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질문은 없었다. 나는 선생님이 더 묻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내가 학원을 그만둘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 P8

나를 ‘배려‘하면서 자의식을 공고히 하려는 사람들을 마주하면 짜증이 났다. 배려받을 사람과 배려받지 못할 사람을 구분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들. 나를 싫어하는 순간, 그들은 생존자를 싫어하는, 고작 그런 사람이 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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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매점 블라인드 설렘 독서모임 2월의 또다른 책, 카사바칩. 먼저 읽은 2월 설렘 책 <봄이 오면 녹는>을 완독했을때만 해도 여운이 너무 짙어, 카사바칩을 사랑하게 되리라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세상에. 지치지도 않고 자기 세계에 사는 사람들. 눈물날 정도로 답답한 사람들. 이 어처구니없으며 한편으로는 부러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침 이 책을 읽던 때엔 입원중이었다. 입원중 어두운 책을 읽고 더 힘들었던 몇 번의 쓰린 경험이 있던지라, 이후 입원중에는 쉽고 따뜻한 책을 읽자는 나만의 원칙을 세웠었다. 카사바칩 앞 부분을 읽을 때만 해도 무거운 건 아닐까 (물론 그 때도 엄마 미선과 주인공의 똘끼는 분명히 드러나 있었지만)했는데, 이 책은 눅눅한 카사바칩이 아닌 바삭한 카사바칩이었다! 최적으로 회복에 도움을 주는 책. 그렇다고 마냥 쉽다는 건 아니고 또 따뜻하진 않다. 이 깊음과 경쾌함의 콤보라니.

🍿사실 가족의 연쇄 파산이란 소재가 얼마나 무거운가. 아빠가 답답하고 너무하게도 엄마의 서류상 파산으로 다시 파산했다는 앞 부분에 이해가 되면서도 울컥했다. 그런데 엄마가 피해자라고 할 수 없는 게, 엄마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요, 딸에게 파산을 넘긴다. 물론 이미 대출을 할 수 없던 자신들의 상황이지만, 그쯤 되면 합리적인 길을 모색할만하지 않은가. 아,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딸내미는 철 없이 오늘만 대충 사는 느낌이랄까. 과거 아주 오랜 시간 하루 하루 힘겹게 악착같이 버티면서도 어떻게든 빠져나오고자 간 버리고 살아간 우리 가족이 생각나서일까. 왜 이리 이 가족들은 미성숙한건가 하며 복장터지며 읽었는데, 결국엔 이 가족 모두를 사랑하게 되다니. 하... 나, 진짜..

🍿 그리고 카사바인형.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위해, 가족을 위해 떠날 때 내가 두고 갈 수 있는 게 있을까? 아니 애초에 왜 떠나는 거야. 떠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건가. 그러면서도 나를 모르는 어딘가에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상반된 생각도 같이 든다. 혹시나 그러면 꼭 삶을 리셋할 수 있을지 모르는 막연한 믿음.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금, 여기‘가 많은 것을 내게 주었겠지. 레무는 태어난 곳이 인생의 많은 걸 결정한다는 사실에 무기력할 때가 있다고 한다. 이런 비슷한 말을 예전 어떤 강연에서도 들었다. 그러니 내가 잘나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만큼 성취했다는 말은 삼가야한다고. 그렇다, 삶은. 그러니 레무는 어떤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왔으며, 그럼에도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려 하는 걸까.

🍿 레무의 고향 같은, 아빠의 인쇄소 골목같은 나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이 세계에서 버티는 당신도, 또 다른 세계로 탈출 혹은 떠나는 또 다른 당신에게도 우리가 스치는 그 시간이 호의와 다정함으로 응원할 수 있기를. 서로가 남긴 좌표를 잘 찾아볼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아, 카사바칩은 온라인에서 구매 가능한 과자라고한다. 언제 바삭한 맛을 맛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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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페수스 출신 철학자 이후 수 세기가 흘러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단 한 가지 우월성만을 인정했다. 즉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지 않는 것. 수 세기를 이어오며 가장 모범적이었던 삶과 사상이 무지를 자부하는 고백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하면서 우리의 당당함도 망각했다. 우리는 위대함을 흉내 내는 권력을 택했다.
- P143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더러 어떤 사람이 아닌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에서는 그가 결론을 얻었기를 바란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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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는 안개의 비극성과는 다른 태양의 비극성을 지닌다. 어느 저녁 산발치 바닷가 작은 만의 완벽한 곡선 위로 밤이 깃들면, 최고조에 이른 불안이 고요한 바다에서 피어오른다. 그리스인들이 절망에 사로잡힌다면 그건 늘 아름다움과 그것이 지니는 숨 막히는 고통때문이라는 것을, 이런 장소에 오면 이해하게 된다. 이 황금빛 불행속에서 비극은 절정에 다다른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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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에 찬동하기 위한 이성도그 어떤 역사 철학도 믿지 않지만, 적어도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면서 부단히 발전해 왔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조건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순을 안고 있지만 모순을 거부해야 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 응당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의 임무란 자유로운 영혼들의 끝없는 불안을 가라앉힐 몇 가지 처방을 찾는 것이다. 
- P118

결박당한 영웅은 신들이 내린 천둥과 번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킨다. 그렇게 그는 그가 묶여있는 바위보다 단단하고, 그의 간을 쪼아먹는 독수리보다 인내심이 강하다. 우리에겐 이 오랜 끈질김이 신들에게 맞선 반항보다 더 의미 깊다. 어느 것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어느 것도 물리치지 않으려는 저 경탄스러운 의지가 인간의 고통스러운 마음과 세계의 봄을 늘 화해시켰고, 앞으로도 화해시킬 것이다.
- P128

아니다, 당신의 심장이 미지근하다면, 당신의 영혼이 초라한 짐승에 불과하다면 결단코, 가지 말기를! 다만 긍정과 부정, 정오와 자정,
반항과 사랑 사이에서 찢기는 고통을 아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바닷가의 모닥불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그곳엔 그들을 기다리는 불꽃이 있으니.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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