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은 충분근거율에 의해 의식 작용에 주어진 것에 대한 앎만을 획득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의 세계, 즉,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세계가 ‘표상’으로 드러난다. 이 인식을 '의식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 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것으로서의 의지가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모든 힘'이라고
표현했다. 식물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힘이나 수정 같은 광물이 결정을 만드는 힘, 중력의 작용, 이 모두가 의지인 것이다. 따라서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인 원리로 소화, 분비, 성장 등 생명체의 모든 것이 목적 없는 맹목적인 의지의 움직임이다.
인간은 이 의지의 작용을 직관할 수 있다. 의지가 가장
고차원적으로 객관화 된 것이 이념이고, 그 다음 단계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념을 직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은(좋은 옷, 좋은 집) 이념을
파악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의문을 가지고 그것이 왜 그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자
하는 인간만이 개별 사물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는 최고 단계의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순수한 인식 주관은
동양의 '무아'와 같은데,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까지 의지에 영향 받지 않을 때 이념을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고’가 강할수록 우리는 쉽게 상처받는다. 고통은 타자가 불러 일으킨 듯 하지만, 실은 나의 ‘에고’가 불러 일으킨 고통이라고 쇼펜하우어는 강조한다.
인간은 고통 없이 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저는 절대로 화장실은
가고 싶지 않아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격은 의지의
구현이기 때문에 성격을 고친다는 것은 의지의 경향성을 조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장점, 단점)에 대해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의 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괴로운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다.
따라서 ‘나’라는 개체성과 인칭성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늘 나 자신을 ‘비인칭
주어’로 놓는 훈련을 하라고 이야기 한다. 단순히 나를 3인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it’의 용법처럼 나를 녹여 자연 속으로
흘려 보내라는 것일 것이다. 비인칭 주어는 날씨나 자연 묘사에서 쓰이는 문법적 특성이 있는데, 즉 나의 육신에 갇혀 사는 생에 ‘에고’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단단한 ‘에고’를
때로는 부드럽게 흘려 보내는 일을 반복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념의 인식 방법의 하나로 '예술'이 있다. 예술은 사물의 고유한 내적 본질에로 침잠해 가는 행위인데, 따라서 이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읽어내기에는 사실 어려움이 많아서 아쉬움이
많은 글을 쓸 수 밖에 없지만, 앞으로 읽어나갈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