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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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힐링과 자기 위안은 중요시 되고 있다. 직장에서의 승승장구보다 워라벨을 요구하고 있으며 단체 생활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농경 중심이었던 동양의 공동체주의는 어느새 개인주의로 변해왔으며 이것은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이 되었다.


  고도화되고 빠른 판단력이 필요한 현시점에 인간을 대신해서 빅데이터니 AI니 하는 기술들이 인간을 대체하고 있다. <사이코패스 뇌과학자>를 저술한 제임스 팰런은 책에서 사이코패스로 진화는 인류의 당연한 방향이라고 얘기했다. 이런 빠른 사회에서는 감정에 휘둘리는 종이 약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작품은 나르시시스트 중에서 병적인 자기애성을 가진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잘못된 사회 환경으로 인해 생겨난 병적인 나르시시즘을 가진 자가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얘기하고 있다. 행복에 대한 잘못된 기준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만들어내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여기저기서 많은 인물을 통해서 이야기를 흩뿌리고 있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유나>다. 그리고 모든 사건을 실마리를 간직한 인물은 유나의 딸 <지유>다.  나머지 인물들은 묘하게 엮혀서 있지만 결국 <유나>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이다. <유나>는 어릴 때 엄청나게 엄격한 할머니의 교육과 할아버지의 이중적인 행동으로 통해서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를 가진 사람이 된다.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자들은 모두 적이 된다.


  행복은 완벽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을 하나씩 더해 총량 중에 행복의 비중을 높여 행복의 가능성을 높이려고 한다. 작품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행복은 뺄셈이야,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라는 말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던 <유나>의 삶의 가치관이자 세상을 향한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들어냄의 마지막은 결국 '무(無)'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나>는 알아챌 수 없었던 것일까 외면했던 것일까.


  작품은 시작하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스산한 묘사보다 자신의 딸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는 엄마에 모습에서 엄마라는 사람의 잔인함이 느껴졌기도 했지만 부모라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대할 때의 일반적인 모습과도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이 없는 듯한 <지유>의 반응이 도입부를 더 소름 돋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지유>는 행복의 구심점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사건의 모든 불행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엄마의 바람에 완벽하리만큼 반응하면서도 내면의 반항도 가지고 있었다. 작가는 <요망한 생쥐>라는 것으로 이 반항 심리를 발현시키고 있었다.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은 결말을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스토리였지만,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어서 그런지 몰입감이 상당했다.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사건의 전개는 도중에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깊지 않은 늪과 그 건너의 계곡의 절벽이 있다는 설정은 삶의 질곡을 건너 결국 최후를 맞이하는 <유나>의 삶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늪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 유독 시끄럽게 굴었던 되강오리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더는 울지 않게 되었다.


  절대적인 행복지수가 있다면 세상이 가진 행복의 총량은 일정할지도 모른다. 내가 욕심을 부린 만큼 다른 사람의 행복을 뺏어야 한다. <재인>에서 뺏겼다고 생각한 행복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유나>는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앗아갔다. 하지만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개인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로의 행복을 뺏어오는 것이 아닌 세상의 행복의 양을 늘려야 한다. 행복은 뺄셈이 아니라 덧셈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생각을 행복한 마음으로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덧셈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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