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된 희망
폴리 토인비 지음, 이창신 옮김 / 개마고원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고른것은 매우 표지의 힘도 크고(민진기 디자인)... 제목으로 선택된 단어 '거세'에 대한 그 선택이 적절했는가도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음. 결론은 '거세된 희망'이라고 제목을 선택한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되었음. 책은 영국에서 2004년에 출판된 책인데 2009년인 지금 읽는데도 매우 고통스러웠음. 게다가 원출판사에서 제공한 영국 통계에다가 한국 출판사에서 한국의 상황을 더해서 통계와 분석을 제공하는 페이지가 특히 괴로웠다는... 영국 상황에 여기 이 나라의 상황이 더해지면 O>-< 후후후.
이 책은 3년간(아마도) 면밀하게 기획된 책으로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그 나이때의 이혼한 여자의 설정, 몸으로만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 할 수 없어서 정부기관에 서민 대출을 해야하 하는 상황으로 설정하고 그 곳에서 살면서 하위층에서 하는 직업으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가와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담은 이야기다. 
그녀가 3년간 그곳에서 살면서 경험한 직종은 국민의로보험서비스에서 외주 파견직 일(잡무), 급식 업체에서의 일(여기도 외주 파견업체), 빵포장 공장에서 했던 일(직접 고용), 텔레마케팅 서비스(청소용역업체의 홍보용, 외주 파견직), 요양보조사(직접 고용) 등등의 일을 했었고, 이 일들은 모두 하나같이~ "어쩌면 그럴수가!"라고 외칠수 있는 수준의 노동의 강도에 비해서 매우 적은 수준(최저인금 이하)의 봉급으로 일해야 하는 일 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구직 시스템이 매우 신기(?)해서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돈이 드는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설명해주는데 이 부분은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 였음. -_=;;
해당 업체에는 정직원, 파견업체에서 파견된 파견직 그리고 외주 업체에서 고용된 여러가지 직원들(계약직 등등)로 구성되어 있었고 해당 업종에 오래 종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이직률이 높았다. 해당 업종에서 오래 종사하는 사람들은 적은 봉급이지만, 긍지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회사는 이를 이용하여 그들을 더 가혹하게 부려먹는 존재 일 뿐. 모든 상승된 이익의 2/3는 인금 감봉에서 온다는 사실. 봵.

최근 느끼는 건데 살면서 정말 특정 부류의 사람들 하고만 교류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도 그런것들을 매우 통감했음. 고된 노동과 저인금의 공간은 외국인 노동자 혹은 아니면 경제적 위기에 몰린 여자들이 대부분 이라는 2004년의 영국의 모습에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공간을 바라보는 거 같은 착각은 무엇 때문인지. 대처 아줌마의 막장 정치의 행적을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고... 공기업 민영화는 여기에서도 이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책의 후반에서는 일하는 노동의 강도와 그 중요성에 비해서 매우 적은 가치로 평가절하 되는 직업군에 대해서 여기서도 지적하고 있었다. 모 책에서 읽은 '가정주부화'가 여기에서도 ~_~ 책의 마지막에서는 지난 몇십년간 받는 봉급으로 치면 하위권에 속한 사람들의 봉급은 거이 오르지 않았는데, 상위권에 있는 사람들의 봉급이 격하게 상승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었고, 그 상위권에 있는 인간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물가 상승을 고려해서 최저인금제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라던가 그외 기가 차는 기타등등의 이야기들이 있다. 허헐.
그녀가 내세우는 제안은 정말 기똥찬 제안들이 가득했지만, 그 양반들이 그런 정책들을 취할리가 만무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파트에서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 오너를 만나서 하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더더욱 그런 생각들이 떠올라서 말이다. 미국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이야기였던 모 책에서 지적했던, 이제 '계급'은 사라졌고 '신분상승'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라는 그 이야기는 많은 환상을 불러오고 그리고 지금의 이 착취 시스템에 대해서 정당화를 하는 윗 양반들의 체제를 위지하기 위한, 혹은 있는 양반들의 찜찜함을 해소하기 위한 한 방법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그런것들이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된 반공(?)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면 모든것이 끝이니까 말이다.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사회는 그래서 아이 원츄. 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르모트의 시간 4 - 완결
토우메 케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읽은 이 분의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예전에 <양의 노래>를 중간까지 읽다가 어두워서 포기했었거든요.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양의 노래도 보고 싶었는데 찾아 보지도 않았구요. 한국에 이 분의 책이 소개된건 <무한의 주인>이 한참 인기 몰이중 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대학에서 같은 동아리의 선후배 사이로 사람들에게 소개되면서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했었습니다. 초기 단편집에서 읽었던 설정과 비슷한 설정으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학교에서 생활하는 네명의 아이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평화로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각자가 몸이 조금씩 불편한 아이었습니다. 그러던중 한 아이가 전학을 오게됩니다. 네명의 아이중 한 아이가 그녀를 예전에 봤던걸 기억해냅니다. 그는 전학온 그녀에게 접근하였는데 그녀에게 뜻밖의 충격적인 여러가지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이게 진실이라면 부정하고 싶을 정도의 진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니는 학교는 모 제약회사의 생체실험 대상들이 있는 학교이며, 그들은 모두 기억을 조정당하고 있다는 것 등등 이었습니다. 그는 얼떨결에 그녀의 탈출을 돕게되었고, 그녀는 탈출했지만, 다시 잡혀서 기억을 봉인당하고 다시 학교로 들어옵니다. 그녀가 등장했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했는데도 별 반응이 없는 학교 아이들을 보고 그들은 그 학교의 아이들의 괴리를 느끼고 어디서부터 진실인지 모여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모르모트의 시간>의 결론은 그 학교는 결국 사라지게 되고 그곳에 있는 모든 아이들은 안전하지 않은(?) 밖의 생활을 하게됩니다. 생체실험에 대한 인식과 생체실험을 당하는 대상에 대해서 뭐 지금의 이 나라와 별반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생체실험(이런 단어를 사용하면 화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건 분명히 생체실험이에요)을 하는 학생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돈으로 생체실험을 할 사람들을 사는 행위. 책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은 아이들의 호적을 그 부모로부터 사서 생체실험을 하는 행위와 뭐가 다른건지... 뭐 그런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는 해체되었지만, 과거에 대한 반성도 약했고 그들이 느끼는 사회에 대한 받은 느낌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현실의 일부였습니다. <양의 노래>때도 느꼈지만, 언제나 보고 싶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느끼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도 좋아요. 그림이 좋은건지, 이 분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좋은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좋아하는 선생님입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20대에서 30대가 되었으니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합니다. 
 


'가치'라는건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판단하는거라고 생각해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중에서 사회를 구성을 조정하는 사람들 이겠지요. '실험의 대상'으로 판단하는 것들도 결국 그들이고, 그리고 어느정도의 보통 사람(혹은 일반인)이 암묵적으로 묵인하에 그런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판단을 내리던간에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내리는 것이죠. 동물에 대한 생체실험도,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도... 그 동물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도 우리 인간, 그리고 생체실험에 필요한 인간을 돈으로 사는 것도 우리 인간.
그래서 어떤 동물의 경우에는 인간의 친구기 때문에 먹는 것은 금지되었고, 인간으로 하지 못할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인간. 애초에 우리들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지 의문이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해오고 있고 그게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어디서부터 어긋나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어긋남을 계속 어긋나게 이어지기 위해서 저도 열심히 협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문득 세토나의 단편이 생각났어요. 시대는 모르겠지만, 소도 인간과 같은 형상을 띄게 되었고 다만 그 차이가 있다면 목에 종이 있느냐 없느냐 이었어요. 말도 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도 있었고, 감정도 있었고... 인간과 같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다만 그들의 목에는 종이 달려있을뿐. 한 소년이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그와 같은 연배의 소를 친구로 지낼 수 있게 부탁해서 그 소와 소년은 친구로 지내게 됩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소들이 도살당해서 그들의 밥상에 올라가도 그 소는 그 소년의 도움으로 살아있습니다.
어느날 그 마을(그 나라)에서 엄청난 전염병이 돌게되었고, 그 병은 소의 몸에 있는 장기를 먹어야 고칠 수 있게 됩니다. 소년은 친구 소를 먹기를 거부하고 친구 소를 살리기 위해서 먼곳으로 보내자고 가족들에게 부탁합니다. 소년의 가족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 소를 보냅니다. 소년은 그 병으로 죽어가는데도요. 마지막은 소년은 소의 내장 요리를 먹고 살아납니다. 그치만 그 내장에서 어릴적에 소가 적었던 일기장의 자물쇄의 열쇄를 발견합니다.
눈 앞에 있는 현실에 대해서 그 소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 거기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소년이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모두의 머리속에서 남아 있을 따름이죠. 그는 그냥 그렇게 그런것들을 반복하면서 사는 어른이 되었을지, 아니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 아니면 그걸 묻어두고 살다가 어느 시점에 폭발하여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존재가 되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견딜 수 없이 슬픈 이야기라는 것.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존재라는 것.
그 이야기를 전개의 클라이막스를 읽으면서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냥 그의 가족들이 그 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의 부정의 깊이는 이런건가봅니다. 그냥 그렇게 그대로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오늘 저녁의 반찬은 돼지고기. 돈을 주고 사서 먹습니다. 그래도 닭고기(고기라고 명명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존재라고 인식하면 죄책감이 더 커져요. '고기'라고 명명해야지 그 죄책감이 덜해지거든요.) 보다는 마음의 부담이 적습니다. 모든 부위를 먹으면서 이 존재가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 상상하는건 매우 힘듭니다. 그래도 고기를 먹는 거죠. 고기. 고기.... 고기를 먹으면서 생을 이어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Dawn 4 - 차가운 손
우에다 신슈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페스트'에 대해서 공포가 있는 소년 타카시는 어느날 두번 쥐에게 물립니다. 두번째 물린 쥐는 그냥 쥐가 아니라 이상한 쥐였습니다. 그 쥐에게 '나이트시프트'에 감염되고 맙니다. 설정에서 묘한 괴리가 느껴지지만, 아직 연재가 끝난것도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나올거 같아서 그냥 별 생각 없이 읽었습니다. 그날 타카시는 정체불명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그 병균에서 완전히 감염되지도 않고 그렇다고해서 진행이 멈춘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병원의 의사에게 '쥐에게 감염되어서 죽은 존재'인 나이트시프트들을 죽이도록 강요(협박)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는 살인 아니 살쥐(;;)를 위해서 뛰어다니고 낮에는 학교에서 졸고 있는 소년이 되어버립니다. 
타카시는 같은 반의 쿄코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학교에서 나이트시프트가 나타났고, 그는 쿄코를 그들로부터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녀가 질문하는 모든것들에 대해서 부정해버립니다. 그녀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반가후의 그를 따라가다가 예의 그 의사선생에게 잡혀 타카시를 위한 이중보호장치가 되어버립니다. 그 후 그녀는 그의 살쥐 행위를 지켜보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키기위한(?) 행보(행동)을 계속 지켜봅니다. 그 사이에 나이트시프트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게되고, 지금까지 출간된 4권에서는 그들은 평소에는 보통 사람의 인격으로 포장된 상태의 사람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4권의 마지막에서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을 죽이고 맙니다. 그리고 4권이 끝나버려요. 우어어어 궁금하다구요. *_*;;;;
'나이트시프트'는 쥐에게 감염되어서 죽은 존재. 육체는 움직이지만, 좀비처럼 인육을 먹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욕구만 있어보지만, 그들의 행동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타카시의 손을 잡은 쿄코가 타카시의손이 차갑다고 말한데서 제목이 온거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읽다보니 죽어있는 존재로서의 상징이 더 큰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었지만, 아직 죽음에 도달하지 않아서 움직이는 존재. 그게 타카시인거죠. 

작화는 저런 거친 느낌의 펜선이 좋아서 보게되었는지 어쩐일인지 비슷한 시기에 좀 비슷한 느낌의 설정에 펜선이 인상적인 두 작가(토우메 케이의 작품)의 작품을 보게되어서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투우메 케이 선생님의 펜선이 좀더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라서 뭔가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배경도 같은 느낌의 터치이고요. <차가운 손>쪽은 같은 거친 느낌이지만, 한번에 그은 펜선(G펜이 아닌가 싶습니다)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분노나 강조의 컷에서는 펜선이 더 강하게 나타나서 거친 느낌이 드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그런 설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를 느껴서 뭐 음...하고 봤습니다. <양의 노래>쪽은 뭐 이용할 수 도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바라보고 지켜보고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으로)걱정하는 어른들이 존재하지만, <차가운 손>에서는 감염된 타카시를 이용 아니 착취하고 있는 어른들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타카시)는 카즈나 처럼 서로 좋아하는 여인이 있고, 그 여인이 그의 고통을 공감해주려고 노력하지만, 타카시의 세상에서는 부모는 먼 타국에 있는 존재이며 그의 고통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의 병을 알고 있는 의사는 그를 소모적인 존재로 의식하고 관찰하고 즐거워하는 느낌까지 받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카시와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존재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상황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상황으로 보자면 <차가운 손>의 타카시가 더 나락에서 허우적 거리는 느낌을 받았어야 하는데 그 어두움쪽은 <양의 노래>의 카즈야쪽이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저에게는 타카시보다는 카즈야쪽이 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토우메 선생님은 읽은 작품들이 주제는 항상 일관된 방향으로 있는거 같아요. <나츠메 우인장>의 선생님과 비슷하지만, 좀 다른 방향으로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의 노래 7
토우메 케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전에 읽다가 그 어둠의 끝을 알고 싶지 않아서 포기했던 <양의 노래>를 다시 읽었습니다. 엔딩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요.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카즈야는 결국 살아남았고 그리고 치즈나를 잃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는 사회적 소수자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도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타인에게 더 거부당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야에가시나 키노시타 모두 그의 병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했고 함께 정면으로 마주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치즈나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해도 자신이 우선순위에서 제일 위인)어쩔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에는 하아. 저 자신이 느끼기에는 카즈야에게 치즈나는 혈육으로서 정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지만, 그녀의 애처러움에 비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위해서 기억을 어떻게 포장하느냐를 엔딩에서 여실하게 보여줬거든요. 그녀를 받아드리는 카즈야도 그랬었고.... 
걱정되는 것은 카즈야는 기억을 잃어버렸고, 그냥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가려던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걸 알았을때는 어떤 감정을 느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양부모는 그를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고 야에가시와 키노시타는 그의 옆에서 그의 고통을 지켜보고 슬퍼하겠지요.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나감'과 '정신있음', '정상', '비정상'이 상징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카즈야의 아버지는 그 부분을 보지 못한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존재하고 그녀(치즈나)를 위해서나 아버지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좀더 뭔가 노력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을 이어가는건, 정신과 육체가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쪽만 이어갈려고 노력하다가는 결국 다른 한쪽의 한계상황이 도래하게 되면 함께 파멸하게 된다는 걸 의사인 그는 간과한건지 아니면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인건지 보이지 않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자살' 앞에서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역시나 같은 의사 미나세 역시 그런것은 범위에 넣지 않았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바램을 토해낼뿐... 결핍된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집착하고 구속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덥고나서 문득 드는 생각은 그들의 가문의 유전병이 타인에게 공포감이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여도 연구 대상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 이었습니다. 연구해서 나올 가치가 부를 창출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냥 희귀병으로서 고통받도록 방치하는게 사회나 관계자(학자)들의 일방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약회사들이 장사가 된다면 그걸 그냥 두었을까?'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수자라는건 이런 의미에서 가슴아프다는 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피해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고, 배척받고, 대안도 없고, 이어가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모든걸 개인의 불행으로 치환하게 만드는 사회구조가 가장 짜증나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저를 보고 다른 시각의 분들이 불쾌함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수자에 대한 생각'은 소수자를 바라보는 저의 시각이니까요. 그분들의 생각은 아니니까요. 뭐 저는 사회에서 저 자신이 소수자라고 느끼는 부분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불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이 가득한 집 1
시노 유키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시노 유키코씨의 작품. 작화도 취향(사바스 카페풍)이지만... 내용은 좀 많이 안습.
뭐가 행복이 가득하다는 건지. 행복이 가득한 집일지도 모르겠지요. 그치만 저는(주관적인 입장), 기본적으로 가정하고 들어가는 부분에서 행복에 대한 정의가 많이 불편했습니다. 불안으로 가득한 집으로 명명했어야 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자주인공(행복이 가득한 집의 안주인)인 그녀는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남편에 대한 애정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불안에 시달리며 그 불안을 현상화를 하는 망상을 해서 불안이 왔을때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부분에 대한 묘사가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서정적인 그림체와 기이하다면 기이하다 싶을 행동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연출된 컷도 그렇고... 마치 <우울증에 반대한다>에 나온 예술가적인 심성에 대한 서구인들의 시각처럼 느껴졌습니다. 
평화로운 일상과 달리 먼가 (망상의) 꺼리가 될 만한 것을 찾으면, 그 망상에 의존해서 망상을 확인하려고하는 그런... 게다가 그녀는 심하지는 않지만 딸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동성 자식에게 경쟁하는 부모인 것이었어요. 저는 저런 성향을 보이면 매우 불안해지거든요.  그게 보통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별로 보통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OTL
3권 정도에는 우울증의 삽화가 좀 깊이 있어보이는 증상으로 보이는 행동까지... 집을 치우지 않고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무력감이나...뭐 그런것들이 앞 권에도 보였지만;; 
뭐 저러다가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반복하다가 우주로 가던가 계속 그러고 살던가 아니면 집착이 지나쳐서 모두가 괴로워지던가(지금도 어느정도는 괴롭겠지만) 그런 엔딩이라서 그래서 읽기를 관두었습니다다. 뭐 작가는 무지(저의 입장에서는)하니까 그걸 또 아름답게(?) 풀어갈지도 모르지만... 별로 읽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본심. 아무리 그림이 분위기가 이쁘더라도. 

게다가 5월 4일 날 상담하면서 선생님이 이야기하시길... 정신분열증 엄마 아래서 큰 아이보다 우울증인 엄마 아래서 큰 자녀의 폐허가 크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고...  O<-< 봵 주위에서 두가지 사례를 다 보고 있는 관계로... 뭐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통계가 그러하다니 더 안습. 우울증은 그렇게 무서운 질병이었던가. 광인의 이미지로 투영되는 분열증 보다 말이다. 

저런 캐릭터 설정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나 주위를 기반으로 나온 거겠지. 그렇다면 작가가 그런 사람일 확률은 높아지고, 편집자도 그 문제를 모르는 사람일 확률이 높아지고(모르는 사람이겠지), 읽는 독자도 저걸 행복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저런 책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크어어억. 
이웃의 저 나라나 이 나라나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은 양산형으로 찍어내는건지... 최근 느끼는 건데 저런 설정의 만화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과 그 불안요소들을 행복의 요소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이다. 
나 자신도 양산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양산형이 아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오십보 백보로 보일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갈길은 멀고 내 나이는 30대. 앞으로 30년 더 살면 양산형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그러기를 꿈꾸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그닥 긍정적이지는 않는 거 같다.
모처 다큐에서 호주에서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높은지가 나오는 방송을 보고 참 부러워했는데... 자살을 하는 사이트를 만드는 사람을 처벌한다는 것이 자살의 예방책이라고 뉴스에서 보도하는 이 나라는 언제즈음이면 앞으로 나아갈지. ㄱ- 
모든건 지독하게도 개인의 그 가족의 책임이다. 아 짜증난다구랴. 언제까지 개인의 불행이 통할지 그게 기대될 따름이지만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고 모두가 알려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아주~ 오래가겠지. 그리고 펑. 그 펑하는 시기는 언제일지 나는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