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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 20년간 우울증과 동행해온 사람의 치유 여정이 담긴 책
고요 지음 / 인디고(글담)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표지의 문구를 보고 흔하디 흔한 힐링 에세이인지 알았다. 힐링 에세이 중에 달콤한 말로 이겨내자, 이겨내자 끊임없이 반복하기만 하고 사실상 마음에 와닿지 않는 책이 몇권 있다. 그러한 책들은 대부분 우울증에 관련 되어 있기도 한데, 그런걸 보면 현대인에게 우울증은 어쩌면 필수적으로 장착된 질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키고 다시 삶에 기력을 되찾아 주는 힐링 에세이를 찾기는 참 어렵다. 책에 적힌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내용 뿐이니까. 결국 지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주말 오후에 사람 없는 카페에 홀로 앉아 별 기대없이 책을 펼쳤다. 아, 카페에 혼자 있었기에 망정이지 사람이 가득 차있는 인기 카페였다면 큰일날 뻔 했다. 책을 읽는 시간 대부분을 눈물로 보냈다. 이건 도저히 눈물을 내보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술주정과 욕설이 일상인 아버지와, 그를 대신 해 소처럼 일하는 어머니. 어렸을 적부터 저자는 고독에 휩쌓였다. 하교 후 아무도 없는 집은 당연했고, 누군가 따뜻하게 자신을 맞이 해 주는 것은 경험해 보지 못했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우울증의 기원은 외로움이 아닐까. 외동인 집안과, 부모님의 맞벌이. 현대에 가장 흔한 가족구성은 고독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그 외로움 속에서 저자는 자라왔다. 9살 때 성폭행을 당했어도,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존재가 없었다. 주위에는 그 사실을 이야기 한다면 무너질 것들 천지였다.
그래서 저자는 스스로를 깎아내리기도 했다. 모든 책임과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걸까? 늦은 밤 책상에 앉아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할 이유를 열심히 적어내리고, 스케치북을 죽고 싶다는 말로 채우면서 조금씩 자신을 버려갔다. 그리고 그 동안 우울은 점점 저자를 지배해 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가진 우울에 대해서 어머니는 사춘기라고, 다들 다 그렇다는 말로 위로했다. 아, 다들 아프지만 숨기고 잘 살아가고 있구나. 그 생각이 저자의 자존감을 더 갉아 먹었다. 꼭 자신이 나약하디 나약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버티고 버텨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중 3학년 말, 엄마를 설득해 함께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저자는 그 때 우울증 진단을 판정받았다. 엄마는 우울증을 '나쁜 것'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낫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졸리기만 할뿐. 약만 먹는게 무슨 치료인가 싶어 병원을 서너 달 다니다가 그만뒀다. 일상생활을 잘 하고 있으니 우울증도 나은줄 알았다.
그리고 교사가 된 첫해에 우울증이 재발했다. 병원을 다니다가 약을 먹고, 좀 나아졌다 싶으면 제 마음대로 약을 끊었다. 그 과정이 반복 될 수록 우울증은 낫기는 커녕 점점 심해져만 갔다. 주변 사람들에게 토로해봐도 다들 '다들 그래, 다들 힘들어, 넌 직업도 좋으면서 배부른 소리 하네.' 하는 등의 대답만 해줄 뿐이었다.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정신과 의사인 P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즈음 자신 의지대로 한 첫 선택을 했다. 다니던 학교를 사직하고, 긴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오래 앓았던 나 자신에게 이제는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으니까.
긴 여행길의 시작은 방콕이었다. 고맙게도 '다들 그렇게 힘들어' 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친구인 M이 첫 시작을 같이 해 주었다. 바빠도 스케줄을 조정하면서까지 이 주 정도의 시간을 만들어 저자의 여행길에 동행했다.
마냥 즐거울지 알았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을 만들 수 있겠지,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방콕으로 향했다. 일이 일어난 것은 닷새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이었다.
라오스 팍세에서 루앙프라방까지 가기 위해 저자와 M은 이층 슬리핑 버스를 탔다. 낡은 매트위에서 누워서 가는 버스. 스무 시간 정도를 잘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정말 행복한 추억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스는 전복되었고, 그 사고로 인해 친구 M이 죽었다.
저자는 긴 시간동안 한국을 떠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여행길은 이 주만에 끝났다. 저자는 팔에 큰 부상을 입고 한국으로 돌아와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반복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말을 잃고 정신병동에 있어도 봤고, 퇴원 선고를 받은 이후에 다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두려움에 몇번이고 자살시도를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저자에게 있어 병원은 보호구역이었다. 아프다고 말하면 아픈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장소, 버스 전복 사고와 친구의 죽음도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
글을 읽다가 인터넷 검색창에 '라오스 버스 전복사고'를 검색해 봤다. 그리고 2015년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기사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라오스 버스 전복 사고가 발생해 관광객 1명이 숨졌다.
관광객 1명이 숨졌다.
전혀 모르는 타인이라면 기사를 보고 그저 안타깝네 하고 스쳐 지나갔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제는 잊을 수도 없어 품고 살아가야 하는 그런 커다란 상처를 만들었을 단 한줄의 문장.
아마 나는 절대 저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눈물이 난다.
사고 이후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도 일이었다. 타기만 하면 구역질이 나고 몸이 덜덜 떨린다. 하지만 저자는 살아간다.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도 했고, 그 길 위에서 저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또한 필요없는 것을 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제는 담담하게 M의 죽음을 이야기 하게 되었나. 담담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고, 우울증 이야기를 하며 얼마나 자신이 아픈지 아파왔는지 그럼에도 견뎌내고 살아가는지.
잊혀지지 않을 상처다. 그럼에도 그 상처를 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이제 그 상처를 짊어질 용기와 힘이 생겼다는 것일까. 책을 덮으면서 앞의로 저자의 삶에 있을 행복의 크기가 겪어온 상처를 흘러보내는 추억이 될 만큼 커다랗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