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면, 한동안 나를 방치했던 것 같아요. 언제부턴가 통제가 불가능했죠.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이러다가 영영 나로 되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 내가 싫지만 내가 좋거든요. 천사가 의자가 된 뒤로 두려움은 증폭됐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이러다가 이 세상이 엉망진창 되면 어쩌지. 이 세상을 증오하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거든요. (p.42)

우울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행복했던 기억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삶은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는다고 믿는 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기억 한두 개쯤 가슴에 지닌 채 그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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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엔 이런 면 음식을 즐겨 먹었다. 세 끼 중 한 끼를 꼭 면으로 해결할 정도였다. 면은 여전히 좋아하지만 이제는 먹고 나서가 문제다. 좀처럼 소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부룩한 배를 어루만지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금 몸을 일으키는 짓을 얼마나 반복해야 하는지.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p.8)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다수라는 게 위로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내 딸이 그런 부류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매일 충격적이고 놀랍다. 그래서 매번 똑같은 강도의 실망감과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불필요한 공부를 내가 너무 많이 시킨 걸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p.32)

이 애들은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책에나 나올법한 근사하고 멋진 어떤 거라고 믿는 걸까. 몇 사람이 힘을 합치면 번쩍 들어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거라고 여기는 걸까. (p.51)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p.91)

언제 갑자기 손님이 오실지 모르잖습니까.
장례식장 관리자에게 들은 대답은 그게 전부다. 죽어서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삶. 그런 건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어디서나 흔하게 목격하는 일 중에 하나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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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감이 들 때마다 진경은 이아가 생각났다. 그때 진경은 맨션의 다른 사람들처럼 덮어놓고 이아 엄마를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합리적인 의문들마저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p.161)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아니요. 위로받아도 됩니다. 위로와 배려를 받게 되면 받는 거고 받았더라도 따질 게 있으면 따지는 거고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있다면 받는 게 맞아요.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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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씨, 재화씨는 왜 장르를 써? 얼른 재등단해. 쉽잖아. 적절한 주제에 대해 모나지 않게 쓰면 돼."
그때 재화는 상처를 받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었는데, 그건 앞으로도 부적절한 주제에 대해 모나게 쓰리라는 날카로운 예감 같은 것이었다. (p.19)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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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말 이상해서 내가 자꾸 말하는데, 오늘따라 내 기억력 상태가 아주 좋아. 건강한 젊은이의 심장처럼 펄떡펄떡 뛰는 내 머리통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무슨 소린지 다는 이해가 안가. 이해한다 한들 기억 못하는 날도 있고 오늘처럼 기억은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날도 있는 거겠지 뭐. 나는 그냥, 태어난 나와 죽을 나, 맞닿은 두 지점 사이에 접혀 들어가 삭제된 시간 속에 있는 거야. 과거의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미래에 대해 무슨 약속을 했건 그건 잘 모르고 한 개소리야.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시간을 어떻게 알고 그랬겠어. 모르니까 무서웠던 거지. 그 알지도 못하는 것 때문에 도대체 난 인생을 얼마나 허비한 거냐. (p.46,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

동창들은 이제 그에게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졌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며 그 모든 것이 다 자기들 탓이라고 징징거렸다. 그들은 선생님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의미로 말한 것 같았는데, 난 내 인생이 망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인생도 망가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이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쉽게 망쳐지도록 생겨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줘봐야 이해하지 못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p.84, <어제의 일들>)

오랫동안 지옥을 헤매던 나에게 의문이 생겼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았더라면 이런 것이 과연 지옥이 되었을까? 생전에 경험했던 행복을 다시 경험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에는 다른 이름이 붙을 것이다. 내가 삶인 줄 알고 살았던 그것이 지옥이었고, 지금은 사라지지 않는 그 시간들을 나는 그저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p.116, <지옥의 형태>)

"(...) 나도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게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닐 거예요. 미안해요." (p.190, <엔터 샌드맨>)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두지마. 그 시간을 통과해서 난 이만큼 와 있는 거야. 그만큼 나는 변했고 모든 것의 의미는 달라졌어. (...)" (p.222, <꾸꾸루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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