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장기려
손홍규 지음 / 다산책방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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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내 삶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시대를 절실히 느끼며 산 사람이든, 시대의 아픔을 슬쩍 비껴간 사람이든 한 사람의 평생은 시대의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온갖 풍상을 겪고 살아온 한 인물의 일생은 그 자체로 특정 시대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런 삶을 들여다보며 독자는 삶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비록 자신과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일생이라도 사람의 인생이란 별반 다르지 않고 또 자신이 처해있는 현재적 시점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삶은 시련과 고난의 나날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과거의 인물은 현재적 인물에게 자신의 삶을 투영해줄 수 있다. 그래서 현재적 인간은 과거 인간의 삶을 통해 삶의 주춧돌을 굳건히 세울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격동의 시대를 견디어낸 인물의 삶이라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욱 삶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청년 의사 장기려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격렬한 변화의 소용돌이 시대를 산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될 무렵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태어나 일제 치하의 억압적 학교환경에서 교육을 받았고 앞날의 희망이 없는 절망적 시대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해방의 물결과 함께 밀려든 이념의 갈등은 흑백의 선택을 강요했던 시대였다. 그는 이런 혼돈의 시대를 살며 오롯이 자신이 추구했던 생명 존중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삶이기에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삶의 귀감이 될만한 인물로 난 주저 없이 장기려 선생을 꼽는다.


어쩌면 이 시대 젊은이를 들먹거릴 필요 없이 내 자신이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필요로 했는지 모른다. 지난 해 연말부터 불어 닥친 경제 한파는 내게 극단적인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불확실한 미래는 내 영혼을 옭죄는 사탄처럼 내 온 삶을 뒤흔들었다. 경제난 속에서 스스로 무너져가는 나의 정신력을 다시 다잡기 위해선 누군가 내게 호되게 꾸지람할만한 분이 필요했다. 그건 나보다 훨씬 힘든 고난의 시대를 겪어온 인물이어야 했고, 그런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좌표를 잃지 않고 실천에 옮긴 분이어야 했다. 그런 분이 장기려 선생이시다.


선생은 평생 올곧은 삶의 좌표를 가슴 깊이 새기며 사신 분이다. 그런 좌표는 그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미 그의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할머니는 어린 기려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남기신다.


“기려야, 너는 옷을 여러 벌 껴입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옷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 할머니는 네가 다른 사람들의 옷이 되어줬으면 싶구나. 다른 사람들의 체온을 지켜주는 , 옷처럼 늘 사람들 곁에 머무는 그런 사람이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구나.”


뜨거운 인간이 되기를 바랐던 할머니는 당신 스스로 그걸 실천하며 사신 분이다. 장기려 선생이 의사가 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분명 할머니의 이 가르침대로 그는 뜨거운 인간으로 남았을 것이다.


의사로서 장기려 선생의 인생행로는 철저히 할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었다. 의사가 되고자 했던 소망도, 훌륭한 의사가 되고자 열심히 공부했던 목적도, 의사가 되어서 가난한 무의촌 지역에서 무료봉사를 했던 이유도 이런 가르침의 실천이다. 그는 돈이 없어 병원을 찾아 의사를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사가 되고자 했으며, 단 한번의 의사의 잘못된 시술로 아까운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고의 외과의사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렇게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의사가 되어 앞날이 창창하게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마련해준 편한 자리를 마다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평양의 기홀병원으로 간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실천할 수 있었기에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했다. 무의촌 환자를 진료하면서 그는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 그런 그의 곁에는 묵묵히 자신을 내조하는 아내가 있었다. 어떤 때는 월급 한 푼 가져오지 못하고 어떤 땐 집에 있는 적은 돈마저도 가져다 가난한 환자 진료에 보태는 그의 행동을 헌신적으로 밀어주는 아내가 없었다면 그도 인간이기에 삶의 현실과 이상 속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아내도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따뜻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의 시절이 다가온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오로지 생명 하나 살리는 삶에 전념하는 의사마저도 그냥 두지 않는다. 흑백의 갈등, 이것과 저것으로 나뉘어 하나를 강요하는 삶 속에선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다. 그건 생명을 놓고도 그렇게 저울질한다. 장기려 선생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이념의 강요로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게 하는 역사의 흐름이었다. 내 편이 아닌 적을 치료했다고 해서 의사의 생명을 살리는 시술도 이념적 잣대가 드리워진다. 이념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사이기에 그는 다른 이보다 훨씬 더 생명에 있어서도 고귀한 존재가 되는 세상. 오로지 생명 그 자체의 고귀함을 존중하는 따뜻한 인간이 어찌 이런 세상을 견딜 수 있을까?


남북으로 갈려 복수의 화신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그가 설 자리는 마땅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의사로서의 소신과 신념을 갖지 못한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시술하는 의사가 어디 의사인가? 이미 이념의 벌레가 갉아먹은 영혼은 치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살아있으되 살아있는 게 아니요, 죽는다고 해서 이미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중환자처럼 그는 모든 기력을 소진한 채 그렇게 멀거니 누워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꺼져가는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또한 생명의 힘이다. 그가 희미한 의식으로 누워있는 병원의 바깥에서 또 한 생명이 도와 달라 울부짖는다. 아이를 낳다 잘못되어 산모와 아이 모두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평생 그와 함께 했던 하나님의 목소리였는지, 아니면 그가 늘 마음에 품었던 할머니의 목소리였는지 알 수 없는 내면의 소리가 그를 일으켜 세운다. 전쟁의 시대에 어떤 의사도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외면하고, 더더군다나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니기에 누구도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소신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을 되살리는 길이기도 했으리라.


이처럼 장기려 선생님은 철저히 자신의 소신에 충실했던 삶을 사셨던 분이다. 생명의 고귀함을 존중하기에 누구 앞에서도 의사로서 당당히 집도할 수 있었던 분이다. 오로지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전념했던 그이기에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또 이념적인 강압 앞에서도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분이다. 그런 그 분의 삶이 흔들리는 내 삶을 바로잡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혼란이 가중되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 시대 모든 젊은이들에게도 훌륭한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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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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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늘 진실인 것이 아니요, 오히려 편향된 의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한 허위인 경우가 더 많다. 대중의식이라고 하는 건 대체로 시대사적 주류를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건 굳이 끌어당기지 않아도 저절로 우리에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발바닥을 적시고 발목을 타고 무릎을 넘어 온몸까지 푹 잠기게 한다. 세계화의 논리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이념도 어느 순간 그렇게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아 시대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느낌이다. 서구 선진국들은 그것이 마치 우리 시대의 절대적 진리이자 마땅히 따라야할 순리인 것처럼 몰아세운다. 이 조류에 역행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도태되어야할 구시대적 퇴물로 취급받는다.

과연 그럴까? 현재의 사회 분위기에선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행위이다. 하지만 난 우리 시대 많은 이들이 이런 의문 부호를 던져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 대다수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용기는 한쪽으로 치우친 경도된 사고가 놓칠 수밖에 없는 숨겨진 역사의 다른 부분을 보여줌으로써 주류이거나 그 반대이거나 세상을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주류에겐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주류의 파도에 경도된 대다수의 일반 대중들에겐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 옳은 것은 아님을 느끼게 한다.

저자 장하준은 비주류의 소수자편에 서 있다. 그는 세계화라는 일방적인 논리로 약소국을 몰아세우는 강력한 적들의 반대편에 서서 그들을 막아낼 튼튼한 성벽을 쌓고자 한다. 날카로운 칼날을 빼어들고 허리를 곧추세운 꼿꼿한 자세로 상대를 응시하는 전장의 장수처럼 그는 밀려오는 적을 향해 우렁찬 함성으로 포효한다. 당신들의 세계화 논리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역사가 증명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허구적 논리를 이제 그만 거둬들이라고. 내면의 양심을 거스르는 기만적 행위를 이젠 스스로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비록 그의 목소리가 허공의 메아리에 그칠지언정 그는 역사의 소수자편에 서서 그들의 논리를 대변하며 강자들이 내세운 허구적 논리에 내포된 검은 의도를 파헤치고자 노력한다.

그의 주장이 독자의 심중에 파고들 수 있는 것은 단지 소수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일반적 정서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세계화를 옹호하는 선진국의 주장을 강자의 횡포로 몰아세웠다면 그의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학자적 연구 자세를 시종일관 꿋꿋이 견지한다. 그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서구 선진국들이 어떻게 지금처럼 부유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 발전과정을 더듬는다. 또한 개발도상국 중 나름대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국가군과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결국 좌절해버린 국가군들을 비교 분석하며 국가의 성장 동력이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상세하게 제시한다. 그것이 서구 선진국의 세계화 논리를 반박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서구 선진국의 성장 동력은 결코 자유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호관세를 통한 자국의 산업보호와 그를 바탕으로 한 유치산업의 육성이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자유주의 경제 시대에도 실은 서구 선진국들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보호정책을 강구했고 실제로 그런 정책을 강력히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18-9세기 세계 최대 무역 강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19-20세기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미국이 모두 자국의 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외국 상품에 고율의 보호관세를 부과하면서 자국의 유치산업을 키워갔다는 것을 명백한 증거를 들어 보여준다.

패전의 쓰라린 상처를 딛고 일어선 일본 경제나 그 후 새롭게 부상한 개발도상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본 정부가 자국의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온갖 시련과 반대를 무릅쓰고 도요타를 지원했기 때문에 지금의 렉서스라는 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포스코 기업이나 삼성전자도 국가의 강력한 지원과 비호가 없었다면 결코 지금의 성공을 거둘 수 없었으리라. 이들이 세계화의 논리대로 국내 시장을 개방하고 선진 기업들과 경쟁했다면 어찌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그들의 하청 업체 수준에 머물거나 사업을 접고 그들과 경쟁할 필요 없는 다른 아이템을 찾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시장을 개방해서 자유롭게 선진 기업과 경쟁했기 때문에 부유한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부유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선후(先後)이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논리는 이미 경제발전의 과정을 통해 그 선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선진국들이 후발주자로서 자신들의 뒤를 쫓는 나라를 깔아뭉개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즉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이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랄한 술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사다리 걷어차기’이다. 또한 이것이 세계화를 극구 주장하는 서구 선진국들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기본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저자는 세계화의 주장을 조목조목 파고든다. 외국인 투자가 반드시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 공기업의 민영화가 경영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기업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 각종 지적재산권과 특허권 등이 결국 경제적 비용을 더욱 증대시키고 오히려 신기술의 개발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점.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정치적 민주화가 반드시 경제 발전과 상관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경제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국가 재정을 편성해야 한다는 점. 이런 모든 측면들이 세계화의 논리로 무장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그건 국가의 특성에 맞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건 ‘모든 경기장은 평평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똑같은 경기장에서 다 큰 어른과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어린이가 경주하는 꼴인 세계화의 주장으로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신랄한 비판이다. 따라서 경기장은 기울어져야 한다. 최소한 어린이가 자라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출 때까진 국가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경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나는 이토록 극명하게 세계화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한 책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의 주장은 너무나 날카롭고 예리하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세계화 논리의 심장을 파고드는 그의 공격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만큼 철저하다. 아직도 미적지근한 상태에서 어정쩡한 위치에 서있는 내게 확실한 사고의 이정표를 설정해준 책이다. 세계사의 주된 흐름은 너무나 쉽게 뇌리에 새겨지지만 그 반대편에 선다는 건 약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겪게 마련인데 이 책은 나의 내적 갈등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이처럼 언덕 저편에 서서 세상의 큰 흐름을 면밀하게 살필 수 있도록 계기를 부여해준 저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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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시커 1 - 별을 쫓는 아이
팀 보울러 지음, 김은경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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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스타시커의 음악을 쫓고 있다. 글룩의 ‘정령들의 춤’, 차이코프스키의 ‘꿈’,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리그의 ‘녹턴’, 드뷔시의 ‘춤추는 눈송이’, 맥도웰의 ‘들장미에게’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곡들을 하나하나 찾아 듣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이전엔 그저 제목만으로 상상하던 이 음악들이 소설을 읽고 난 지금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그것은 소설 속 장면과 음악이 어우러지며 겹쳐들기 때문이리라. 음악에 문외한인 내게도 음악과 함께 흐릿하지만 무언가 영상이 떠오른다는 건 짜릿한 경험이다. 상상력이 빈곤한 내겐 소리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보단 소설 속 이미지로 음악에 다가감이 훨씬 더 편하고 또렷하다. 음악도 소리만으로 접했던 이전과 달리 소설 속 이미지로 접근하게 될 때 색다른 느낌이 들고 뇌리에 또 다른 영상으로 또렷하게 각인되는 것 같다. 

이렇게 연이어 동일한 음악을 듣다보니 단지 소설 속 장면만을 연상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음악의 선율을 따라 이젠 나 자신이 현재의 시공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먼 과거의 고향으로 날아간다. 지긋 감은 실눈 사이로 흐릿한 스크린이 펼쳐지고 그 화면위로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갈마들며 겹쳐진다. 새싹이 돋는 봄날 고향 뒷동산에서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숲의 정령들이 춤추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맑은 시냇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어 멱 감던 어린 영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높바람에 춤추며 내리던 눈송이를 잡겠다고 이리저리 앞마당을 뛰던 강아지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젠 내게도 주인공 루크와 그의 아빠에게 희미하게 들려오던 우주적 시원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겠지만 아무튼 소설과 연계된 음악은 내게 색다른 경험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스크리아빈의 연습곡 작품 2-1이 내 서재의 허공을 떠돌며 맴돌고 있다.  짧은 연습곡이지만 다소 슬프게 흐르는 선율이 긴 여운을 남기며 못생긴 외모 때문에 타인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한 여인, 소설 속 리틀 부인을 떠오르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비행기 사고로 먼저 보내고 혼자 울며 지내야 했던 한 여인의 슬픈 운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도 하다. 타인과 격리된 삶을 살아야했기에 그녀의 슬픔은 외적으로 표현되어 이웃의 따뜻한 정으로 삭이지 못하고 깊은 심연에 고이 묻힐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여인의 외로운 한(恨)을 이 음악과 함께 실었으니 독자인 나로선 그저 그 슬픈 여인의 한(恨)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것은 이 곡이 애초에 슬픈 운명을 지닌 여인을 표현하려 작곡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이 주는 영상을 감상자인 나 자신이 그 음악에 흡입시켰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이 소설이 주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래서 추상적인 소리를 마치 내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처럼 또렷한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다.

소설이 주는 음악적 영상에 도취되어 보냈던 며칠 동안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인 열네 살 소년 루크의 여정을 쫓아 내 별을 찾아보았다. 마흔에 접어드는 나이에 십대 소년의 여정을 쫓는다는 게 가당치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최소한 이 책의 독자로 지냈던 며칠은 나 자신도 십대 소년이 된 기분이었기에 그 황홀하고 짜릿한 감정을 절대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꿈을 잃고 방황하는 삼십대 후반의 슬픈 영혼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용트림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헛된 몸부림일지라도 내 스스로 나의 내면에 소년 시절의 꿈과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삶의 에너지를 충전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어려운 경제 현실 속에서 자꾸만 주눅 들고 위축되는 내 삶에 큰 에너지로 작용할 것 같다.

알 듯 모를 듯 또렷이 잡히지 않는 꿈, 그것이 소년 시절에 갖는 꿈의 특징이다. 그것은 주인공 루크의 마음에 언뜻 언뜻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면의 소리 같은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 어렴풋한 실체를 꼭 붙잡아 내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쫓아 자아와 일치시키는 과정이 험난한 산과 물을 건너는 일과 같은 것이기에 지레 두려워 그 길을 포기해버리기도 하고, 도중에 주저앉기도 하고, 거기에 근접했다고 느끼는 마지막 순간에 꺾이어 좌절하기도 한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이 위태로운 루크의 여정이 바로 그 험난한 인생의 도정을 잘 보여준다. 루크는 천재적 음악가였던 아빠로부터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음에도 아빠의 죽음으로 크게 흔들린다. 민감한 그의 음감 능력에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시원의 소리, 늘 그의 귓가를 맴도는 그 소리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루크는 방황의 세월을 보낸다. 더불어 아빠가 죽은 이후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엄마도 그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들다. 결국 그는 비딱한 마음으로 다른 불량소년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로 인해 죽음 직전에까지 다다른다. 아마도 그것은 열네 살 어린 영혼이 치러야할 혹독한 성장통인지도 모른다.

이런 흔들리는 어린 영혼이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따뜻한 엄마의 시선과 주변의 도움 덕택이다. 끝까지 아들을 믿고 변함없이 지켜봐준 엄마, 그런 엄마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묵히 곁에서 도와준 엄마의 새 연인 길모어 아저씨, 루크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재치 있게 대처한 여자친구 미란다, 그리고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고 이를 북돋아준 하딩 선생님이 그들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를 굳건히 지켜준 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아빠의 시선이다. 아빠의 영혼은 아들 루크의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아들의 주변을 서성거린다. 그것은 루크가 아빠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다름 아니다. 루크는 그의 생활 모든 곳에서 아빠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곳에 아빠의 숨결이 서려 있음을 느낀다. 특히  아빠는 음악과 함께 늘 그의 곁에 영적인 형태로 남아있다. 형체가 없는데도 루크는 음악을 연주할 때마다 아빠의 눈길이 그를 항상 뒤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느낀다.

이처럼 아빠와 그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고리는 음악이다. 아빠는 루크에게 음악적 유전자를 전해준 매개체이다. 아빠는 단지 루크에게 유전적 인자만 남긴 것이 아니다. 천재적 음악가로서 그가 남긴 흔적은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루크 주변인물 대부분은 루크 아빠가 남긴 음악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다. 소설 속에서 가장 극적 장면으로 그려진 장면이 바로 나탈리라는 어린 소녀이다. 열 살의 나이에 정신 연령이 네 살 밖에 안 되고 눈도 먼 나탈리는 리틀 부인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유괴된 소녀이다. 2년 동안 외부에 단절된 채 할머니라 믿고 의지한 리틀 부인에게서 생활했지만 나탈리는 그 옛날 루크의 아빠가 연주했던 차이코프스키의 ‘꿈’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엄마가 태교 음악으로 들려주었던 그 음악을 듣는 순간 나탈리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며 울부짖는다.

이처럼 음악은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다. 그래서 루크는 어디에 있든 아빠의 소리를 듣는다. 피아노를 연주하면서도, 아빠와 산책하던 길을 다시 걸으면서도, 숲속 오크나무 위의 그만의 공간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아빠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아빠가 찾고자 했던 우주적 시원의 소리일 것이다. 아빠의 음악 속에 담긴 원초적 생명의 소리, 즉 우주적 심원을 관통하는 소리이기에 아빠의 죽음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 소리일 것이다. 그것은 아빠가 온전히 그의 음악에 담고자 했던 소리이기에 지금 루크는 아빠와 똑같이 그 소리를 음악 속에서 또 자연 속에서 듣는 것이리라.

내게 이 소설이 영혼의 치유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음악의 힘이다. 아름다운 영상처럼 소설 속에 흐르는 음악은 어려운 경제 현실에 다소 비탄에 빠져 있던 나를 위무해준다. 그래서 난 집에서 이 소설을 읽을 때면 컴퓨터를 통해 들려오는 음악을 켜둔다. 그렇게 소설과 어우러지는 음악이 그냥 소설 속 활자에만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극적 효과를 낳는다. 특히 루크가 마을 연주회에서 리틀 부인을 위해 선곡한 스크리아빈의 연습곡 작품 2-1의 선율이 소설 속 장면과 겹쳐지면 눈물이 글썽해진다. 그 마지막 화해의 음악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였다.

난 지금 사업으로 바쁜 일상 때문에 내 삶에서 제쳐두었던 음악을 되찾아준 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는 장롱 깊숙이 묻어두었던 옛날 LP레코드판을 꺼내본다. 이젠 들을 수도 없는 레코드판인지라 한 때 그 음악에 흠뻑 취해 있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냥 먼지를 털어낼 뿐이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에 지금도 그 음악이 울려오는 듯하다. 비록 지금 그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없을지라도 소설 속 음악을 찾아들으며  내 자신이 아직도 소년 시절의 순수한 감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난 너무나 기쁘기 한량없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 소설은 내 기억의 심연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소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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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가늠하지 못한다. 젊은 시절엔 시간이 더디 지나가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기 일쑤여서 현재의 시간을 쓸데없는 일로 허비하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 돌이켜보니 내가 지나온 삶의 시간이 이제 앞으로 남은 시간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섬뜩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내게 죽음은 삶의 의욕을 촉발하는 매개체이다. 죽음이 떡하니 내 삶의 전방에 버티고 있기에 늘 긴장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만약 죽음이 예고되어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 직면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이 책은 바로 죽음을 예감한 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의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삶을 연장하기 위해 병원 신세를 지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예감하고 그것을 준비하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의지는 단호하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단순히 자신의 생명줄을 연장하는데 허비하고 싶지 않은 게다. 화가로서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자신이 이루고 싶은 최후의 작품을 남기는 것, 그것이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최후의 선택이다.


이제 할아버지는 생과 사의 갈림길을 아슬아슬하게 곡예하며 힘든 붓질을 한다. 그의 곁에는 그런 힘든 여정을 지켜보는 가족이 있다. 자신을 꼭 닮은 손녀 제스는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힘겹게 지켜본다. 심약한 아들보다도 오히려 손녀에게 애정을 느끼는 할아버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 혼신의 힘으로 그녀의 마음에 자신의 혼을 심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할아버지가 그리고자 했던 ‘리버보이’는 그의 분신에 다름 아니다. 결국 ‘리버보이’는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놀이터였던 시골의 한적한 강가로 가서야 느낄 수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모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고향 강가로 가겠다고 고집한다.


역시 할아버지의 손녀답게 제스는 그곳에서 리버보이를 만난다. 그 옛날 할아버지가 소년이었던 시절에 그리 했을 법한 꿈과 희망을 품고 사는 리버보이. 그는 제스의 도전 정신을 자극한다. 강의 근원에서 출발하여 바다에 이르는 긴 강줄기를 따라 수영하는 리버보이를 쫓아 제스는 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 있는 브레머스까지 수영으로 도착한다. 아마도 제스가 수영했던 그 길은 먼 옛날 할아버지가 리버보이였던 시절 시도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바로 자신이 그 리버보이였던 시절 자신의 꿈과 열정을 화폭에 담고 싶어 마지막을 이곳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이제 손녀 제스는 할아버지의 진정한 의도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것으로 할아버지는 자신의 남은 인생의 정점을 찍을 것이리라. 용의 그림을 그린 화가가 마지막 한 점으로 용의 그림을 완성하듯 할아버지는 리버보이로 인생의 마지막 남은 한 점을 찍고 자신의 인생을 완성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손녀는 더 이상 슬프지 않다. 그림 속 리버보이가 늘 그녀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기에 그녀는 할아버지의 죽음이 결코 슬프지만은 않다. 할아버지의 인생이 그녀 마음을 꽉 채워 더 큰 벅찬 감격으로 긴 여운으로 드리워져 있기에 그녀는 할아버지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일 것이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란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리라.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끝까지 치열하게 살다간 한 인간 앞에 숭고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인생은 모두 예고된 죽음이라는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년을 넘기기 힘든 인생. 고작해야 평균 80여년 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이 어떤 경우엔 80년, 100년이 아니라 40년 인생도 되지 못한 경우가 있는 반면 어떤 경우는 죽은 이후 훨씬 더 긴 여운으로 후손들에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책으로 나는 내 인생의 남은 기간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을 단지 남은 기간의 연령으로 계산되지 않을 더 긴 여운으로 남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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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아카데미 해를 담은 책그릇 1
섀넌 헤일 지음, 공경희 옮김, 이혜진 삽화 / 책그릇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행복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이 책은 맑고 순수한 한 소녀의 성장기를 통해 이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행복의 의미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생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선명하게 부각된다. 전혀 상반되는 생활 모습의 차이는 주인공 미리에게도, 또한 독자에게도 자신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자문하게 한다.

소설의 배경은 댈랜드의 오지 에스켈 산이다. 이곳의 주민은 조상 대대로 산에서 대리석을 캐며 생계를 꾸려왔다. 산 아래 사람들과의 접촉은 대리석을 사러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상인들뿐이다. 이들은 다른 사회와의 단절이 주는 그들만의 순박한 자연성을 유지한 반면 세상 물정에 어두워 자신들이 캐낸 대리석의 경제적 가치를 모른다. 따라서 상인들로부터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얻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겨우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곳의 소녀들은 열 살만 넘어도 경제활동에 참여한다. 주로 대리석을 캐는 작업 현장에서 잡일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선조의 가업을 끌어가는 중심적 역할을 자연스럽게 터득해간다. 그들에게 학교라는 배움터는 애초 존재 가치가 상실되어 있으며, 생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가사노동이나 삶의 터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 그 자체가 배움이요, 학습의 전부이다.

이런 에스켈 산에 전혀 상반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에스트랜드(댈랜드를 복속한 본국)의 사제들이 댈랜드의 오지에서 왕자비를 간택해야 한다는 신의 계시를 전하면서 에스켈 산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의 강력한 권력에 떠밀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작업현장에 투입되어야할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녀들이 왕자비의 간택을 준비하는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마을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만한 제안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들에게 자신의 딸이 왕자비가 된다는 것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왕자비가 된다는 것은 돌가루를 뒤집어 써가며 돌을 캐며 생계를 이어가야할 그들에게 파격적인 변신이 이루어질만한 일이다.

이제 소녀들은 가족을 떠나 몇 시간 거리의 프린세스 아카데미에서 궁중 생활에 필요한 수업을 받게 된다. 처음엔 가족과 떠나 따로 생활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저어했던 소녀들의 마음속에도 차츰 왕자비로서의 화려한 궁중 생활에 대한 동경이 커져간다. 이전까지 산 아래 사람이나 궁중 생활에 대해 전혀 몰랐던, 아니 아예 자신들의 삶과 비교할 생각조차 못했던 그녀들의 의식 속에 산 사람들의 곤궁한 생활과 궁중의 화려한 생활이 대비되어 교차되는 것이다. 이런 차이의 발견이 격차의 의식으로 바뀌어 이전의 삶에 대한 열등감이 심층에 쌓여갈수록 그 열등감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의식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승욕구는 경쟁자에 대한 반목과 질시를 낳기도 한다. 소녀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왕자비에 대한 열망도 바로 이런 측면으로 차츰 전개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현명한 주인공 미리는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자신이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왕자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이런 반문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의 속물근성에 일침을 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주인공 미리에게 중요한 것은 왕자비로 화려한 궁중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왕자비가 되는 것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독자는 앞으로 전개될 왕자비의 운명적인 간택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라는 것보다는 주인공 미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더 주목해야 한다.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 선택이 과연 선택된 당사자는 물론 선택한 왕자 자신에게도 참된 인생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지 독자들은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이 제시하는 행복의 진정한 의미의 발견이자 그 선택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독자 자신의 행복관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으로 주인공 미리는 자신의 결정을 늘 유보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왕자에 대한 선입견을 떨쳐내고 오직 자신의 현재에 충실하며, 자아실현에 도움을 주는 프린세스 아카데미의 수업에 열중한다. 이런 학습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과 소질을 발견해내고, 이의 실현에 경주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이는 미리의 진실한 남자 친구 페더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조상의 가업을 주어진 운명처럼 수용하는 에스켈 산 주민들과 달리 페더는 자신만의 꿈을 품고 있다. 대리석에 자신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미적 영상을 부여하는 것, 바로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실현하는 것이다. 미리와 페더의 우정은 이런 서로의 꿈을 인정하고 북돋아줌으로서 진실한 사랑으로 싹터간다.

그렇다면 왕자비는? 그것은 애초 미리를 비롯한 에스켈 산 소녀들에게 어울리지 않은 가식이었다. 그런 가식적 허울은 왕자 스스로가 자신의 진정한 배필을 찾아감으로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제들의 운명적 장난은 왕자가 마음에 담아둔  브리타를 진정한 배필로 확인하는 소설적 설정이었을 뿐이다. 사제들의 결정으로 사랑하는 왕자와 헤어질 상황에 처한 그녀는 신분을 위장하고 에스켈 산에 잠입하여 프린세스 아카데미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로써 독자들은 이 책이 제시하는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알게 된다. 신데렐라적 환상이 결코 행복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것. 외적 대상에 기대어 얻어지는 물질적 화려함보다는 자신의 심연의 울림에 귀 기울이는 것. 진실한 자아를 찾아 이의 실현에 노력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깊이 새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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