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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2월
평점 :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글은 사람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기쁨과 환희, 슬픔과 괴로움 모든 감정은 글을 통해 다른 이에게 전달됩니다. 글만큼 사람의 속내를 담아내기에 좋은 도구가 또 있을까요?
그런데 도저히 글에 담기지 않는 감정도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러합니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과부라 하고,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라 하고,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아라고 하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를 칭하는 단어는 없다고요. 감히 우리가 쓰고 있는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께서 아들을 잃고 쓰신 명저, 한 말씀만 하소서의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한국인의 가장 깊은 정서를 텍스트로 구현해 내는 박완서 선생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슬픔인 아들을 잃은 감정을 글로 써 내려갔습니다. 소설가의 글이지만 소설이 아닙니다. 회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이 옭아매는 암담한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박완서 선생님께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고, 본문 자체가 생활성서라는 가톨릭 월간지에 실린 글을 모아놓은 것이기에 종교적인 색채가 많이 묻어나는 책입니다. 제목 자체도 미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절망에서 신에게 대항하고 따지고 물으며 절대자 앞에서 어떻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숭고한 과정을 전해 줍니다.
네 명의 딸을 낳고 다섯 번째 만에 얻은 귀한 아들, 서울대 의과대학을 다니는 잘난 아들, 대놓고 말하진 못해도 어미로서 저자가 느꼈을 뿌듯함과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아들,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신이 있기는 한가요?
어미는 세례 때 받은 십자고상을 집어던지며 절규합니다. 당신이 있기는 하냐고,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뭐라 말이라도 해보라고요. 그렇게 몇 번의 울분을 토해낸 후 어미는 비로소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표정을 보게 됩니다. 얼마든지 나를 죽여라, 죽이고 또 죽여라, 나는 죽기 위해 이곳에 왔다. 신께서 초월적인 기적으로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 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나보다 먼저 극심한 고통을 겪어낸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길에서 돌을 줍는 노파를 보며 저자는 자신도 모르게 노파의 아들을 상상합니다. 아마도 술주정뱅이에다 망나니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요. 그러니 벌건 대낮에 늙은 어미를 가장 비참한 노동의 현장으로 내몬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상을 하던 중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교만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내 교만의 결정체였던 나의 아들, 그동안 다른 가정의 아들을 보며, 얼마나 우쭐했던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한심하게 바라봤던 자기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저자는 과거에 자신이 불쌍하게 봤던 이들보다 못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설령 망나니 같은 아들이라 할지라도 아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은 그런 아들조차 없어져 버린 신세가 된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처럼, 가장 비참한 처지에 처하고 나서야 저자는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봅니다.
비참한 상황은 비참한 영혼의 실상을 깨닫게 해줍니다. 아들은 돌아올 수 없지만 어미는 아들의 몫만큼 대신 성장통을 겪습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내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처절한 절규와도 같은, 그러면서도 감히 겉으로 내비칠 수 없었던 내밀한 속마음을 수치스러울 정도로 내보여주는 놀라운 책입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통해 우리의 영혼과 성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어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쌀쌀해지는 요즘, 우리의 굳은 영혼을 녹여줄 따뜻하고 서글픈 책, 한 말씀만 하소서를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