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시커 1 - 별을 쫓는 아이
팀 보울러 지음, 김은경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지금 스타시커의 음악을 쫓고 있다. 글룩의 ‘정령들의 춤’, 차이코프스키의 ‘꿈’,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리그의 ‘녹턴’, 드뷔시의 ‘춤추는 눈송이’, 맥도웰의 ‘들장미에게’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곡들을 하나하나 찾아 듣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이전엔 그저 제목만으로 상상하던 이 음악들이 소설을 읽고 난 지금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그것은 소설 속 장면과 음악이 어우러지며 겹쳐들기 때문이리라. 음악에 문외한인 내게도 음악과 함께 흐릿하지만 무언가 영상이 떠오른다는 건 짜릿한 경험이다. 상상력이 빈곤한 내겐 소리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보단 소설 속 이미지로 음악에 다가감이 훨씬 더 편하고 또렷하다. 음악도 소리만으로 접했던 이전과 달리 소설 속 이미지로 접근하게 될 때 색다른 느낌이 들고 뇌리에 또 다른 영상으로 또렷하게 각인되는 것 같다. 

이렇게 연이어 동일한 음악을 듣다보니 단지 소설 속 장면만을 연상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음악의 선율을 따라 이젠 나 자신이 현재의 시공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먼 과거의 고향으로 날아간다. 지긋 감은 실눈 사이로 흐릿한 스크린이 펼쳐지고 그 화면위로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갈마들며 겹쳐진다. 새싹이 돋는 봄날 고향 뒷동산에서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숲의 정령들이 춤추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맑은 시냇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어 멱 감던 어린 영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높바람에 춤추며 내리던 눈송이를 잡겠다고 이리저리 앞마당을 뛰던 강아지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젠 내게도 주인공 루크와 그의 아빠에게 희미하게 들려오던 우주적 시원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겠지만 아무튼 소설과 연계된 음악은 내게 색다른 경험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스크리아빈의 연습곡 작품 2-1이 내 서재의 허공을 떠돌며 맴돌고 있다.  짧은 연습곡이지만 다소 슬프게 흐르는 선율이 긴 여운을 남기며 못생긴 외모 때문에 타인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한 여인, 소설 속 리틀 부인을 떠오르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비행기 사고로 먼저 보내고 혼자 울며 지내야 했던 한 여인의 슬픈 운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도 하다. 타인과 격리된 삶을 살아야했기에 그녀의 슬픔은 외적으로 표현되어 이웃의 따뜻한 정으로 삭이지 못하고 깊은 심연에 고이 묻힐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여인의 외로운 한(恨)을 이 음악과 함께 실었으니 독자인 나로선 그저 그 슬픈 여인의 한(恨)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것은 이 곡이 애초에 슬픈 운명을 지닌 여인을 표현하려 작곡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이 주는 영상을 감상자인 나 자신이 그 음악에 흡입시켰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이 소설이 주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래서 추상적인 소리를 마치 내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처럼 또렷한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다.

소설이 주는 음악적 영상에 도취되어 보냈던 며칠 동안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인 열네 살 소년 루크의 여정을 쫓아 내 별을 찾아보았다. 마흔에 접어드는 나이에 십대 소년의 여정을 쫓는다는 게 가당치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최소한 이 책의 독자로 지냈던 며칠은 나 자신도 십대 소년이 된 기분이었기에 그 황홀하고 짜릿한 감정을 절대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꿈을 잃고 방황하는 삼십대 후반의 슬픈 영혼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용트림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헛된 몸부림일지라도 내 스스로 나의 내면에 소년 시절의 꿈과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삶의 에너지를 충전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어려운 경제 현실 속에서 자꾸만 주눅 들고 위축되는 내 삶에 큰 에너지로 작용할 것 같다.

알 듯 모를 듯 또렷이 잡히지 않는 꿈, 그것이 소년 시절에 갖는 꿈의 특징이다. 그것은 주인공 루크의 마음에 언뜻 언뜻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면의 소리 같은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 어렴풋한 실체를 꼭 붙잡아 내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쫓아 자아와 일치시키는 과정이 험난한 산과 물을 건너는 일과 같은 것이기에 지레 두려워 그 길을 포기해버리기도 하고, 도중에 주저앉기도 하고, 거기에 근접했다고 느끼는 마지막 순간에 꺾이어 좌절하기도 한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이 위태로운 루크의 여정이 바로 그 험난한 인생의 도정을 잘 보여준다. 루크는 천재적 음악가였던 아빠로부터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음에도 아빠의 죽음으로 크게 흔들린다. 민감한 그의 음감 능력에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시원의 소리, 늘 그의 귓가를 맴도는 그 소리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루크는 방황의 세월을 보낸다. 더불어 아빠가 죽은 이후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엄마도 그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들다. 결국 그는 비딱한 마음으로 다른 불량소년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로 인해 죽음 직전에까지 다다른다. 아마도 그것은 열네 살 어린 영혼이 치러야할 혹독한 성장통인지도 모른다.

이런 흔들리는 어린 영혼이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따뜻한 엄마의 시선과 주변의 도움 덕택이다. 끝까지 아들을 믿고 변함없이 지켜봐준 엄마, 그런 엄마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묵히 곁에서 도와준 엄마의 새 연인 길모어 아저씨, 루크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재치 있게 대처한 여자친구 미란다, 그리고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고 이를 북돋아준 하딩 선생님이 그들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를 굳건히 지켜준 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아빠의 시선이다. 아빠의 영혼은 아들 루크의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아들의 주변을 서성거린다. 그것은 루크가 아빠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다름 아니다. 루크는 그의 생활 모든 곳에서 아빠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곳에 아빠의 숨결이 서려 있음을 느낀다. 특히  아빠는 음악과 함께 늘 그의 곁에 영적인 형태로 남아있다. 형체가 없는데도 루크는 음악을 연주할 때마다 아빠의 눈길이 그를 항상 뒤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느낀다.

이처럼 아빠와 그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고리는 음악이다. 아빠는 루크에게 음악적 유전자를 전해준 매개체이다. 아빠는 단지 루크에게 유전적 인자만 남긴 것이 아니다. 천재적 음악가로서 그가 남긴 흔적은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루크 주변인물 대부분은 루크 아빠가 남긴 음악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들이다. 소설 속에서 가장 극적 장면으로 그려진 장면이 바로 나탈리라는 어린 소녀이다. 열 살의 나이에 정신 연령이 네 살 밖에 안 되고 눈도 먼 나탈리는 리틀 부인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유괴된 소녀이다. 2년 동안 외부에 단절된 채 할머니라 믿고 의지한 리틀 부인에게서 생활했지만 나탈리는 그 옛날 루크의 아빠가 연주했던 차이코프스키의 ‘꿈’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엄마가 태교 음악으로 들려주었던 그 음악을 듣는 순간 나탈리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며 울부짖는다.

이처럼 음악은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다. 그래서 루크는 어디에 있든 아빠의 소리를 듣는다. 피아노를 연주하면서도, 아빠와 산책하던 길을 다시 걸으면서도, 숲속 오크나무 위의 그만의 공간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아빠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아빠가 찾고자 했던 우주적 시원의 소리일 것이다. 아빠의 음악 속에 담긴 원초적 생명의 소리, 즉 우주적 심원을 관통하는 소리이기에 아빠의 죽음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 소리일 것이다. 그것은 아빠가 온전히 그의 음악에 담고자 했던 소리이기에 지금 루크는 아빠와 똑같이 그 소리를 음악 속에서 또 자연 속에서 듣는 것이리라.

내게 이 소설이 영혼의 치유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음악의 힘이다. 아름다운 영상처럼 소설 속에 흐르는 음악은 어려운 경제 현실에 다소 비탄에 빠져 있던 나를 위무해준다. 그래서 난 집에서 이 소설을 읽을 때면 컴퓨터를 통해 들려오는 음악을 켜둔다. 그렇게 소설과 어우러지는 음악이 그냥 소설 속 활자에만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극적 효과를 낳는다. 특히 루크가 마을 연주회에서 리틀 부인을 위해 선곡한 스크리아빈의 연습곡 작품 2-1의 선율이 소설 속 장면과 겹쳐지면 눈물이 글썽해진다. 그 마지막 화해의 음악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였다.

난 지금 사업으로 바쁜 일상 때문에 내 삶에서 제쳐두었던 음악을 되찾아준 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는 장롱 깊숙이 묻어두었던 옛날 LP레코드판을 꺼내본다. 이젠 들을 수도 없는 레코드판인지라 한 때 그 음악에 흠뻑 취해 있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냥 먼지를 털어낼 뿐이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에 지금도 그 음악이 울려오는 듯하다. 비록 지금 그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없을지라도 소설 속 음악을 찾아들으며  내 자신이 아직도 소년 시절의 순수한 감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난 너무나 기쁘기 한량없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 소설은 내 기억의 심연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소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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