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리석음의 미학 - 도스또예프스끼의 간질병과 예술혼
김진국 지음 / 시간여행 / 2017년 10월
평점 :
<어리석음의 미학이 던지는 희망의 돌멩이>
하다하다 이제 “어리석음의 미학”까지 등장하는구나 싶었다.흥미를 돋우기 위한 제목인 뿐일 것일까,아니면 삶을 관조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한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원래 미학이란 것이 미와 예술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학문이라 정의하고 있는데,선뜻 어리석음과 미학이라는 용어가 어울리지 않아,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간략하게 소개되기로는 천재 작가였던 도스또예프스끼의 눈으로 근현대의 병리현상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이 또한 밑도 끝도 없는 말처럼 다가왔다.그건 아마도 문명이 닿는 곳에 있다면 누구나 들었을 법한 대문호의 저서를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데서 오는 무지의 소치,경험의 미흡이리라.
도스또예프스끼의 간질병을 화두로 삼아 시작되는 어리석음의 미학이라는 것은 사뭇 낯설고,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았다.신경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병리학적으로 열거하여 다양한 군상으로서 소개하고 있다.
작가의 소개를 통해 간질병 종합서라 할만큼 다양하게 제시되는 간질병자 인물들을 접하고,다시 도스또예프스끼를 생각하면 <죄와 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의 작품이 주는 광대한 기대감들이 비웃음 당하는 느낌을 받고야 만다.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에 대한 평범한 기대를 힐난하는 것 같기도 하다.읽을수록 무엇을 기대해야하는 것인가 아리송해지기도 한다.
과학과 이성이 신비주의와 영적인 것을 밀어내고 제 위상을 획득하려고 했던 19세기의 뻬쩨르부르그를 지난하게 써내려갔던 작가의 집요함이 진저리쳐지기도 한다.
작중 인물들의 육체와 정신의 미약함,즉 어리석음을 중심으로 현대를 재해석하여 읽어야하나,육체와 정신이 미약했던 러시아의 대문호를 중심으로 현대를 재해석해야하나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의 작가는,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이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우리를 설득할까 의심하며 질문하며,때론 동의하며 읽어야했다.
과학과 이성의 발달이 모든 사회적 시스템을 관료화하여,신에게 복종하였던 인간을 기계화된 시스템에 절대복종하게 했다는 작가의 일침이 와닿았다.그래,이 고리의 시작을 정확히 진단할 필요가 있구나 싶다.그러자 작가의 이야기들이 좀더 쉽게 눈에 들어온다.
21세기 한국은 병든 시대로 병든 이방인들이 가득하다.불안과 공포,우울과 불신이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에게 언제든지 광포하게 실체를 드러낼 태세를 갖추고 있다.조금만 건드려도 화가 나고,자잘하게 시작된 다툼은 이내 상대방을 잡아 먹을듯한 기세를 이루어낸다.그 옛날 한동네 주민으로서 가졌던 서로에 대한 책임과 연대는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시대이기도 하다.
닭장 같은 아파트 내부로 아침·저녁 일정한 시간에 훅 끼쳐 오는 담배연기테러,늦은 밤에도 쿵쾅거리는 옆집과 윗집의 소음에 대해서 우리는 더 이상 쉽게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나의 한 마디가, 한 마디가 어떤 광적인 모습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한국 사회의 병폐를 하나하나 열거한다.2015년에 있었던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에서 정부가 삼성병원을 감싸던 일,병원의 책임자는 오랜 국민의 원성 끝에 등떠밀기 식으로 겨우 사과하는 모습,그럴 수 있는 베짱이 입법·사법·행정·언론계에 거나하게 연결되어 있는 연줄 때문이었다는 절망적인 사회,서울 어느 한 지하철역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여성의 일,중대한 죄를 짓고도 감형 받는 재벌가와 가진 몇 푼을 내어놓고 온 가족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양심적인 소시민들의 슬픈 최후······.
일일이 열거하자면 수도 없을 이 절망적 현실은 21세기의 한 국면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도스또예프스끼가 그려내는 뻬쩨르부르그의 뒷골목에서 현대 못지 않은 음울한 모습으로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작은 전세계의 근대화 과정과 유사하며,백인우월주의와 식민지 지배 논리가 견고하게 직조한 유럽화에 대한 선망 때문이었다.일본이 그러했고,한국이 그러했으며,러시아가 그러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런 급진적인 외형의 변화 추구가 소시민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줄곧 얘기하며, <어리석음의 미학>을 쓴 저자는 더욱 짙은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다.급진적인 근대화는 강제동원과 폭력으로 점철되며 노동자와 농민,전쟁 포로,죄수들의 눈물과 시체를 딛고 서게 된다.이성과 과학이 신봉되고 신의 존재가 부정·위협되면서 서구파와 러시아파가 첨예한 대립을 하고 혼돈과 무질서의 시대,전통의 가치관과 규범이 붕괴되어 질서를 구축할 구심력이 상실된 시대가 온 것이라고 작가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통해 역설한다.
그 구심력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듯 하다.가정이 해체되고 가족 질서가 붕괴되며 세대간의 단절이 극심해진 현재의 우리는 개인주의의 미명이 만들어낸 간편함과 자유로움에 속아 우리의 평화와 기쁨을 저당 잡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의 끝없는 무례함을 지적했고 그에 따른 인간의 불운한 운명을 예고했었는데,거리와 시간을 줄여주는 자동차와 간택을 기다리며 욕망을 부추기는 백화점 및 대형마트의 상품들,깔끔하고 편리한 아파트 생활을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삶 자체를 일종의 고행처럼 숙명처럼 살았던 유로지비들의 삶과 대조해 보게 한다.
결국 작가는 소냐와 알료사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의 치욕과 수치를 거룩함이라는 반열에 올려,예리한 지성과 이성으로 현실을 재빠르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사실은 우둔해 보이는 이들의 생을 오히려 갉아먹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학식이 풍부하거나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으나 무소처럼 우직하게 자식을 위해 살아냈던 내 어머니,우리의 부모들의 삶,그리고 내안에도 있을 자식을 향한 바보 같은 사랑과 열심이 사실은 흔들리는 사회를 구축할 구심력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려운 가르침이고,쉽지 않은 도전이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려 한다.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내 가족의 전통과 문화,연대를 이루어가는 일을 중시하며,나아가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실천해보는 것이다.좀 더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는 것이다.바보같이 오히려 당하게 되더라도 말이다.불안과 혼돈의 현대를 출렁이게 할 어리석음의 돌멩이를 던져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