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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게임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휴가때 가방을 싸고 있는 내게 엄마가 그러신다. "또 책이냐? 근데 휴가가서 책읽을 여유가 있겠냐? " 그럼그럼 이번 휴가는 산과 풀과 나무가 어울어진 평화로운 곳이니 분명 책 읽을 시간이 있을거다. 운전하느라 피곤하고 수다떠느라 피곤하겠지만 내 마음의 여유를 찾고자 가는 것이니 반드시 책 한권 정도 맘편히 읽고 오리라 생각하고 가방에 넣은 책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천사의 게임>이었다. 두 권이어서 무거웠고 두 권이어서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옷한두벌 빼내고 넣은 이 뿌듯함 이제 출발만이 남았다.
산이 있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 그리고 이제 파랗게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논의 벼들과 금방이라도 톡 치면 떨어질 거 같은 빨간 고추들이 달려있는 고추밭이 있었다. 이 고즈넉함과 어울리게 커피 한 잔을 탔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행복을 느꼈다. 하늘은 푸른색을 맘껏 자랑하고 있었고 흰구름은 갖가지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바람은 시원했다. 새소리 밖에 들리지 않은 그곳에서 나는 천사의 게임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2009년 전 세계를 정복한 단 하나의 소설이라니 그런 찬사를 들고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는 이야기의 세계속으로 나를 초대했으니 당근 응해줘야 했다.
다비드 마르틴은 소설가이다. 어린시절을 너무나도 불우하게 보냈지만 이제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필명을 쓰고 있고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작가이다. 스승 비달의 비서인 크리스티나를 사랑하는 그에게 크리스티나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 오고 이제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고 생각했던 스승의 책의 교정을 맡아 거의 다시 쓰다시피 하여 책을 발간하게 해준다. 찬사속에 출간된 스승의 책과 거의 동시에 나온 다비드의 책은 평단과 사람들의 혹평속에 사라지고 그런 그에게 프랑스인 편집인 안드레아스 코렐리의 이제껏 아무도 써 본적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책을 집필해 달라는 거금 10만 프랑의 제안이 들어온다.
책을 집필하는 장소인 을씨년스러운 저택 '탑의 집' 한 폐쇄된 방에서 이전 주인의 흔적을 발견하고 전주인의 미스테리한 죽음이 자신이 하는 책의 집필과 무관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다비드, 책을 씀과 동시에 탐정이 되어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과거를 추적해가기 시작하는데 .... 그가 스친 자리에는 항상 살인이 일어나고 그를 향해 한발한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사랑이 있고 배신이 있고 고통이 있고 두려움이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작가를 구석으로 몰아놓고 빠져나올 수 없는 편집자와의 관계는 모든 것을 혼란속으로 인도한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고 훌륭한 작가가 되기를 꿈꿨던 청년이 유일하게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는 곳은 '셈페레와 아들'의 서점이다.그곳에서만 다비드는 안정을 취할 수 있고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다가가면 갈수록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진실은 1920~1930년대의 격동하는 바르셀로나의 옛시가지를 무대로 음산하고 어둡게 펼쳐진다.
"이곳은 신비한 장소야. 성스러운 곳이야. 네가 보고 있는 각각의 책은 모두 영혼을 지니고 있어. 그 책을 쓴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었고 그 책과 함께 살았고 꿈꾸었던 사람들의 영혼도 가지고 있어. 책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가 그 책으로 시선을 떨아뜨릴 때마다, 그 책의 영혼은 커지고 강해지지. 이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속에서 잊펴버린 책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면서, 새로운 독자나 새로운 영혼의 손에 이르기를 기다려....." <p349 천사의 게임2>
휴가 내내 이 책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저 이 책이 스릴러란 장르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책에 관한 이야기 였기 때문이었다. 매일 읽고 좋아하는 책을 옆에 두고 즐거워 하는 독자들에게 책의 의미를 한번 정도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다비드가 잊은 책들의 묘지에서 이사벨라에게 건내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내 마음에 콕 와서 박힌 것도 지금 내 방 책장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에 과연 내 영혼이 얼마나 담겨 있을까 하고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일거다. 내게 잊혀진 책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참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