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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평점 :
내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고 이 곳 저 곳 움직임이 많은 일을 하다가 어제 해두고 그대로 있는, 내 자리가 생긴 공간으로 출근하는 일을 시작하니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자연히 많아졌다. 서울 살이를 시작하고 신림동에서 사당동으로, 연건동에서 다시 신림동으로, 그리고 풍납동에서 성동구까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거의 1년에 한 번 꼴로, 혹은 그 보다 더 자주 이사를 다니다 보니 갖게된 '나의 공간'에 대한 생각과도 겹치는 관심이었다.
그러다 때마침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게 되었다. 동 저자의 전작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밀접히 연관되면서 조금 더 확장된 생각들을 담고 있는데 현대 도시 사회가 가지는 많은 특징들, 익명성과 SNS의 도래, 사물 인터넷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회 현상들과 지금껏 있었던 도시의 흥망성쇠 등을 건축의 관점, 나아가 공간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요즘 나도 좋아하는 익선동이나 망원동이 왜 거대한 멀티플렉스를 제치고 소위 말하는 핫 플레이스가 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그곳에서 느끼고 있던 편안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쉽지만 새롭게 돌아볼 수 있었고, 내가 늘 지내오던 공간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었다.
내가 일했던 공간에서는 교수도 의사도 간호사도 심지어 환자마저도 모두들 다 날이 서 있었다. 물론 건강과 생사를 다루고 있는 공간이라는 특수한 점도 있지만 촌각의 단위로 쫓기며 일해야 하는 데다,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주어진 필수의 공간 속에서 그 쏟아지는 일과를 견뎌야 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양계장처럼 빼곡하고 겹겹이 쌓인 도서실 책상에서 종일 근거문서와 씨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환자를 만나고 보호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환자는 자기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침대와 그 옆에 놓인 간이 보호자 침대에서 삭막한 IV 폴대를 보며 하루를 지냈다. 간호사는 그 침대 사이 사이를 꽉 막는 널싱카트를 밀며 라운딩을 다니고, 교수는 컨테이너 박스 같은 창문 하나 없는 네모난 공간에 외래 직원과 단 둘이 놓여서 오전 3시간에만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 진단을 찍어냈다. 이런 공간 속에서 일하다 보면 타인에게 무신경해진 나 자신에게 놀라고, 별 것 아닌 일에도 버럭 화를 내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했는데 그들도 나 같아서 안쓰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화를 내는 그 모습이 정당화 되지는 않더라도.
조금 더 화목할 수 있는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저자의 마무리가 피상적으로 제시되고 구체적인 방법은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아쉬웠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내가 놓여있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도 좀 더 인간다운 공간에서 일하고, 살고싶다는 욕망을 키우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공간에 대한 생각은 계속 살아가며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야하는 나와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것은 아닐까.
지금의 디지털 유목민 같은 삶이 유전적으로는 더욱 맞는 삶의 형태인지도 모른다. 가까운 미래에는 굳이 비싼 동네에 집을 소유하기보다는 그 공간을 잠깐 경험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소유보다는 그냥 인스타그램 사진을 많이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경험을 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어쩌면 한 집에서 몇 년 씩 사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삶의 형태일지도 모른다.(p.113)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말이 참 씁쓸한 위로가 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여러 매체에서 우스갯 소리로 경기도민은 인생의 1/3 정도를 대중 교통 안에서 보낸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저자는 SNS 시대에 새로운 개념으로 '디지털 유목민'을 논했겠지만 우리는 어쩌면 현실에서도 다시 유목민이 되고 있는 지 모른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구하면서 서울에 본가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많았다. 한 공간에서 얼마 살지 않고 이사를 가야할 때가 그랬고, 퇴근해서 집 다운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 때가 그랬다. 어느 날 직장 주변에 아파트를 지나면서 저 집을 사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일을 해야할까 문득 생각을 해보다 현실적인 계산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25년동안 꼬박 내가 받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는 금액 이더라. 소위 말하는 요즘 세대는 여러 가지를 포기하는 대신에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비를 한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눈 앞의 욕망을 좇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퇴근길에 서울의 한 아파트를 바라보며 치밀한 계산을 해 본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내린 체념적인 결론일지도 모른다. 디지털 유목은 현실의 유목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요즘 세대들의 자조섞인 희망은 아닐까.
지구라트에서는 가장 높은 곳의 정점에 신전을 두고 그곳에 제사장이 위치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이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반면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시선 집중을 받는 무대가 객석보다 아래에 위치한다. 이로써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무대로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지만 동시에 내려다보면서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건축에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권력을 가지는 자의 시선이다. 따라서 원형극장에서는 평면상으로는 무대 위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고 단면상으로는 관객이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관객과 배우, 이 둘은 서로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이로써 객석과 무대에 있는 사람 사이의 균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왕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일반 국민도 언제든지 시선 집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고 평등한 권력의 공간구조를 제공하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그리스 민주주의 사회를 완성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p.206)
이 책에서 제일 재밌는 부분이었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SNS인 인스타그램이나 유투브 채널을 개설하는 것도 결국은 현대판 디오니 소스 극장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물리적인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려다보기와 내려다보기의 전복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많은 팔로워와 구독자 수로 그 사람의 위상이 높아지고, 또 흐름을 잘 타면 누구든 그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즘처럼 소통이 강조되는 시대에 새로운 소통의 방식이자 현 시대에 맞는 민주주의가 아닐런지.
SNS는 단순히 소식을 올리는 곳이 아니다. 사무실 책상에 사진을 붙이고 화분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 책상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듯이, 땅 값을 낼 필요 없는 사이버 공간에 휴대폰 카메라만으로도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사는 집을 아예 공개적으로 보여 줄 수 없었지만, 직므은 SNS를 통해서 오히려 내가 살고 경험한 공간을 보여 주고 싶은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 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나의 공간이며 더 나아가 '나' 자체다. 향후 블록체인이 상용화되면 우리 공간에 또 한번 변화의 파도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2의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도 나올 것이다. 우리는 향후에도 점점 더 많이 정보화된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세계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p.325)
어떤 공간이든 물리적인 의미에서는 아니더라도 '편집'을 통해 '나의 공간', '사적 공간', 더 나아가 '나'를 구성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잘 모르겠다. 필터를 씌우고 편집을 해서 나의 공간을 채우다가도 다른 누군가의 찬란한 공간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지? 하며 부러워하는 마음이 불쑥 들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건, 맛집을 가건 어디에서도 사진을 찍는 모습은 일상이 되었다. 핸드폰 카메라가 일반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좋은 화질을 갖게된 지 채 몇년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그 어떤 기록보다도 소중한 기록 장치가 되었다. 가끔 어차피 내가 이렇게 찍어도 더 잘찍는 사람들, 이미 잘 찍힌 사진이 있는데 굳이 이 사진을 왜 찍는 걸까, 저 사람들은 왜 사진을 찍을까, 나도 찍으면서도 궁금할 때가 있었는데, 타인이 잘 찍은 좋은 구도의 사진보다도 엉터리 구도와 엉망으로 '내'가 찍은 사진이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그곳을, 그것을 향유했음을 증명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는 '디지털 유목민'과 연결되는 생각이기도 하다.
저자는 기술의 발달과 정보화 사회의 융합으로 공간의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고, 기존의 건축과 공간이 실재하는 공간에 대한 변형이었다면 이제는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 대한 생산이, 창조가 이루어지는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양극화로 인해 가고 싶어도 혹은 살고 싶어도 실재로 가 닿을 수 없다고 느끼는 우리 세대의 절망감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면 '핫 플레이스'에 발 도장을 찍고 그 곳에 있었던 나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으로 가까스로 그 곳을 즐기기라도 하자는 의지.
영화 '레디플레이어원'을 보면서 요즘 1인 가구가 살고 있는 원룸 보다도 더 좁은 고층의 건물에서 모두가 VR 게임기를 쓰고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실재하는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 때문에 영화의 첫 장면이 너무 무서웠는데, 그 무서움은 저 화면의 일들이 영화가 아니라 곧 실제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 십년 뒤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VR에서 깨어 나왔을 때에 나는 실제하는 공간에서 나의 실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저자가 남겼던 지금의 '어떻게 하면 좀 더 화목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1. p.113
지금의 디지털 유목민 같은 삶이 유전적으로는 더욱 맞는 삶의 형태인지도 모른다. 가까운 미래에는 굳이 비싼 동네에 집을 소유하기보다는 그 공간을 잠깐 경험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소유보다는 그냥 인스타그램 사진을 많이 남긴느 것이 더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경험을 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어쩌면 한 집에서 몇 년 씩 사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삶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2. p.206
지구라트에서는 가장 높은 곳의 정점에 신전을 두고 그곳에 제사장이 위치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이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반면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시선 집중을 받는 무대가 객석보다 아래에 위치한다. 이로써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무대로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지만 동시에 내려다보면서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건축에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권력을 가지는 자의 시선이다. 따라서 원형극장에서는 평면상으로는 무대 위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고 단면상으로는 관객이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관객과 배우, 이 둘은 서로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이로써 객석과 무대에 있는 사람 사이의 균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왕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일반 국민도 언제든지 시선 집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고 평등한 권력의 공간구조를 제공하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그리스 민주주의 사회를 완성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3.p.325
SNS는 단순히 소식을 올리는 곳이 아니다. 사무실 책상에 사진을 붙이고 화분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 책상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듯이, 땅 값을 낼 필요 없는 사이버 공간에 휴대폰 카메라만으로도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사는 집을 아예 공개적으로 보여 줄 수 없었지만, 직므은 SNS를 통해서 오히려 내가 살고 경험한 공간을 보여 주고 싶은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 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나의 공간이며 더 나아가 ‘나‘ 자체다. 향후 블록체인이 상용화되면 우리 공간에 또 한번 변화의 파도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2의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도 나올 것이다. 우리는 향후에도 점점 더 많이 정보화된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세계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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