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10
노라 엘렌 그로스 지음, 박승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1.
얼마 전 우연히 서울시교육청의 공문을 보다가 교육청 슬로건이 눈에 띄었다. "모두가 수화로 인사할 수 있는 사회, 서울교육이 만듭니다." 사실 교육청에서 장애 관련 교육 정책을 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단순히 기존의 장애인권 교육의 차원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의 사회에서 같은 구성원으로써 살아가는 방식을 고민하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물론 계속해서 지켜봐야겠지만 그 변화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었다.

#2.
<마서즈 비니어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 사회보다 더 앞선 듯 보이는 모습을 그려낸다. 심지어 200년도 더 지난 19세기의 모습을 복원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를 가진 이들이 관계와 소통, 대화와 정보에서 배제되는 데 마서즈 비니어드 섬은 그렇지 않았다. 그곳은 장애인들에게 비장애인의 질서를 수용할 것을 강제하지 않았고, 사회가 장애인의 질서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농인과 건청인은 하나로 스며들었고, 완벽히 하나의 구성원이 되었다. '미래적인 과거'라는 역설적 표현이 떠오르는 이 섬의 모습은 우리가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어떻게 표용할 것인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3.
청각장애인이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 한계를 뚫고 비장애인의 세계에 진입한 이들에겐 찬사와 경외를 표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관심조차 없다. 하지만 비니어드 섬은 달랐다. 청각장애인이 납부하는 세금은 건청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득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청각장애인들의 결혼 비율 및 마을 활동 참여 경험도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장애인을 어쩔 수 없이 배제한다는 것이 한낱 핑계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놓는 기분이다. 이 세상에 '당연한',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없는 듯하다. 어쨌든 노력하면 길이 보인다. 그 문제가 100퍼센트 해결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방향의 전환은 가능하다. 21세기의 우리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해낸 19세기의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처럼 말이다.

-
* 한길사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서즈 비니어드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만약 한 지역 사회가 장애인들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한다면, 장애인들은 그 지역사회에 완전하고 유익한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P2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을 까는 여자들 - 환멸나는 세상을 뒤집을 ‘이대녀’들의 목소리
신민주.노서영.로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즘은 선거결과 분석만 하면 맨날 '이대남', '이대녀' 이야기를 한다. 성별에 따라 결과가 양분되었으니 그 부분에 흥미를 느끼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철저하게 흥미로움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정치인들은 항상 '청년'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청년은 극히 일부라 얼마나 될까 싶다. 하지만 슬픈 건 그런 그들의 주장에 '우리의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청년의 태도다. 사실 전까지는 청년 담론이 전혀 없었던 상태라 논의된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워하는 심정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일부만을 대변하는 청년담론에 무조건적으로 열광하며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흔히 말하는 '서울출신-대졸-중산층-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에 국한된 이 청년 담론이 모든 청년을 배반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당신은 그들이 말하는 '청년'에 포함될 수 있을것인가라고.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가는 이들이 있다. 정치의 최전선에서 '겉핥기식' 청년담론을 넘어선 '진짜' 청년담론을 만들어가는 여성 청년 정치인이다.



#2.

'판을 깐다'는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든다. 여성들, 그리고 청년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질서를 비판할 때마다 이런 얘기만 돌아온다. '지금은 살 만 하잖아, 그런 불평불만은 배부른 소리'라고. 먹고 살만 해졌으니 가만 있으라는 의미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그 말에 들이 받을 생각만 했다. 기존의 질서 안에서 이것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판을 까는 여자들>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굳이 그 질서 안에서 바꾸려 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는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판을 뒤엎어버리고, 거기서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일지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미 판을 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부채감도 생긴다. 나도 판을 까는 누군가의 여정에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3.

대선이 끝났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굳이 하고 싶진 않다. 이 아슬아슬한 박빙의 선거 속에서 다들 많은 것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지 못했다면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듣도보도 못한 선거 구도 속에서 합당이나 당명 변경 등의 기존 방식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판을 만들 수 있는 정치구조 개혁이이 이야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득표율이 의석수로 이어지는 국회의원 선거 제도, 더 길고 다양한 논의의 과정을 수반하는 대통령 결선투표제 등 새로운 제도의 필요성을 질문해야 할 때다. 혹자는 정치인의 더러움을 이야기하며, 왜 굳이 돈을 많이 들여 선거를 2번씩이나 하고 국회의원 의석수나 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더럽고 치사할 수 있다. 하지만 더럽고 치사하다고 해서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의석 수를 줄이는 게 아니라 300명의 의원이 모두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돈을 아끼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적합한' 대통령을 찾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자세여야 한다. 


-

*하니포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안정감은 소수만이 쟁취할 수 있는 한정된 재화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일일까? 누구에게나 안정감을 느끼며 살 권리가 있지 않나? - P1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지음 / 씨네21북스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김지현, 강은영, 이지은. 세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세 명 다 미술을 공부했고 여전히 관련된 분야에서 일을 한다. 지현은 일러스트레이터로, 은영은 시간강사로, 지은은 화가로 활동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전공(혹은 기술)으로 먹고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며,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기 참으로 애매하다. 어쨌든 다들 '전공 언저리'에서 살아가며 미술과 연결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고학력-여성-서민출신-예술가의 삶이란 녹록지 않다.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 같아 더 씁쓸했다. 


#2.

예술가의 모든 창작과정은 본질적으로 인정투쟁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상당 부분 동의한다.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 예술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누군가에겐 그 대상이 대중이며, 누군가에겐 평단이고, 누군가에겐 소수의 사람들이 그 인정의 대상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대상은 자기가 선택하지만, 어쨌든 예술은 그 대상에 대해 자신이 인정받고자 하는 지속적인 투쟁의 과정이다. 이 책 속 세 명의 예술가(혹은 지식노동자)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계속해서 투쟁한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있기에 그들의 투쟁은 더욱 고달프다. 투쟁 없는 '인정'을 그대로 얻을 수 있는 이들이 추월차선처럼 그들의 옆을 지나가지만 그들은 요행을 바랄 수 없다. 계속해서 투쟁이 답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계층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회문제가 있겠냐만은, 예술대학에 다니다보면 특히 계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술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평균적인 가정환경은 다른 분야 전공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균이다. 평균에는 언제나 함정이 존재하듯 최댓값과 최솟값의 가능성이란 것이 내재한다. 특히나 평균치가 높아지면 그 문제가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마치 다른 분야에서는 부유한 삶이 'someone special' 같이 여겨진다면, 그곳에선 그렇지 않은 이들이 계속해서 추월당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다. 지현과 은영, 지은이 부모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한다. 부모님이 지원해준 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꿈을 지지하긴 했으니까. 반대하진 않았으니까 이런 식으로 원망으로부터 멀어질 구석을 찾아보지만 역부족이다. 가정환경으로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앞서나가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자신의 부모에 대한 미움과 가정환경에 대한 억울함이 은연 중에 솟구친다. 분명 부모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 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묻고 싶지만 답은 찾을 수 없다.

-

*하니포터 2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계속 회사를 다녔아야 했을까? 그랬다면 매달 월급도 받고, 사람구실은 하면서 살았겠지? 계속 그림을 그리는게 맞나? 할 수 있는 것들도 점점 없어지는데... 이렇다 할 성과도 안 보이고. 돈도 없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건지 모르겠다." -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어달리기
조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몇 년전부터 메일링서비스가 대세다. 물론 뉴스레터나 웹진, '고도원의 아침편지' 같은 컨텐츠들이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대세로 자리잡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특히 기존에 문단이 외면했던 젊은 여성 작가들이 메일링서비스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독자들과 나누기 시작했고,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렇게 한국문학의 판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이른바 '경장편'으로 불리던 장르들이 소위 중년 남성 작가 중심의 '순문학'이라는 견고한 장을 깨고 들어왔다. 찬란하게 빛나는 여성 작가들은 한국 문학의 미래이자 현재가 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변화가 메일링(mail-ing), 즉 편지-하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참 흥미롭다. 새로운 지면을 만들기 위해, 여성 창작자들은 새롭지만 가장 고전적인 방식의 '편지쓰기'라는 방식을 택했다. 메일링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연결의 감각을 깨워냈고, 이들의 관계는 연대하고 협력하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함께 응원하는 '동지'로 자리매김한다.


#2.

조우리 작가의 <이어달리기>는 메일링을 통해 연재되었던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도 서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된 장례식 초대장 편지로부터 출발한다. 편지는 책과 사뭇 다르다. 책은 그것을 구입하고 선택하는 독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편지는 그것을 보내는 작가의 행위에 집중한다. 존재하는 이야기를 발견하기 전에 그 이야기로 먼저 다가가는 점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다정하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메일링서비스와 편지라는 스토리, 두 겹의 편지가 만나 더욱 다정한 매력을 뽐낸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행사에 초대한다는 설정은 이런 다정함에 경쾌함을 더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이런 편지를 받으면 어떤 느낌일까? 나는 그 장례식에 참석할까?" "내가 이런 편지를 보내려면 누구에게 써야할까? 편지를 보내면 몇 명이나 참석해줄까?"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3.

<이어달리기>는 하나의 편지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연작소설이다. 하나인 듯 하나가 아닌, 하나 같은 작품이라는 점이 연작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실 연작소설을 볼 때면 처음 했던 생각은 '장편이면 장편이고 단편이면 단편이지, 연작은 뭐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짧았던 생각에 부끄러움이 앞선다. 때로는 장편같고 어떤 면에서는 단편같은 연작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 더 많이 닮아있는지 모른다. 나의 세계의 주인공은 나고,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다른 이의 삶은 그 사람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구상의 인구가 70억 쯤 되니 70억명이 각자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 속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서로가 서로의 주연이 되고, 조연이 되며, 악역이 된다. 이렇게 층층이 쌓인 이야기의 겹들이 마침내 세상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연작소설을 만들어내는 듯 하다. 지금은 내가 주인공이지만 누군가의 이야기에선 그저 스처지나가는 단역이 될 수 있다는 삶의 진리. 연작소설은 그 진리를 담아낸다.


"이모, 나 미션 완료했어."
"그래? 어떤 보상을 주면 좋을까. 원하는 걸 말해봐."
아름은 기꺼이 대답했다.
"이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 P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강지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에세이가 대세다. 평소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은 다른 분야의 글쓰기를 하는 작가님들도 에세이 책을 출간하시는 경우가 많다보니, 평소 관심있던 작가분들의 에세이가 출간하면 찾아서 읽어보는 편이다. 에세이에 조금씩 관심이 가는 중이다. 누군가의 취향과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라 즐겁다. 그 사람의 취향을 모방해보기도 하고, 나의 세상과 비교해보기도 하며 새로운 활자 친구를 사귀는 느낌을 받는다. <점심 산문>에서는 요즘 핫한 작가들의 산문이 가득하다. 나의 점심시간과 그들의 점심시간은 어떻게 다를까라는 생각과 함께, 홀로 있는 점심시간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렇게 만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2.
혼자 점심을 먹는다는 것은 내면의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업무의 시간에는 일에 치여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점심시간이 되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한다. 작가들인 이렇게 맴도는 생각을 글로써 풀어낸다. '점심' 그 자체를 소재로 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점심시간의 글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유다. 근로기준법 상으로 근무시간 중 시급 책정이 되지 않는 1시간이지만, 어쩔때는 이 시간에 가장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 같다. 점심시간을 소재로 한 작가들의 글이 이렇게나 다채롭고 생기가 넘치는 것만 봐도 그렇다.

#3.
혼자 점심 먹는 걸 좋아한다. 가끔 주변 동료들이 혼자 먹는 걸 안타까워하며 같이 먹겠냐고 제안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 꽤나 곤란하다. 그들이 싫다거나 불편해서가 아니다. 그냥, 점심시간에는 혼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출근시간부터 퇴근시간까지 혼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점심시간은 자발적으로 혼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물론 왁자지껄 화기애애한 점심시간도 그 나름대로의 재미와 따뜻함이 있지만, 때로는 차갑고 외로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언제나 혼자 점심을 즐기는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고독, 그 고독은 오늘도 하루를 살게 한다.

"어?! 선배! 어디 가세요?"
"어! 안녕! 나는 어...... 스타벅스."
"커피 사려고요? 저도 같이 가요."
"앗. 그, 그래." - P1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