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어린애처럼 아무 분별도 없이 그저 빈둥거리면서 하루를보내는 것, 인형이나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부질없이 옷을 벗겼다 입혔다 하는가 하면, 엄마가 과자를 넣고 잠가둔 서랍 근처를 자못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것, 그러다가 갈망하던 물건을 손아귀에 넣으면 볼이 뿌듯하게 그것을 입에쑤셔넣고 먹으면서 ‘더 먹을래!‘ 하고 졸라대는 것, 이런 생활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행복한 생활이라는 것이지. - P23
그리고 그대의 영혼이 무한한 신의 거울인 것처럼, 종이를 그대 영혼의 거울로 삼을 수 없을까?‘ 나의 벗이여, 그러나 나는 그 생각에 억눌려서 쓰러져버린다. 이런 현상의 장엄한 힘에 압도당하고 마는 것이다. - P15
이 시대에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절망감을 떨쳐 내기가어렵다. 말이 소통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이 시대는 좁은출구를 겨우 찾아갈 수 있을 터인데, 말이 적대하는 전투에 동원된 시대에 나의 말은 무력하게 들리지만, 무의미하지는 않기를나는 바란다. - P110
여기저기서 또래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 오래 누워서 앓던 사람들은 천천히 죽고, 보약 먹고 골프 치던 사람들은 갑자기죽는다. 남의 집에 저녁 마실 온 듯이 문상 왔던 사람들이 몇 달후에 영정 속에 들어가서 절을 받고 있다.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 - P35
나는 내가 사는 마을의 길 건너, 일산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쪼인다. 햇볕을 쪼일 때, 나와 해는 직접 마주 대해서대등한 자연물自然物이 된다. - P43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 P50
와인 잔을 석양에 가져다 대자 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석양을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름답다는 수식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그런 분위기였다. - P157
나 또한 나중에 죽고 나면 다른 이가 이집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그에 대한 답은 아무도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은그렇다. 잠시 자신의 생을 사는 동안 빌려 쓰는 공간이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그 공간에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사람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그 집의 역사가 된다. -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