한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대단히 정치적인 요소다. 타자로부터 고립된 개인은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에서 디지털로 마주하는 상대에게 얼굴의 요소가 있겠지만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임을 인식해야 존재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얼굴 없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했다. 

  팬데믹이라는 비상사태는 '예외 상태'를 만들었고 위헌소지가 있는 정책을 '보건'이라는 명분으로 실행했다. 저항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두려움은 사람들을 순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 자체로만 본다면 분명 야만적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민족주의가 강해지는지는 지금의 현실과 상관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언제 '파시즘'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는 시대다. 우리는 정책가들도 인지하지 못하는 '파시즘적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저항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의 생각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보건'이라는 두려움과 '공동체'라는 배려를 생각하면 지금의 일들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일인지도 생각이 든다. 파시즘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의 생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은 인간임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고, 지금은 그러지 못하다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물론 법률로 고립된 개인의 취약함을 얘기하고 있겠지만 디지털로도 충분히 인간임을 인식하고 있지는 않을지, 더 나아가 인간 자체가 변하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건담에는 아무로 레이라는 '뉴타입'이라는 인간이 존재한다. 우주에서 나고 자라서 중력이 있는 지구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는 다른 감각의 소유자다. '뉴 노멀'의 시대에는 '뉴타입'의 인간이 등장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고 있다. 

  세상과 디지털의 차이는 '정보량'이다.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디지털이 만들어낸다면 그것으로 세상 이상의 세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디지털 노마드가 일상이 되고 메타버스 속에서 업무를 진행한다. 물론 물질적인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 24시간 디지털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도 생겨날 것이다. (예를 들면 식물인간처럼)

  사회가 야만에 익숙해지고 '파시즘'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미래의 것을 믿는다. 디지털 휴먼과 디지털에서 살아가는 휴먼의 구분이 모호해지겠지는 것이 두렵지만 그것 또한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의 경우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스터리와 스릴러라면 범죄물, 탐정물 같은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전쟁보다 더 스릴러에 가까운 것은 없을 것이다. 모반과 암투 그리고 배신 그 모든 것이 미스터리하고 잔인하다. 작품은 공간을 전쟁의 한 복판으로 설정한다.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는 아라키 무라시게를 설정해 둠으로써 약자들의 결정체를 파고드는 균열의 조짐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지혜를 나눠주는 간베에를 설정해 둠으로써 책의 주인공이 무라시게인지 간베이인지 모호한 배경을 깔아 두고 있다. 역사와 미스터리의 완벽한 조화인 이 작품은 픽션이다. 들판을 돌진하며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된 오케하자마 전투 같은 호쾌함은 없지만 문제를 풀어가는 리더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 농성 중인 아라키 성 내에서 생긴 사건과 이를 해결하는 리더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리드비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시대는 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부하라가 일본을 평정하기 직전인 듯하다. 무라시게는 오다의 가신이었으나 그에 대항한 마지막 세력이 되었다. 모리 등과 대항하기로 했으나 목숨을 구걸하는 장수들은 하나둘 오다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라키 성은 그야말로 요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군사의 사기는 시간이 흐름에 변하게 되고 무사들은 전적을 일으켜 세상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 무사에게 참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무사는 죽는다. 자식이 죽어도 일족이 가문을 남기고,몇 대 전의 아무개가 용감하게 죽어 지금의 집안이 있는 거라고구전될 날을 생각하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다.

  농성 중인 성에는 여러 가문들이 함께 있고 그들마다 사정이 다르다. 작품은 모두 4개의 사건을 담고 있다. 포로를 죽인 자를 찾아내는 것, 전공을 세운 자를 정하는 것, 귀한 스님의 살해 그리고 모반을 추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하나로 아우르는 사건은 책 말미에 반전이라면 반전의 묘로 남길 수 있다. 

  이 작품은 치밀한 계략이 주된 재미는 아니다. 물론 창을 이용한 살인, 사건의 순서의 재배열을 통한 풀이 등은 분명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성주 무라시게의 심리며 그가 여러 가문을 통솔하고 이끄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곧 리더십의 문제기도 하다. 

  이유가 있어 저질러진 일이지만 리더의 권한을 침범한 사실에 대해 엄벌하고 또는 뉘우치게 한다. 중간 리더의 사정을 살펴 조용한 곳으로 불러 차를 나누는 명분을 제안하여 개인적으로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난세에 인간의 심리를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가. 무라시게는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계속 생각나게 했다. 무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심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반대로 하려는 자신의 신념이었다. 백성들에게 신망을 잃은 존재의 최후는 잔인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참는 것의 대가였고 결정은 신중했으나 단호했다. 

  '바람의 검심'의 아내 <토모에>가 생각나게 하는 '지요호'는 그야말로 매력 있는 여성이었다. 군주는 전략가라 종교가 필요하지도 않고 종교에 의탁해서도 안된다. 종교는 개인의 안위에 비는데 군주는 자신이 안위가 아니라 수하와 백성 모두의 안위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교는 중요하다. 전략은 백성들에게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근심이 많은 이 세상에는 그렇게 저항할 수 없는 약자가 더 많은 법,종문의 가르침에도 없는 몇 마디가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 이 세상이라면,꾸며 낸 기적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 또한 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돌격하면 극락, 후퇴하면 지옥' 전쟁이 종교를 위한 매우 정치적인 구호다. 무사는 이 말에서 헤어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죽은 뒤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무서움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죽음 뒤에 극락을 가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쓴다. 무사를 다스리는데 전략이 필요하다면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종교가 필요하다.

  성은 결국 함락당하고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당한다. 간베에는 성에서 구출되어 작품의 에필로그를 서술한다. 많은 장수들은 사라지고 무라시게의 종적은 알 수 없다. '지요호'는 한 떨기 꽃처럼 참수당할 때마저 고요했다고 전한다. 오다 마저 죽은 시점으로 작품을 마무리된다.

  한때 NHK에서 방영하던 일본 대하드라마 '신센구미'를 본 적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신선조다. SMAP의 카토리 싱고가 주연이었지만 지금 일본의 소수 정당 '레이와 신센구미'를 이끄는 야마모토 타로가 연기한 10번 조장 '하라다 사노스케'도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물론 우리 사극인 '용의 눈물'이나 '태조 왕건', '무인 시대', '불멸의 이순신'도 즐겁게 보았다. 최근에는 '태종 이방원'을 했던 것 같은데 어떨지 궁금하긴 하다.

  픽션 소설은 역사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도전이 계속되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법의 자리 - 시민을 위한 헌법 수업
박한철 지음 / 김영사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헌법은 우리나라의 최상위 법이면서 모든 법의 근간이 된다. 법은 헌법, 법률, 명령, 조례, 규칙의 단계를 가지고 있고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상위법이 하위법보다 우선 적용한다. 헌법은 헌법재판소가, 법률은 국회가, 명령은 대통령이, 조례, 규칙은 장관이 관리하는 식이다. 최근에 국회에서 입법한 내용을 시행령으로 무마하려는 행위는 어찌 보면 이 근간에 대한 도전이라고도 생각이 든다. 이처럼 헌법은 어떻게 보면 국가를 의미하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일 것이다. 지난 20여 년의 헌법 재판을 통해 우리나라 헌법을 다시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13개의 주요 헌법재판을 되돌아보며 우리 헌법(혹은 헌법재판소)이 걸어온 길을 얘기하는 이 책은 김영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법이라는 것은 국가를 이루기 위해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국가를 고대 로마에서는 '공공의 상태'라고 했고, 막스 베버는 '합리적 지배'라고 했다. 게오르크 옐리네크는 국가는 국가권력, 국가인민, 국가영토로 구성된다고 했지만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영토가 없더라도 국가로 인정되기도 했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라고 했다. 이제는 경제적인 것으로까지 되기도 했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헌법 또한 정치적 타협의 결과일 것이다. 타협의 가장 이상적인 부분이 헌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만 권력을 알기 위해서는 헌법을 알아야 한다. 일반 국민 누구나 헌법을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오덕 선생의 주장이 이해가 기도 한다. 지금의 법률 체계는 미국과 독일을 따르고 있고 법률 용어는 지극히 일본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법과 철학은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지만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철학은 추상적이지만 법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철학을 논외로 할 순 없다. 특히 헌법과 같은 최상위 법률은 더욱 그러하다. 평등은 무엇인가, 정의는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시대에 맞춰 해석해 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정치적 기울어짐도 없이 오직 가치와 기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헌법재판관도 사람이며, 임기가 있고 세상에 초연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자신의 자리를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책에서 다루는 13가지 헌법 재판은 안타깝게도(?) 내가 모두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사실 이런 내용이 논쟁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하위 법률에서 혹은 행정에서 이를 보완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군 가산점 제도, 시각장애인 안마사 독점, 양심적 병역 거부 등이 그러하다. 양성 평등에 있어 호주제 폐기, 낙태 허용, 간통죄 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부분이 논란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서울이 수도여야 한다는 관습헌법은 굳이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 행정 분산을 통해서 서울 밀집을 늦추고 지방도 살리면 좋은 것 아닌가. 요즘은 사무처리가 인터넷으로 모두 이뤄져 굳이 한 곳에 모여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친일 재산 환수 결정에 헌법을 들먹이며 재판을 신청한 패기에는 사실 어이가 없었다.

  챕터의 시작은 늘 철학적 질문과 서술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철학적인 책이다. 그리고 실제 헌법재판의 결과와 해석을 달아준다. 법률 그 자체가 말이 어려워서인지 알 것 같다가도 이내 미궁에 빠져버린다. 무슨 말이었지?라는 되새김을 하다가도 예전의 기억에 의지해 페이지를 넘기곤 했다. 그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바뀌는 것은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용납될 것 같지 않았던 양심적 병역 거부 또한 일부 인용되었고, 낙태죄 또한 2021년 1월 1일 폐지되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정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고 있어 법에 위반되는 낙태 또한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국회 일 좀 해라)

  세상은 빠른 속도로 양극화되며 분열하고 있다. 논쟁의 여지가 많아지고 토론이 사라지고 원색적인 비난만 난무한다. 소위 '법대로 하자'라는 말이 익숙해졌고 정당의 일을 법정에까지 들고 가는 일이 생기고 있다. 정치적인 부분까지 헌법재판소의 임무가 넓어지고 있다. 하지만 헌법 재판은 최소한이 되어야 한다. 정치가들이 국회에서 제대로 일한다면 굳이 헌법재판소까지 들고 갈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제 우리나라는 UN 인권이사국에서 처음으로 연임을 실패했다. 정치적 혐오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지금의 시대 헌법 또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까. 다음 20년을 되돌아보는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헌법을 유린하는 사태는 얼마나 또 생겨나 있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2 세트 - 전2권 - 문지원 대본집
문지원 지음 / 김영사 / 2022년 9월
평점 :
절판



  바로 얼마 전까지 '우 to the 영 to the 우'를 외치며 dab 동작을 하던 것이 유행이었다. 천재 자페 스펙트럼 환자는 우영우의 활약상을 얘기하는 이 드라마는 자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너무 미화되었다는 반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자폐는 예비 범죄자로 인식되어 가지는 지금의 상황에서 인식 개선을 위에 나쁜 방향은 아녔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장애인을 인식하는 사회의 태도와 독립해 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이 대본집은 김영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소뇌척수변성증을 겪은 키토 아야가 수기로 남긴 <1리터의 눈물>은 화제가 되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때 어머니의 바람은 좋은 남자 친구가 있는 설정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 병 또한 드라마에서 미화된 점이 있었지만 희귀병을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 열광하게 되는 것은 비단 뛰어난 연기와 연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페 스펙트럼 중에서도 특이 케이스를 가져왔지만 병에 대한 얘기와 변호사들이 볼 때에도 바람직한 판례들은 분명 기초가 탄탄한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1권의 즐거움을 이어 2권을 그대로 이어 읽었다. 2권은 9화에서부터 16화의 내용이 들어 있었고, 로펌에 어느 정도 적응한 우영우의 얘기보다는 사건과 우영우의 태성에 대한 얘기에 집중이 되었다. 조금 더 극적으로 치다를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좋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자연스럽고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자신에게는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동생에게는 좋은 엄마로 남아 달라는 말을 태수미가 순순히 받아 들렸다는 사실은 마지막까지 악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해피엔딩을 만드는 마무리였다. 모든 것들을 갈무리해서 마무리한다는 것은 이 작품이 좋은 작품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만큼 좋았던 대본집. 물론 박은빈의 연기가 글자를 살려 완벽한 드라마로 만들어 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천천히 읽는 드라마 같은 기분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