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무자비한 여왕
코가라시 와온 지음, 양지윤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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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로맨스의 정석이라고 해야겠다. 몸이 아픈 여자와 마음이 아픈 남자의 대립. 여자는 아프다 하지만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다. 그에 반해 남자는 어딘가 삐뚤어져 있다. 여자는 남자의 삐뚤어짐을 바로 잡아주고 남자는 그런 강인함 뒤의 불안한 상태를 마주하게 된다. 남자에게 여자의 모습이 스며들고 여자는 그렇게 사라진다. 작품은 이런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클리세 위에 글이 지겹지 않다면 그 이야기는 대단함 힘을 가진다. 이 책은 대체로 그렇다.

  허무주의자 17세 소년의 로맨스 어떤 여주인공이 그 속에 사랑이라는 싹을 틔어줄까? 이 책은 흐름출판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소노 마키나. 그녀는 특이한 병을 앓고 있다. 일본의 로맨스들은 검색해야 알 수 있는 희귀병을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몸속에 셀룰로스가 자라는 병이다. 인간에게 셀룰로스는 소화도 시키기 못하는데 몸속에 생긴다는 설정이다. 물론 수술 후 특정 목적을 위해 셀룰로스를 사용하기는 한다. 인간의 장기는 셀룰로스와 거의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 자체가 식물의 속성을 타서 그럴까. 그녀는 식물을 사랑한다. 매일 병실에서 화분을 가꾸고 꽃집에서 주기적으로 주문으로 한다. 그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하토. 남편을 잃고 건강 교실에 빠져 버린 엄마를 납득시킬 수 있는 일자리가 꽃집이었다. 그런 엄마 또한 식물을 기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 작품이 즐거운 이유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의는 선한 영향을 만드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로맨스를 택했다. 마키나가 제안한 스무고개 문답은 그 답을 찾아가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예, 아니요"로만으로 진행되는 문답 속에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 무관심한 이에게 상대를 최대한 관찰하여야 하는 문답은 상대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도 했다.

  선하지만 삐뚤어진 남자 주인공은 이런 소설에 딱 맞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신용 같은 걸까. 거부감 없이 응원하게 되는 걸까. 엄마의 등살에 맞춰준다는 사실이 이미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키나는 그런 선함에 용기를 심어준 사람이랄까. 17세 소년은 그렇게 세상과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일본 작품 대부분은 기적적인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작품에 희귀병이 언급되는 순간 기적을 바라면 안 된다. 어떻게든 해피엔딩을 만들고자 하는 작품들과는 차별점이 있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겠지만 적어도 의미 있는 이별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너무 슬퍼 아름다운 이야기다. 작품 결말의 마침표는 여러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청춘의 치열했던 사랑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줄까. 그것이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뜨뜻미지근한 삶을 보낸 나에겐 늘 대리 만족을 주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도 그중 하나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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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 번은 행복을 공부하라 -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도 행복을 배운다
탈 벤 샤하르 지음, 손영인 옮김 / 좋은생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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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한가?라는 질문이 성립할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너무 많은 걸 담고 있는 단어가 아닌가. 행복과 불행은 양가적인 감정이라 서로의 선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둘의 경계는 절대적이지 않고 왔다 갔다 한다. 행복의 폭이 넓은 사람이 있고 불행의 폭이 넓은 사람이 있다. 행복이 대단한 거라 생각하면 불행은 사소한 부분부터 다가오고 행복이 별거냐라고 대하면 불해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다.

  행복을 정의해야 하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행복마저 공부해야 하는 세상인 듯하다. 사람들의 고민이 너무 많아져서 그렇다. 이 책은 좋은 생각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행복하냐, 불행하냐라는 문제의 답은 어렵다. 그냥 조금 힘들고 지치고 조금 더 나아가면 도망가고 싶고 그런 감정 상태다. 그것을 불행으로 등가교환하는 건 조금 비약이지 않을까. 불행이라는 단어가 너무 품고 있는 게 많아서 삶에 먹구름이 드는 기분이 되어 버릴 거 같다.

  스스로에게 행복한지 묻지 않는 한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다

  나는 칼 라거펠트의 이 말을 읽은 이후로 행복에 그다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사는 거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마음만 가지고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짜증, 화남, 힘듬으로 바로 불행으로 결론 내어 버리면 내가 너무 작아진다는 느낌도 있다. 인생 자체가 번뇌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할까. 싫은 건 싫은 거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건 아니니까.

  책 도입부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직접적인 행복 아닌 간접적인 행복을 추구하자라고.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말 거야라고 다짐하면 행복해지기 쉽지 않다. 그리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모두 자신의 탓이 된다. 그냥 오늘을 살아내는데 함께 했던 것들에게 좋은 의미를 부여하는 게 어떨까. 맑으면 맑아 기분이 좋고 비가 오면 빗소리가 좋고. 나는 책을 읽어 좋고. ㅎㅎ

  감정이 꿈틀댄다는 건 살아 있는 증거고 그건 내가 정상이라는 걸 증명한다. 혹은 살아 있음을 얘기한다. 불안은 생존에 꽤나 중요한 본능이고 스트레스는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성장시킬 뿐이다.

  니체의 강렬한 말은 그래서 좋은 듯하다. 인생은 짧게 보면 비극이지만 길게 보면 희극이다. 하지만 죽을 때 행복해야 진정한 희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긴 세월을 살아내면 다 추억이 된다. 갈등은 작품을 풍요롭게 하는 이야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지금 너무 힘들면 내려놓고 쉬는 것도 기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인생은 짧은 듯 길기에 뛰는 날이 있으면 쉬는 날도 있고 하는 게 아닐까. 감정은 솔직히 받아들이고 방출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쉽게 불행이라는 단어에 가두지는 말자. 

  분홍코끼리는 잊으려고 할수록 생각나고 잠은 자겠다고 다짐할수록 오질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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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지만 - 예민한 나에게 필요한 반경 5m의 행복
나오냥 지음, 백운숙 옮김 / 서사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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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SP(High Sensitive Person). 의학적 용어는 아니지만 꽤나 예민한 사람들을 부르는 단어다. 하지만 꼭 민감해야지만 관계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건 아니다. 기를 받고 기를 빨리는 관계는 언제나 성립하니까. 에너지가 부족하면 집에 머물고 싶다. 사실 나도 집에만 있고 싶다. 사회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묘한 친근감이 있는 이 책은 서사원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집에만 있으면 몸에 좀이 쑤셔 못 버티는 사람이 있는 반면, 거실 바닥에 그대로 누워 멍하고 있는 일이 좋은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 중에 한 명이다. 그렇다고 집에만 주야장천 있고 싶은 건 아니다. 취미 생활을 할 땐 또 그렇게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일단 집에 들어서면 집 밖을 나가고 싶은 생각은 많이 없다. 

  그렇다고 집에서 멍하니 있는 건 아니다. 나름 분주하다. 집순이/집돌이가 집 밖을 나가지 않는 건 에너지가 모자라기보다는 오롯이 에너지를 나에게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과 의 관계에 에너지 효율이 좋지 않은 것도 한 몫한다. 때때로는 SNS에서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래서 늘 일정 거리를 두려 한다. 그게 서로에게 편할 것 같아서..

  에세이인데 묘하게 괜찮다. 뭔가 진솔하다는 것이 텍스트를 뚫고 올라오는 책들을 가끔씩 만나는데, 이런 귀욤뽀짝 한 캐릭터 사이의 빽빽한 글들이 그런 분위기를 내고 있다. 모든 것을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너는 그랬구나 정도의 토닥거림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에세이를 읽는 게 힘든 이유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일방적으로 쏟는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기 빨리는 작업이다. 다행스럽게 저자는 동일한 분위기의 소유자라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아서 좋았다. 자주 읽던 내용인데도 뭔가 반감이 없다고 할까(동지애인가..). 그런 느낌이다.

  순식간에 읽어버린 책이지만 '이건 책장 어딘가에 꼽아둬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의 나를 위해서랄까. 가족들을 위해서랄까. 그런 기분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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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자유에 관한 가장 명료한 통찰
안넬리엔 드 다인 지음, 한혜림 옮김 / 북스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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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유. 내가 아는 자유와 다른 사람이 아는 자유가 같다고 생각했다. 도덕과 윤리를 배우던 우리에게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자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스컴을 통해 전달되는 자유는 이상하리만큼 자신들만의 자유였고, 자유로운 것이 도대체 누구의 것을 얘기하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자유. 어떤 문장으로 표기되지 못할 만큼 다양한 논쟁이 있다. 그런 자유의 변화를 기술하고 있는 이 책은 북스힐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민주주의', '자유'. 둘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자기 합리화에 대단함을 느낀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내가 그들의 정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유가 이렇게 동상이몽을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유를 잃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재의 그늘에 들어가는 것도 모르게 된다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생각났다.

  인간은 원래부터 자유로웠다.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함인지 '리바이어던'의 압제에 굴복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유는 사회적 정의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대 사회에는 (시민이라고 정의되던) 사람들 전체의 자유가 있었다. 그들은 시민적으로도 자유로웠고 정치적으로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꼭 다수의 정치가 옳을 순 없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겪은 플라톤은 현인에 의한 정치, '철인 정치'를 주장했다.

  고대의 자유는 실패였을까? 결국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많은 왕들의 독재에 삼켜졌다. 하지만 많은 부르주아들은 '자유'를 외쳤다. 왕의 독재가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들이 외치는 자유가 대중에까지 확산하려고 하자 또 그러면 안 된다고 외친다. 모순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근거다. 사람을 너무 자유롭게 두면 결국 서로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성악설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고 민중은 개돼지라는 생각도 말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혁명은 확산되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랄까. 소외되었던 여성이나 노예들은 참정권을 획득했다.

  기득권들은 선민의식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자유는 법 아래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료주의의 폐단도 무시할 수 없다. 애초부터 훌륭하다는 판단은 누가 할 수 있을까? 대중의 동의 없이 만들어진 법이 대중의 존중을 받을 수 있을까도 문제다. 먹고 자고 즐기는 것에 자유롭다는 것만이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자들이 어떻게든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같은 맥락으로 보질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는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자유를 철저하게 분리하려는 그들에게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그들의) 자유를 위한 제한된 민주주의라는 뜻이다.

  이런 이해는 히틀러나 소련의 등장으로 인한 적색경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개인적으로는 기득권 보호로 이해되지만). 더 과거로 가면 프랑스혁명을 겪었던 귀족들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참정권을 외치던 사람들도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이 몰려들자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외치게 된다. 자유는 보편적인 단어가 아닌 느낌마저 든다.

  산업혁명 이후로 사유 재산의 폭발적인 증가는 개인 재산을 지키기 위하는 것이 자유라고 여겨졌다. 기업가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시작된 듯하다. 하지만 이런 자유는 재산에 의한 구속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노동자의 유토피아인 '사회주의'를 폭발시키기도 했다. 둘 다 지켜져야 할 가치이기 때문에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방임주의를 외쳤고 반대쪽은 큰 정부가 필요하다고 외쳤다. 자유주의자들은 큰 정부가 결국 독재라고 정의했고 다른 편에서는 정부가 더 이상 특정 세력의 것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양극화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의미는 그것에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자유를 분리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가난한 다수의 폭력에 다칠 부유한 소수를 위한 것인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라고 인식하기도 한다. 대중은 어리석어서 적절한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민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시민 자체가 정치적인 자유가 필요하다. 그것이 현대적인 해석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다. 물론 중우정치로 빠질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지만 정치를 한다는 사람치고 괜찮아 보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이다. 시민 그대로 어리석지도 않아야 하지만 어리석은 대리인을 뽑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유는 결국 더 간절한 쪽의 것이었던 것 같다. 우리의 자유가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끊임없이 깨어있길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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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프로그래머 되는 법 -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선배 개발자의 39가지 노하우 / 국내 개발자 8인 인터뷰 수록
피트 구들리프 지음, 최원재 외 옮김 / 한빛미디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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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감이 교차하게 만드는 책이랄까. 그저 발갛게 빛을 내고 있는 숯에 바람을 불게 만든다고 할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오면서 훌륭하게 코딩을 하지는 못했지만 더 나아지려고 노력은 분명했으니까. 우리는 코드보다 시퀀스가 더 중요한 메카트로닉스 쪽에 가까워 코드 자체도 보수적이었지만 이런 책을 볼 때마다 뭔가 두근댄다.

  개발자로서의 할 일과 자세 그리고 함께 일하는 방법 그리고 약간의 위로까지 담고 있는 이 책은 한빛미디어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책은 굉장히 딱딱하고 건조하다. 잘하기 위한 방법은 대체로 비슷하고 굉장히 엄격한 자기 계발서처럼 만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날 때부터 코딩을 잘했을까 싶지만 하나씩 고치지 않으면 향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커다란 소프트웨어 조직에서 직접 겪을 수 있는 경험은 테스트 서버도 없는 작은 회사에서 공부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시작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유쾌함이 있다. 우린 서로 쓰레기 같은 코드를 내뱉고 있고 버그 사냥을 나선다. 똥통에 뒹굴기도 한다. 내가 남의 코드에 하소연할 때 다른 이도 나의 코드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나 스스로 잘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낫다.

  언어는 굉장한 속도로 새로운 것들이 발표된다. 그것은 모두 자신만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만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두 개 정도는 깊숙이 공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지도 거다. 반대로 어떤 프로그램이라도 의미는 있을 거다. AI가 판치는 지금의 세상에서도 어셈블러나 기계어를 배우는 것도 이해의 측면에서 괜찮은 선택이며 결국 누군가는 하고 있을 일이다. 새벽에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들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꼭 필요한 존재다.

  여러 테크닉적인 글보다 자세에 대한 얘기가 좋았다. 물론 코딩하는 자세 같은 것도 있다. 조는 자세나 좌절하는 자세 밤샘하는 자세 같은 것도 있어 유쾌했다(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개발자로서 프로그래머로서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얘기도 좋았다. 

  코딩이라는 것도 결국 언어다. 언어라는 것은 사랑할 때 즐겨 쓸 때 잘하게 된다. 코딩은 일이기도 하다. '더 열심히'하는 것보다 '더 현명하게'일할 필요가 있다. 내가 잘할 거라는 착각도 버리고 가져다 쓸 수 있으면 가져다 쓰고 살 수 있으면 사는 것도 방법이다. 비용 대비 실적을 얘기할 수 있는 건 결국 일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순간순간 새로운 기술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어쩌면 언어를 사랑하는 감정이 더 중요할지도.

  책은 프로그래머 자체의 삶에 대한 얘기며 더 나아가 조직에서의 프로그래머가 할 일을 얘기하기도 한다. 챕터마다 다른 얘기가 있다. 위로받고 싶다거나 멘털을 잡고 쉽다면 뒷 부부만 읽어도 될 듯하다. 시중에 나온 굉장히 빡빡한 문장으로 가득 찬 책들과 달리 여유가 있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책이다. 위트 있는 선배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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