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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 어울림 - 공존을 위한 사회적 다양성
고려대학교 다양성위원회 기획 / 동아시아 / 2021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 함이다>라는 다빈치의 말이나 <단순화할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해야 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단순함을 추구해 오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Simple is Best>라는 말로 정리되기까지 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단순함을 원했다. 기업들은 효율이라는 슬로건으로 같은 물건을 무수히 찍어내듯 만들었다. 최근에는 <미니멀리즘>라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까지 많아지고 있다. 단순함은 우리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일까?
다양성을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의 글을 담은 이 책은 동아시아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단숨함에 대해서 반대로 생각해 보자. 모든 물질은 안정적인 상태에 놓이려고 한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모든 물질은 <혼돈>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다. 사무실에서 효율을 높인다고 정리 정돈을 철저히 하라고 하며 삶은 심플하게 살아야 한다고 <미니멀 라이프>를 주장할 때에도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회사에서 Simple함은 분명 효율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러 자료를 뒤적거릴 때 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모든 상황이 직관적이고 명료할 때에는 그것 이상의 것을 떠올리지 못한다. 너저분하게 깔려 있는 환경 속에서도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생명의 생존에 관해서라면 다양성은 더 중요하다. 생태계에서 단순함은 멸종과 이어진다. 매년 일어나는 가죽 전염병으로 모든 동물을 폐사시켜야 하는 것도 코로나19가 인간 전체를 위협하는 것도 결국 다형성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냉혹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자연은 그렇게 선택하며 선택되며 지구에서 살아왔다.
책으로 돌아가서 인간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떠나서 사회학적 다양성을 생각해보자. 사실 나는 성소수자나 장애인 그리고 여성 차별 정도의 얘기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를 두고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한다.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칼자루를 마구 휘둘러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뇌는 심플함을 좋아한다. 그것은 뇌가 게을러서라기 보다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관인 만큼 에너지를 최대한 줄이려는 생리적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사>보다 <명사>를 좋아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은 뇌의 인지 기능을 아껴주는 중요한 심리 기제다. 가까운 사이에 쌍둥이가 있다면 쉽게 구별할 수 있지만 처음 보는 쌍둥이는 도무지 구별이 안 되는 것과 같다. 고정관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고정관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인류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한국 사회는 더더욱 힘겨운 것 같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는 성별 표기란에 남녀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성별 선택란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TV에 동성애자만 나와도 방송국을 뒤집어 놓는 점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미국에도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은 이미 시스템적으로 동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MIT 공대의 여교수 비율은 50%가 넘지만 한국에서는 10%가 되질 않는다. 장애인이나 경력 단절 여성의 취업 혜택을 '역차별'은 역차별로 간주되기도 한다.
시점을 바꿔서 다른 곳을 들여다보면 초등학교 교과서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교과서는 아이들의 힘만으로도 잘 쓰일 수 있는 재질로 만들어져야 하며 글씨 쓰기는 성인 이들이 쓰는 궁서체가 아닌 아이들만의 글씨체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여러 가지 교과서와 폰트를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편으로 인도에서는 자신의 문자를 적절하게 적용할 수 없는 폰트 때문에 고유어를 사용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이것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양 문명의 차별이기도 했다.
이런 차별은 왜 생겨나고 유지되는 걸까? 일부는 능력주의를 내세우며 당연한 결과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능력을 똑같이 발휘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호감을 가진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 호감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그것은 아마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이 시점은 기득권자가 소수자를 대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런 행동이 일어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기저가 작용했다.
우선 아이들이 접하는 인물들은 과거의 인물들이 많다. 자연스레 성 역할이 구분 지어 교육하게 된다. 교과서의 삽화에서도 위인전에서도 존경할만한 여성의 수가 적다는 것이 중요하다. 힘들어도 유리창을 깨고 나가는 여성의 절대적인 수가 많아야 한다. 힘들지만 이겨내야 하는 선구자의 굴레다. 그다음에는 사회적으로 노출되는 정보에서 찾을 수 있다. 성소수자나 장애인을 다루는 미디어는 절대 부족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홍석천 씨를 제외하면 전무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리며 그들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그것이 그들이 사회 공동체임을 느끼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신 기술이라는 AI에서도 이런 문제는 계속된다. 얼굴 인식이 흑인만 되지 않았던 것이 피부색이었다는 점과 구글 번역기가 모호한 문장의 주어를 대부분 he로 번역했다는 점 그리고 가사를 도우거나 일의 보조를 맞추는 음성이 대부분 여성의 음성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색인종과 성차별을 했을 뿐 아니라 보조업무나 가사업무는 여성이 잘 어울린다는 고정관념을 심어주게 되었다.
세상이 복잡해져서 하루하루 살아가기 쉽지 않다. 그런 속에서 단순함은 조금의 편함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편함에 취하다 보면 양극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글을 적어봐야 작가의 고충을 이해하듯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우리는 서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을 창의적으로 키우고 싶어서 많은 경험을 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에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과학에서 여성의 비중이 낮지만 여성 과학자는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남성 과학자는 현상의 본질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여성 과학자는 과학을 사회와 잇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 같은 일을 해도 여성과 남성의 시야가 다를 수 있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갈수록 좋아질 것이다. 아이들의 인식 조사는 생각보다 고무적이었다. 그럼에도 다양성을 유지하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지금 당장의 1차원적인 노력뿐 아니라 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결핍을 채워주는 정책만으로는 오히려 역풍만 맞을 뿐이다. 더 진지한 고민들이 필요하다.
이 책은 여러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의 다양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렇게 다양한 것들이 다양성을 해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무심코 하던 행동들이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의 시대에 처해있는 다양함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