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가 여름 방학 동안 출판사로 실습을 나가고 있다.
며칠 전에는 파주 출판 단지에서 반품된 책들을 정리한다고 편한 옷을 입고 간다고 했다.
육체노동으로 힘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그런데 책상 위에 못 보던 책들이 놓여있었다.
그동안 서로 바쁜 일정으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책상 위에 올려 놓인 책들은 파본으로 판매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유독 한 권의 두꺼운 책이 잔상으로 남았다.
긴 머리의 여자 얼굴이 그려진 책. <나스타샤> 우리 말도 아닌 동구의 언어 같은 느낌.
그렇게 며칠을 방치해 놓았는데 이상하게 끌렸다. 내용이 궁금했다.
그런 궁금증으로 시작된 이 책과의 인연.
우선 네이버에서 <나스타샤>를 검색해 보았다.
별점이 높은 거에 비해 리뷰어들은 많지 않았다. 구판이 90명, 개정판이 30명.
대충 추리해보면 출판사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책을 읽은 20~30명
그리고 나머지는 찾아서 읽은 독자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도서 이벤트 한 냄새가 너무 많이 풍겼다.
어느 한 시점에 많은 리뷰어들이 몰리고 그들의 평점이 한결같이 높았다.
- 간단 줄거리 -
주인공 조지는 캐나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에서 유학 후에 귀국을 원했지만
그를 맞이하는 직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찾아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캐나다의 작은 마을 웰드릭은 이민자들이 많은 곳으로, 여러 민족들이 섞여사는 곳이다.
조지는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에 대학교수라는 직업으로 어렵지 않게
그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었다.
그에게는 같은 대학에서 수리철학 교수인 그렉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와는 직장, 직업이 같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낚시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렉의 동양인 아내 베시와 함께 주말이면 연어와 송어 낚시로 호수를 누비었다.
그렉의 아내 베시가 임신을 하면서 낚시를 같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집필할 책의 주제도 생각하고 머리도 식힐 겸 낚시를 준비하며 산장으로 떠난다.
네덜란드 이민자의 아들인 케빈이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저녁을 때울 생각으로
그의 가게를 들른다. 늘 있어야 하는 케빈은 보이지 않고 낯선 여자가 대신 있었다.
케빈의 소재를 묻지만 그녀는 거친 러시아 발음으로 '나는 영어를 못해요'라고 답한다.
그녀와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때는 한국에서 88올림픽이 열리고 소련이 붕괴되기 전이다.
그녀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이었다. 영어도 서툴고 서방에 대한 경계심과
소련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이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조지는 보물 다루듯 그녀를 살피고 그녀가 갖고 있는 마음과 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점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작가 <조지수> 많이 들어 본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많은 작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나의 소설책 선택에는 까다로움이 있다.
익숙함이 주는 전개의 편안함이 있다. 그냥 꺼릴 것 없이 적혀있는 대로 읽으면 되었다.
그러나 낯선 작가의 책은 긴장을 동반한다. 익숙하지 않은 필치와 알 수 없는 작가의 특성에
글의 깊이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익숙한 작가의 글이 편하다.
사람의 인성만큼 작가의 글에도 나름의 개성이 있다.
작가 <조지수>.
당연히 여자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름이 주는 느낌 그리고 본명 대신 필명을 많이 쓴다는 얘기들.
주인공 나는 남자였다. 여자 작가가 남자를 주인공 나로 설정하여 쓰는 글도 많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분명 필치나 정서는 여자인데 고집스럽게 남자라고 우긴다는 억지가 느껴졌다.
어느 순간 작가가 남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논리의 정연함이었다. 책에서는 미술 그리고 음악과 유럽 역사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 전개가 유여했다. 그리고 얘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굳이 깊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이
그가 설명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잠깐 생각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감하게 된다.
200페이지가 넘어야 비로소 사랑 얘기가 시작된다는 어느 리뷰의 글을 읽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 얘기가 궁금하지 않고
작가가 설명해주는 미술, 음악, 역사, 민족성 등이 더 재미있었다.
그 설명이 길거나 어려운 표현과 단어로 머리를 복잡하게 하지 않았다.
독자의 숨결을 고려한 문장의 간결함이 있다. 놀랬다.
가끔 어려운 역사서나 철학서를 읽으면 한글로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를 때가 많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이 이 사람 문장력이 없구나 또는 정말 알고 쓰는 것일까?
마지막에 드는 생각 어렵게 꼬아 놓으면 잘난 줄 아나?
이 책은 신기했다. 내용이 지루하지 않았다.
연애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을 미술사, 음악, 역사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재미나게 쓸 수 있는데 왜 다들 어렵게 글을 쓸까 싶었다.
쉬운 글이 좋은 책인데......
조지와 나스타샤의 사랑이 너무 아름다웠다.
조지의 나스타샤에 대한 헌신적 사랑 그리고 나스타샤의 조지에 대한 감사의 사랑.
눈처럼 맑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지적인 낭만적인 사랑.
미술을 이야기하고 음악을 얘기하며 교감할 수 있는 사랑.
그녀의 현재와 아픈 과거까지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을 보는 사랑. 그리고 그녀의 사랑을 위해 한 발 물러나는
그것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지만.....
여자들은 그리고 가끔 매체에서 나오는 말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고 모순이고 겁쟁이들의 변명이라고.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도피일 수도 있고 용기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떠나야 상대가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떠나는 것이다.
해방감을 느끼며 자신의 행복을 우선으로 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상대를 위해서.
조지가 멋졌다. 그의 고통과 용기에 찬사를 보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나스타샤라는 여인의 등장과 그리고 퇴장에서 오는 것은
연속성과 영속성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빨리 끝내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앞의 연속이다.
끝남은 아쉬움도 아니고 후련함도 아닌 것이다.
인위적인 끝과 시작만 있을 뿐 실상은 연속인 것이다.
어제를 보낸 오늘, 오늘이 지난 내일 그리고 내일이 떠난 그다음 날,
내가, 세상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되는 것일까? 지난날들의 이어짐이다.
이어짐과 연속성을 부정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설이 주는 재미는 억지로 뭐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는 하고 싶은 얘기를 소설이라는 쟝르를 이용하지만
느끼고 배우는 것은 오로지 독자 몫이다.
자기 계발서는 읽으면 엄청나게 많은 감동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읽었음에도 깨달음이 없고 변화가 없으면 독자는 나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소설은 그런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다.
그냥 내가 느끼는 것이 느낌이다.
이 소설은 솔직히 두껍다.
그런데 여러 단락으로 나눠있어 그나마 읽기 수월하다.
한 단락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 단락들이 모여 하나의 줄거리가 된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지식의 보고였다.
그리고 말을 꼬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가 쉽다.
만약에 캐나다를 여행해 봤으면 더 재미났을 것 같다.
캐나다에 가고 싶고 살아 보고 싶기도 하다.
폭설과 살인적인 한파로 오돌오돌 떠는 주인공을 상상하며
폭염과 살인적인 더위를 잠시 잊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여하튼 재미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