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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한 실패 - 글쓰기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힘
클라로 지음, 이세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평점 :
《각별한 실패》_클라로_을유문화사_2025
"실패"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안내서
'실패'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쪼그라들곤 한다. 좌절, 후회, 멈춤의 감정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별한 실패》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상하게도 나를 멈춰 세운다. '각별하다'는 말은 실패를 단지 피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실패에도 결이 있고, 태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프랑스 작가이자 번역가, 출판 편집자로 활동해온 저자 클라로는 누구보다도 문학과 책에 진심인 사람이다. 그는 토머스 핀천, 살만 루슈디, 휴버트 셀비 주니어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옮기며 문학의 언어를 깊이 사유해왔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가 번역과 글쓰기, 읽기의 과정에서 맞닥뜨린 실패의 순간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통찰이 응축되어 있다.
"실패는 작가의 은밀한 희열이다.(21쪽)"라는 문장은 언뜻 아이러니하게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진실에 가까워진다. 저자는 말한다. 더 낫게 실패하고, 다르게 실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무의미하게 실패하지 않기 위해선 실패에 대해 사유하고 말해야 한다고. 실패는 단순히 멈춤이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이자 창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더 낫게 실패하기와 다르게 실패하기만으로 충분치 않다. 아무렇게나 실패하지도 않아야 한다.(65쪽)
실패한다는 것은 더 선명하게 본다는 것, 백지 위의 검은 글씨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17쪽)
이 책의 백미는 문학 속 실패자들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이다. 카프카는 실패 속에서 글을 썼고, 페소아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데 실패했지만 오히려 그 실패가 그의 창의력의 근원이었다. 콕토는 "실패의 미학이야말로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미학이다"라고 말하며 실패를 껴안는 태도를 제시한다. 이들의 사례는 실패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고 나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카프카는 실패에 정하여 글을 쓴 게 아니라 실패와 더불어 썼다.(94쪽)
모든 격변을 자신의 유일한 자산, 즉 비할 데 없는 창의력과 결합된 당황스러운 관성의 힘으로 맞섰다.(141쪽)
또한 이 책은 번역가라는 특수한 존재가 언어를 어떻게 다루고, 실패의 가능성 속에서 어떤 사유를 만들어내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담긴 수많은 가능성과 해석의 흔들림 속에서 번역자는 늘 ‘불완전한 완성’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 빛나는 문학적 진실이 있다.
'막간'코너에 배치된 짧은 메시지—“실패는 사다리다(23쪽)”, “실패는 언제나 한발 앞서간다(39쪽)”—는 독자의 생각을 자극하며 실패에 대한 기존 관념을 흔든다. 이 책은 실패에 관한 철학서이자,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작은 연대의 손길이다.
글을 쓰는 사람, 번역을 하는 사람, 책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실패를 지나 지금 다시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각별한 실패는 실패를 '덜 나쁜 것'으로 만드는 법이 아니라, 실패를 삶의 일부로 환대하는 태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조용히 증명해 보인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