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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말들의 흐름 1
정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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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쉽게 손을 내밀어준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발을 반쯤 걸치고 삶의 여유를 꿈꿔 볼 수 있게 한다. 커피마저 없다면 내 삶은 무미건조하고 비참해질 것이다. 커피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거기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p.18)


이 책은 '커피와 담배'라는 특정한 기호품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좋아하는 무언가를 오롯하게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커피와 담배와 얽힌 짤막한 12개의 단편 속에는 작가의 소소하지만 내밀한 일화들이 담겨있는데, '커피와 담배'라는 주어의 자리를 내가 좋아하는, 추구하는 그 무언가로 치환하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책이다. 커피 맛을 잘 모르고 담배를 전혀 피울 줄 모르는 나에게도 이 책의 문장들이 소중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작가의 기억 속에 담긴, 할아버지로 부터 이어지는 담배의 첫인상을 살펴보는 것도 재밌고, 담배를 피우는 리듬감이 마음에 들어 그에게 한 마디라도 더 붙여 보려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작가의 모습이 귀여웠다. 한 시간의 아르바이트비와 맞먹는데도 한 잔의 커피를 들이켜야할 만큼 커피 애호가이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취향을 권하지 않는다. 취향으로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는게 부끄럽기도 하고 누군가가 자신만의 커피를 즐기게 되는 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누구에게나 나만 알고 싶은 인생의 소중한 순간이라던가, 나만 즐기고 싶은 요즘의 취미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만의 것으로 온전히 간직하고 싶다가도 너무 좋아서 순간 나도 모르게 터져나와 말하게 되거나 극히 찰나의 순간만 콕 집어 SNS에 공유하게 된다. 그런 인생의 순간을 뚝 떼어내어 글로 써 준 작가가 고맙고 작가가 커피와 담배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나도 내 삶의 한 부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즐거웠다.


the real group의 coffee calls for a cigarette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가사 속 주인공은 한 잔의 커피에, 커피가 부르는 담배에, 담배가 부르는 마실 것과 그에 따라오는 노래와 춤으로 지나가는 시간의 무상함을 견딘다.  이 사람은 부엌에서 따른 한 잔의 커피와 가득 차 있는 한 갑의 담배로 충만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온다면 이것들을 다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와 노래 속 주인공이 닮은 것 같아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노래를 줄곧 들었다.

 

작가는 커피와 담배가 고립을 고독으로 만들어준다고 말했다.(p.96) 여기서 말하는 '고립'이란 누구와 함께 있어도 내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나 자신인 상태이고, '고독'은 내가 나 자신을 벗 삼고 있는 상태이다. coffee calls for a cigarette 속 주인공은 무상한 지나간 날들을 잊기 위해 커피와 담배를 찾는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 담배가 타 들어가는 순간을 '나'는 오롯이 바라보며 나 자신을 바라보고 이러한 고독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토록 좋아하는 커피와 담배의 자리를 '당신'에게 내어줄 수 있을만큼 넓어진 게 아닐까.


담배를 전혀 피울 줄 모르지만 커피와 담배는 어딘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회사원들에게 그렇다. 바쁜 일과 중에 잠깐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 커피 한 잔의 시간, 담배 한 개비의 시간만큼은 일에서 잠깐 떨어져 온전히 내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옆 자리 동료를 바라볼 수도 있고, 다음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도 하다. 커피와 담배는 누군가에게 기호이자 취미이고, 나를 바라보는 도구이자 소통의 창구이며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으면서도, 반대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꼭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아도 나는 그냥 이 글이, 이 글을 읽는 시간이 좋았다.


지금 밖에는 비가 오는데, 따뜻하고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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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그 자리에 - 첫사랑부터 마지막 이야기까지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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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심지어 지구가 황폐해지더라도 인간의 삶과 문화적 풍요는 생존할 것이라는 희망을 감히 품는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을 문화의 방어벽이나 인류의 집단 기억으로 간주하지만, 나는 심오한 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과와 잠재력을 가진 과학도 그와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좋은 과학‘이 전례 없이 번성하고 있으며, 훌륭한 과학자들이 앞장서서 조심스레 서서히 움직이며 지속적인 자기 검증과 실험을 통해 통찰력을 점검받고 있다. 나는 좋은 글쓰기, 미술, 음악을 높이 평가하지만, 품위, 상식, 선견지명, 불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 같은 인간의 미덕을 바탕으로 수렁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과학뿐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의 잠재력은 방대하고 중앙집권화된 기술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노동자/ 농민/ 장인들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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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신뢰한다. 인류와 지구는 생존할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며, 지금이 인류의 마지막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좀 더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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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푸가 -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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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別辭)

 

어차피 당신이 끝내지 않았다면, 아닌 걸 알면서도 나는 못 끝냈을 것을 알기에

지금은 당신에게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은 정말 끝일까 의심하던 제게, 이제는 정말 끝났다고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던 당신으로부터 끝을 실감하던 그 순간에 나의 한 구석이 뚫린 듯 멍하게 공허했던 그 감각은

아직도 너무나 선명합니다.

 

그 때 나는 지하철이었고, 미친 사람처럼 당신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어요.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당신이라도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내게 끝끝내 이별을 말하던 당신이 참으로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 진실로 잔인했던 사람은 '나'였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끝까지 내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도 내 감정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럼으로써 당신이 나에게서 멀어지고, 당신 안에 만들어진 나 조차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만들었어요.

 

그 때의 당신도 그대 안에서 낯설어진 내가 두려웠을 텐데,

그 때의 힘들었을 당신을 생각하게 된 것이 그 때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라는 사실이,

우리가 끝을 만날 수 밖에 없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얼마전 불현듯 스치는 그 계절의 냄새를 타고

나도 모르게 그 때의 당신을 불쑥 떠올렸습니다.

 

선명하게 아픈 감각 사이로 같이 있던 시간의 온전함이 스며서

일 순간 나는 따뜻했습니다.

 

그런데,

당신 안에 있던 나 마저도 당신으로부터 내가 끌고 나와

내 안의 추억으로 당겨온 것만 같아서

당신에게는 나와 만났던 그 시간이 통째로 부재의 시간이 되어버렸을 까봐

나는 또 슬펐습니다.

 

그 순간, 여전히 온통 당신에게 기억될 '나'에 대한 생각만 하는 나를 들여다보며

끝내 나는 우리의 관계 속에서 '나'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그런 나에게서 부끄러움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와 진심으로 헤어질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엉겨있던 시간의 응어리 속에서 헤어나와서

그 때의 당신과,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마주 볼 수 있게 되었거든요.

 

 

"부재의 힘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것 때문에, 오로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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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사상고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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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은 충분근거율에 의해 의식 작용에 주어진 것에 대한 앎만을 획득할 수 있다. ,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의 세계, ,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세계가 표상으로 드러난다. 이 인식을 '의식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 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것으로서의 의지가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모든 힘'이라고 표현했다. 식물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힘이나 수정 같은 광물이 결정을 만드는 힘, 중력의 작용, 이 모두가 의지인 것이다. 따라서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인 원리로 소화, 분비, 성장 등 생명체의 모든 것이 목적 없는 맹목적인 의지의 움직임이다.

인간은 이 의지의 작용을 직관할 수 있다. 의지가 가장 고차원적으로 객관화 된 것이 이념이고, 그 다음 단계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념을 직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은(좋은 옷, 좋은 집) 이념을 파악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의문을 가지고 그것이 왜 그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자 하는 인간만이 개별 사물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는 최고 단계의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순수한 인식 주관은 동양의 '무아'와 같은데,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까지 의지에 영향 받지 않을 때 이념을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고가 강할수록 우리는 쉽게 상처받는다. 고통은 타자가 불러 일으킨 듯 하지만, 실은 나의 에고가 불러 일으킨 고통이라고 쇼펜하우어는 강조한다.

인간은 고통 없이 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저는 절대로 화장실은 가고 싶지 않아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격은 의지의 구현이기 때문에 성격을 고친다는 것은 의지의 경향성을 조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장점, 단점)에 대해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의 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괴로운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다.

따라서 라는 개체성과 인칭성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늘 나 자신을 비인칭 주어로 놓는 훈련을 하라고 이야기 한다. 단순히 나를 3인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it’의 용법처럼 나를 녹여 자연 속으로 흘려 보내라는 것일 것이다. 비인칭 주어는 날씨나 자연 묘사에서 쓰이는 문법적 특성이 있는데, 즉 나의 육신에 갇혀 사는 생에 에고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단단한 에고를 때로는 부드럽게 흘려 보내는 일을 반복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념의 인식 방법의 하나로 '예술'이 있다. 예술은 사물의 고유한 내적 본질에로 침잠해 가는 행위인데, 따라서 이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읽어내기에는 사실 어려움이 많아서 아쉬움이 많은 글을 쓸 수 밖에 없지만, 앞으로 읽어나갈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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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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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고 이 곳 저 곳 움직임이 많은 일을 하다가 어제 해두고 그대로 있는, 내 자리가 생긴 공간으로 출근하는 일을 시작하니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자연히 많아졌다. 서울 살이를 시작하고 신림동에서 사당동으로, 연건동에서 다시 신림동으로, 그리고 풍납동에서 성동구까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거의 1년에 한 번 꼴로, 혹은 그 보다 더 자주 이사를 다니다 보니 갖게된 '나의 공간'에 대한 생각과도 겹치는 관심이었다.

 

그러다 때마침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게 되었다. 동 저자의 전작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밀접히 연관되면서 조금 더 확장된 생각들을 담고 있는데 현대 도시 사회가 가지는 많은 특징들, 익명성과 SNS의 도래, 사물 인터넷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회 현상들과 지금껏 있었던 도시의 흥망성쇠 등을 건축의 관점, 나아가 공간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요즘 나도 좋아하는 익선동이나 망원동이 왜 거대한 멀티플렉스를 제치고 소위 말하는 핫 플레이스가 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그곳에서 느끼고 있던 편안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쉽지만 새롭게 돌아볼 수 있었고, 내가 늘 지내오던 공간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었다.

 

내가 일했던 공간에서는 교수도 의사도 간호사도 심지어 환자마저도 모두들 다 날이 서 있었다. 물론 건강과 생사를 다루고 있는 공간이라는 특수한 점도 있지만 촌각의 단위로 쫓기며 일해야 하는 데다,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주어진 필수의 공간 속에서 그 쏟아지는 일과를 견뎌야 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양계장처럼 빼곡하고 겹겹이 쌓인 도서실 책상에서 종일 근거문서와 씨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환자를 만나고 보호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환자는 자기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침대와 그 옆에 놓인 간이 보호자 침대에서 삭막한 IV 폴대를 보며 하루를 지냈다. 간호사는 그 침대 사이 사이를 꽉 막는 널싱카트를 밀며 라운딩을 다니고, 교수는 컨테이너 박스 같은  창문 하나 없는 네모난 공간에 외래 직원과 단 둘이 놓여서 오전 3시간에만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 진단을 찍어냈다. 이런 공간 속에서 일하다 보면 타인에게 무신경해진 나 자신에게 놀라고, 별 것 아닌 일에도 버럭 화를 내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했는데 그들도 나 같아서 안쓰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화를 내는 그 모습이 정당화 되지는 않더라도.

 

조금 더 화목할 수 있는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저자의 마무리가 피상적으로 제시되고 구체적인 방법은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아쉬웠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내가 놓여있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도 좀 더 인간다운 공간에서 일하고, 살고싶다는 욕망을 키우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공간에 대한 생각은 계속 살아가며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야하는 나와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것은 아닐까.

 

지금의 디지털 유목민 같은 삶이 유전적으로는 더욱 맞는 삶의 형태인지도 모른다. 가까운 미래에는 굳이 비싼 동네에 집을 소유하기보다는 그 공간을 잠깐 경험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소유보다는 그냥 인스타그램 사진을 많이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경험을 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어쩌면 한 집에서 몇 년 씩 사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삶의 형태일지도 모른다.(p.113)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말이 참 씁쓸한 위로가 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여러 매체에서 우스갯 소리로 경기도민은 인생의 1/3 정도를 대중 교통 안에서 보낸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저자는 SNS 시대에 새로운 개념으로 '디지털 유목민'을 논했겠지만 우리는 어쩌면 현실에서도 다시 유목민이 되고 있는 지 모른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구하면서 서울에 본가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많았다. 한 공간에서 얼마 살지 않고 이사를 가야할 때가 그랬고, 퇴근해서 집 다운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 때가 그랬다. 어느 날 직장 주변에 아파트를 지나면서 저 집을 사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일을 해야할까 문득 생각을 해보다 현실적인 계산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25년동안 꼬박 내가 받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는 금액 이더라. 소위 말하는 요즘 세대는 여러 가지를 포기하는 대신에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비를 한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눈 앞의 욕망을 좇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퇴근길에 서울의 한 아파트를 바라보며 치밀한 계산을 해 본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내린 체념적인 결론일지도 모른다. 디지털 유목은 현실의 유목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요즘 세대들의 자조섞인 희망은 아닐까.

 

지구라트에서는 가장 높은 곳의 정점에 신전을 두고 그곳에 제사장이 위치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이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반면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시선 집중을 받는 무대가 객석보다 아래에 위치한다. 이로써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무대로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지만 동시에 내려다보면서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건축에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권력을 가지는 자의 시선이다. 따라서 원형극장에서는 평면상으로는 무대 위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고 단면상으로는 관객이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관객과 배우, 이 둘은 서로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이로써 객석과 무대에 있는 사람 사이의 균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왕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일반 국민도 언제든지 시선 집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고 평등한 권력의 공간구조를 제공하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그리스 민주주의 사회를 완성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p.206)

 

이 책에서 제일 재밌는 부분이었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SNS인 인스타그램이나 유투브 채널을 개설하는 것도 결국은 현대판 디오니 소스 극장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물리적인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려다보기와 내려다보기의 전복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많은 팔로워와 구독자 수로 그 사람의 위상이 높아지고, 또 흐름을 잘 타면 누구든 그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즘처럼 소통이 강조되는 시대에 새로운 소통의 방식이자 현 시대에 맞는 민주주의가 아닐런지.

 

SNS는 단순히 소식을 올리는 곳이 아니다. 사무실 책상에 사진을 붙이고 화분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 책상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듯이, 땅 값을 낼 필요 없는 사이버 공간에 휴대폰 카메라만으로도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사는 집을 아예 공개적으로 보여 줄 수 없었지만, 직므은 SNS를 통해서 오히려 내가 살고 경험한 공간을 보여 주고 싶은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 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나의 공간이며 더 나아가 '나' 자체다. 향후 블록체인이 상용화되면 우리 공간에 또 한번 변화의 파도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2의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도 나올 것이다. 우리는 향후에도 점점 더 많이 정보화된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세계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p.325)

 

어떤 공간이든 물리적인 의미에서는 아니더라도 '편집'을 통해 '나의 공간', '사적 공간', 더 나아가 '나'를 구성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잘 모르겠다. 필터를 씌우고 편집을 해서 나의 공간을 채우다가도 다른 누군가의 찬란한 공간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지? 하며 부러워하는 마음이 불쑥 들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건, 맛집을 가건 어디에서도 사진을 찍는 모습은 일상이 되었다. 핸드폰 카메라가 일반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좋은 화질을 갖게된 지 채 몇년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그 어떤 기록보다도 소중한 기록 장치가 되었다. 가끔 어차피 내가 이렇게 찍어도 더 잘찍는 사람들, 이미 잘 찍힌 사진이 있는데 굳이 이 사진을 왜 찍는 걸까, 저 사람들은 왜 사진을 찍을까, 나도 찍으면서도 궁금할 때가 있었는데, 타인이 잘 찍은 좋은 구도의 사진보다도 엉터리 구도와 엉망으로 '내'가 찍은 사진이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그곳을, 그것을 향유했음을 증명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는 '디지털 유목민'과 연결되는 생각이기도 하다. 

 

저자는 기술의 발달과 정보화 사회의 융합으로 공간의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고, 기존의 건축과 공간이 실재하는 공간에 대한 변형이었다면 이제는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 대한 생산이, 창조가 이루어지는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양극화로 인해 가고 싶어도 혹은 살고 싶어도 실재로 가 닿을 수 없다고 느끼는 우리 세대의 절망감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면 '핫 플레이스'에 발 도장을 찍고 그 곳에 있었던 나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으로 가까스로 그 곳을 즐기기라도 하자는 의지.

 

영화 '레디플레이어원'을 보면서 요즘 1인 가구가 살고 있는 원룸 보다도 더 좁은 고층의 건물에서 모두가 VR 게임기를 쓰고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실재하는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 때문에 영화의 첫 장면이 너무 무서웠는데, 그 무서움은 저 화면의 일들이 영화가 아니라 곧 실제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 십년 뒤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VR에서 깨어 나왔을 때에 나는 실제하는 공간에서 나의 실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저자가 남겼던 지금의 '어떻게 하면 좀 더 화목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1. p.113

지금의 디지털 유목민 같은 삶이 유전적으로는 더욱 맞는 삶의 형태인지도 모른다. 가까운 미래에는 굳이 비싼 동네에 집을 소유하기보다는 그 공간을 잠깐 경험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소유보다는 그냥 인스타그램 사진을 많이 남긴느 것이 더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경험을 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어쩌면 한 집에서 몇 년 씩 사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삶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2. p.206

지구라트에서는 가장 높은 곳의 정점에 신전을 두고 그곳에 제사장이 위치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이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반면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시선 집중을 받는 무대가 객석보다 아래에 위치한다. 이로써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무대로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지만 동시에 내려다보면서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건축에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권력을 가지는 자의 시선이다. 따라서 원형극장에서는 평면상으로는 무대 위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고 단면상으로는 관객이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관객과 배우, 이 둘은 서로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이로써 객석과 무대에 있는 사람 사이의 균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왕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일반 국민도 언제든지 시선 집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고 평등한 권력의 공간구조를 제공하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그리스 민주주의 사회를 완성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3.p.325

SNS는 단순히 소식을 올리는 곳이 아니다. 사무실 책상에 사진을 붙이고 화분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 책상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듯이, 땅 값을 낼 필요 없는 사이버 공간에 휴대폰 카메라만으로도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사는 집을 아예 공개적으로 보여 줄 수 없었지만, 직므은 SNS를 통해서 오히려 내가 살고 경험한 공간을 보여 주고 싶은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 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나의 공간이며 더 나아가 ‘나‘ 자체다. 향후 블록체인이 상용화되면 우리 공간에 또 한번 변화의 파도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2의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도 나올 것이다. 우리는 향후에도 점점 더 많이 정보화된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세계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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