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푸가 -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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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別辭)

 

어차피 당신이 끝내지 않았다면, 아닌 걸 알면서도 나는 못 끝냈을 것을 알기에

지금은 당신에게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은 정말 끝일까 의심하던 제게, 이제는 정말 끝났다고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던 당신으로부터 끝을 실감하던 그 순간에 나의 한 구석이 뚫린 듯 멍하게 공허했던 그 감각은

아직도 너무나 선명합니다.

 

그 때 나는 지하철이었고, 미친 사람처럼 당신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어요.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당신이라도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내게 끝끝내 이별을 말하던 당신이 참으로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 진실로 잔인했던 사람은 '나'였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끝까지 내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도 내 감정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럼으로써 당신이 나에게서 멀어지고, 당신 안에 만들어진 나 조차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만들었어요.

 

그 때의 당신도 그대 안에서 낯설어진 내가 두려웠을 텐데,

그 때의 힘들었을 당신을 생각하게 된 것이 그 때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라는 사실이,

우리가 끝을 만날 수 밖에 없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얼마전 불현듯 스치는 그 계절의 냄새를 타고

나도 모르게 그 때의 당신을 불쑥 떠올렸습니다.

 

선명하게 아픈 감각 사이로 같이 있던 시간의 온전함이 스며서

일 순간 나는 따뜻했습니다.

 

그런데,

당신 안에 있던 나 마저도 당신으로부터 내가 끌고 나와

내 안의 추억으로 당겨온 것만 같아서

당신에게는 나와 만났던 그 시간이 통째로 부재의 시간이 되어버렸을 까봐

나는 또 슬펐습니다.

 

그 순간, 여전히 온통 당신에게 기억될 '나'에 대한 생각만 하는 나를 들여다보며

끝내 나는 우리의 관계 속에서 '나'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그런 나에게서 부끄러움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와 진심으로 헤어질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엉겨있던 시간의 응어리 속에서 헤어나와서

그 때의 당신과,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마주 볼 수 있게 되었거든요.

 

 

"부재의 힘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것 때문에, 오로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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