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수레바퀴 -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강대은 옮김 / 황금부엉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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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교수가 남긴 유일한 자서전인 <생의 수레바퀴>를 보면서 뭐랄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책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고, 1부와 2부격에 해당되는 부분에서는 중간에 좀 울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3부를 읽다가 좀... 우주로 가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요? 저자가 죽음에 대해서 지켜보고 연구하다보니 죽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암사체험)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뭐 이때까지는 좋았어요. '음. 그렇게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넘어가니까 매우 사이비틱한 모 부부가 나오면서, 그 부부중의 남자쪽이  영혼을 물질화를 하는 능력이 있고 그의 힘을 빌려서그 영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들이 던지는 메세지는 매우 상징적이고, 저자 주관에는 그들이라는 존재가 저자의 여러가지 생각들을 사고의 폭을 넓혀주거나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만, 소인이 보기에는 그냥 사이비;; 로 보였습니다. OTL
유명한 모 학자의 기계로 유체 이탈을 경험해보고 그 후에는 스스로도 몇번이나 그걸 경험해보고... 그리고 우주에서 그야말로 안드로메다로 간 느낌으로 그 사이비틱한 부부가 물질화를 해서 보여줬던 두 영들과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를 그리워했는데 상반신만 나타나서 대화를 했다던가;;; 저의 능력에는 수용 불가능 하더군요. 좀 뭐랄까 허탈한 느낌의 웃음이 나오는 감각이라고 해야하나요? 뭐 그랬어요.
그래서 3부를 보면서 매우 실망했었습니다. 그게 4부로 넘어가면서 좀 위로 올라더군요. 좋은쪽 방향으로요. 4부에서는 그런 영적인 영역(?)에서 좀 넘어가서 다시 현실세계로 내려온 감각이었습니다.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서 센타를 설립할려고 한다고 인터뷰를 했더니 온 동네 사람들에게 협박당했지만, 그녀는 그녀의 신념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부분이나, 자신의 병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좋았습니다.
전반부(1부, 2부)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2차 대전 이후에 자원 봉사를 다니면서 인간의 참혹성에 대해서 느끼는 부분, 그리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분노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의식 개선을 위해서 세미나를 열고 환자 개개인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들, 병에 대해서 긍정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부분이 가장 좋았습니다.
뭐 사실 저는 종교인이 아니고, 주위에 계신 개신교 신자분들의 귀신에 대한 이야기(영적존재에 대한 이야기. 귀신도 영적 존재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책에서는 귀신이라는 말은 없고 영적 존재라고만 언급하더군요.)에 황당해 하는 것이 저인지라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특히 영을 물질화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좀... 암사체험까지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요. 요정의 존재라던가. ~_~;; 매우 울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아 선생님;;;
뭐 좋은 건 좋은걸로 남기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그냥 숙제로 남기거나 뭐 저런 경험도 있을 수도 있다(? 이것 조차 어렵군요.)라고 생각은 못하겠고... 그냥 뭐 저쪽에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의 느낌이 어떤지 넷서핑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사후생>에서도 이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먼가 3부를 읽으면서 <인생수업>과 <상실수업>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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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김소향 옮김 / 이레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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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가 죽어서 느끼는 상실의 분노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해당이 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나 이 파트는 슬픔도 포함되는 파트라고 생각이 들었고, 여러가지로 다른 의미의 상실도 그렇고... 저의 경우에는 이 책이 정말 큰 지지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특정 종교의 종교인(개신교도)으로서 느끼는 그 교만함(선택되었다는 느낌이나 진리라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고로 개신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기에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종교인이나 불교인이나 모두에게. 진정한 의미의 진리(?)라면 이런 전달능력을 갖춘 책이 아닐까 싶어요. 뭐 비아냥 거리는 건 그만해야지요. 아휴. 그래도 말하고나니 속시원. OTL

"다른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말라. 심지어 당신 자신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분노는 강도나 정도는 어느정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의 기준으로(유교적 가치관) 잣대를 잰다면, 매우 배척받는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그 말은 그야말로  명언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이라니. 스스로가 분노하면서도 주입된 가치관에 의해서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 패턴을 솔직히 멈추기가 참 힘들어요. 그걸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두요.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 조차 죄책감을 느끼도록 교육받았으니까요.
분노하는 자신을 용서하지 혹은 용납하지 못하는 기분이란...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살의가 치민다는 건 정말 치명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노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분노를 바라보고 분노를 알아주고 스스로를 도닥이고...  결론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를 보살피라는 말인데, 이 사회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제도권에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그걸 스스로 습득하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도권이라는건 교육과 가정 모두 포함) 이 나라에서 살면서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습니다. 퍽이나 사랑하겠네요. 그렇다고해도 표현하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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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이진 옮김 / 이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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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대표적 저작으로 많은 분들에게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이었다. 읽으면서 이 책을 좀더 읽찍 일었다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장 컸었다. 시아버지가 아프실때 그분의 말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서 많이 당황했었고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그분이 어떤 감정들을 느끼셨고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들을 하셨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의 단계는 5단계로 분류되며, 제 1단계는 부정과 고립, 제 2단계는 분노, 제 3단계는 협상, 제 4단계는 우울, 제 5단계는 수용이라고 이 책에는 나와있었다. 각 단계마다 자신의 경험과 시한부 환자들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분들이 죽음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구성이었음. 아래의 인용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한 아저씨의 이야기.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부인에 대한 분노에 대한 그들의 답변이다.

우리는 그에게, 그의복잡한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그에게 다음번에 만날 때 부인에 대해 느끼는 분노에 대해 애기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면 창밖으로 뛰어내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고통은 아마도 모든 분노와 좌절감을 안으로 삼켜서 생긴 걸 거예요. 망설이지 말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세요. 그러면 아마 고통이 사라질 거예요."라고 대답해주었다.

시아버지의 경우에는 병의 진행이 빨랐기 때문에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올라오셨던거 같은데, 내가 느끼기에는 우울의 증상이 가장 큰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여러 책들을 보면 환자들에게 우울증 약을 투여해서 좋은 결과들을 많이 봤었는데 이 나라의 병원 시스템에서는 그런 처방이 있는지 없는지가 궁금해졌다. 물론 그분의 상태때문에 그런 약들을 처방하지 않았던게 아닌가 싶지만, 역시 질병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나의 결론.
'그렇게 급격하게 몸에 커져간다면, 3달에 한번이 아니라 한달에 한번이라도 검사를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혹시 그 3달이라는 것은 의료보험에서 기준한 기준에 의거해서 3달에 한번씩 검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엘리자베스 교수님은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가장 큰 배려가 필요하다고 했었고, 그들은 대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좀더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것들을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가장 컸었다. 책에서 나오는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환자 자신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가족들이 이를 부정하는 이야기였다. 나 자신도 그러했기에.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좋아지실 거라는 말을 반복했었다.
<죽음과 죽어감>은 환자 자신과 그리고 주의사람들에게 그리고 의료계통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상실수업>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가족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책.
그래도 이 나라는 제사라는 것이 있어서 가족들이 먼저 보낸 사람들을 함께 기억하는 공간이 존재해서 매우 다행이라고 느꼈다. 나는 사실 제사에 참석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번 추석을 보내면서 이런것들을 느끼게 되었다. 먼저 간 가족에 대해서 가족간에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아니고 그런것들이 매우 어려운데 제사라는 상징화된 공간에서 그 사람을 기억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다른 가족들을 보는것이 서로간에 큰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것들을 공론화해서 고통을 나누고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물론 제사가 그런 의미로 상징화 되어서 좋다고 느끼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형평성 있게 일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별에 따라서 누구는 어디를 가도 주체가 되고 누구는 어디를 가던 주체가 아니라면 그건 얼마나 가혹한 처사인가. 물론 그런 것들은 그냥 상징으로 남은 부분이라고 하겠지만, 민감한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기도하고. -_-
그리고 개신교의 시스템의 장점에 대해서 매우 잘 알게되었고, 목사라는 존재가 얼마나 환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지도... 여튼 그래서 여러가지를 얻게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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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국 - 결혼이 지배하는 사회 여자들의 성과 사랑
노부타 사요코 외 지음, 정선철 옮김 / 이매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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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에노 치즈코라는 인지도 보다는 순전히 출판사와 제목때문에 보게된 책. 이매진의 책은 이전에 <오빠는 필요없다>를 봤었는데, 그때 이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책들도 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표지의 힘도 있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책을 읽은것 자체는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지만, 저자들의 태도는 너무 불편해서 그 표지만 봐도 짜증이 밀려나왔다.
그런 느낌이 들게했던 저자는 노부터 사요코씨 보다는 우에노 치즈코씨. 이 양반의 문제는 내려다보는 느낌이 지나치다 못해서 넘처 흘러서 매우 불쾌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은 그 사회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이고 당사자들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그런것들은 아에 배제한 느낌이었다. 물론 아에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태도가... 뭘로 비교하는 것이 적당할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역시 교만한 엘리트. 그녀의 문체에서 내내 내가 받은 느낌(메시지)은(는)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너희들은 우민이다. 어리석은 보통(우민)들' 등등 이었다. 이 감각을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1장 서브프라임 매리지의 시대'의 머리글을 좀 지나서 부터였다. 그 다음도 계속 그러긴 했지만, 초장부터 그래서 가장 처음이 강렬했다면 강렬했던거 같다.

딸을 살해하고 냉장고에 시체를 유기시킨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그 이후의 전개가 계속 그런 감각이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이 '이타적'이라고 못을 받는 부모들을 보면 짜증이 쏟구치지만, 그래도 저런 문체로 저런식으로 모든것을 쓰레기 취급(?)하는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의 흐름을 분석하기에 앞서서 당신들이 해야하는 일은 대안이나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2부에서는 그녀(우민)들의 명품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우에노씨의 시각은 그냥 그녀의 도덕주의에 입각해서 비난하는 시각 뿐 이었다. 하나 더 더하자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명품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도 했다. '당신은 미적 감각이라는 것이 없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서는 노부타씨의 방어도 재미있었고 자신은 그 우민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계속 해명하던 부분을 보고 있자니 실소가 나와서... -_-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도덕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타인을 비난하자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신이 누리는 것들에 대해서도 윗 세대에서는 분명 '사치' 혹은 '허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적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 부분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의 생각에는 아에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뭐...
비싸서 사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그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반해서 사는 사람도 분명히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었고 그리고 그건 노부타씨도 매한가지. OTL 그걸 그냥 튼튼해서 산다는 말을 하다니. 이건 충격이었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뭘 살때는 그 이유가 분명할텐데. 정말 그런 이유로 산다는 말인가. 이유는 분명 그것 말고도 더 있지만, 어쩐지 본인은 그런 이유를 모르는 것 같고 그걸 이유로 드는 것이 더 당연하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 같았다. 그건 그녀 안에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도덕주의'에 입각해서 아름다워서 좋아서 사는 것은 용납 혹은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절대 틀리지 않다는 그 자신감에서 우려나온 문체. 그리고 그걸 잘(?) 살린거 같은 번역자분의 자상한 의도도. ㄱ- 아이 원츄. 번역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부분은 '종군위안부'를 사용한 그 부분에서 책을 집어던졌습니다. 헐. 저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그들이나 이걸 번역한 번역자 그리고 출판사의 편집자분도. 혹시 그녀의 그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극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해도 없어서 그건 저 뒤 넘어로 넘겼습니다. 

그렇게 까고나서 당신들이 던질 답에 대해서 매우 궁금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책의 마지막까지 넘겨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냥 처절한 해부만 있었을 뿐. 그래서 매우 허무했던 책. 책의 표지나 본문의 도비라 디자인은 매우 취향이었음. 본문의 배치도 그랬고... 참 이쁘게 만든 책인데 읽고나서 이런 기분이 들어서 씁쓸했음.
이 나라의 현실이나 일본의 현실이나 별다른 차이점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당신들이 그들에게 비난을 가하는 것은 역시 일본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구나 하는 생각. 종 차원에서 하는 우려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는 유감스러움. 당사자의 입장이나 당사자의 시각은 젼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슬픔. 물론 간간히 노부타씨가 그네들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변명(?)을 하긴 했지만, 그녀 또한 내려다보고 한심하게 여기는 시각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역활모델도 없고 대안도 없고 부모세대가 내세우는 가치관은 이중적이고 모든것들을 다 하도록 강요받는 가운데에서 올바로 서서 자기의 길을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를 그 나라의 미래를 종으로서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그런것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과연 보통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분명한것은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혹은 부모에게 괴롭힘을 받는데도 그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나올 만한 힘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대안이 없기에 그 집에서 그 자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걸 한심하다고 여기다니. 당신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보슈. 당신이 말하는 그대로 퍽이나 잘 살겠소. 누구는 과거에 살고 싶어서 이 환경에서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알다니.

자존감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도 충격이라면 충격이었음. 그녀들이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부분이 크게 결여되어있어서 그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그런것들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내내 <셔플리>가 생각이 났음. 몇 권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공이 흘러가는 강에서 뭔가 기둥을 잡고 늘어지는 그 감각과 비슷하다면 비슷해서인가 아니면 그녀들이 말하는 그녀들이 바로 <셔플리>의 그녀들이라서 그런거 같기도 했고, 뭐 이건 <셔플리>를 다시 봐야지 알 수 있을거 같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부분까지 못올라가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그걸 알려주고 대안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당신들의 의무가 아닌지. 특히나 노부타씨. 모든 임상심리사는 아니겠지만, 저런 시각으로 내담자를 바라보는 임상 심리사가 있다는 것도 이쪽에서는 매우 충격아닌 충격이었음.
그런 모든 것들은 내려다 보면서 이야기 할 것들이 아니라 진심으로 유감인 태도로 그리고 가슴 아파하는 태도로 이야기 해도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당신들에게는 참 쉬워서. 이쪽도 매우 유감. 하아.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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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병동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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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말 오랜만에 읽은 소설책이었습니다. 좀 울었습니다. 책의 앞부분은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현재가 만들어진 과거의 한 단편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른 세사람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서는 '단편들이 모인 책?'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본 내용으로 가면서 그 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끝까지 읽고나서 다시 앞부분의 세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까 눈물이 나오더군요. 여러가지 의미로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던 말은 병원에서는 우리들을 환자라는 대상으로만 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병원 밖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었고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데 병원에 오면 그 '과거'는 사라진다는 그런 부분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은 여러 책에서도 많이 봤었는데요. 호세이 선생님의 잔잔한 묘사에 그부분이 더 크게 왔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인간'으로 대접받기를 희망하죠. 그게 어떤 상황이던 자기가 어떤 존재(사회에서 규정하는(가 되었던 그건 부분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부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나의 이력이 더 생겼을 따름. 그냥 좀 아픈 사람일 뿐이고, 좀 많이 아팠을 따름이고... 그런것들을 인정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편협한 시각은 극복하기가 참 어려워요. 편견이라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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