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르네상스인 中人 - 누추한 골목에서 시대의 큰길을 연 사람들의 곡진한 이야기
허경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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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역사를 공부하긴 했지만 정확한 중인의 개념을 몰랐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라 해봐야 사(士)·농(農)·공(工)·상(商) 밖에 아는 것이 없으니.ㅠㅠ  네이버 백과사전에 찾아보니 중인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좁은 의미의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 ·의관() ·율관() ·산관() ·화원() 등 기술관원을 망라해 이르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는 기술관 뿐만 아니라 서얼(), 중앙의 서리()와 지방의 향리(), 토관() ·군교 ·교생 까지 포괄적 명칭이 되었다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양반과 양인의 가운데 신분제도로서의 중인은 넓은 의미인 것이다.

 

신분 개념으로서의 중인은 세습되었고 양반에 비해 차별대우가 심했다고 한다. 물론 세종시대의 황희같은 서얼출신이나 장영실같은 노비출신도 능력이 있다면 관직에 기용이 되고 그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사실 성리학의 신분제도에 사로잡힌 당시의 양반내들은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지금이야 의사 약사 변호사 동시통역사 화가 음악가 등으로 활약할 수 있는 그들의 전문성이 최고의 직업이 되어 있지만 그 어느 신분에도 귀속되지 못했던 중인의 어쩡쩡한 위치는 양반과 어울려 살면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실제 문화를 부흥시키고 관상감이나 율관 계사 역관 화원 악공 시인등의 위치에서 전문지식을 발전시킨 중인들 이야말로 조선의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출판편집인이었던 장혼을 비롯하여 신필의 화원이었던 김명국, 직업적인 화가이기를 거부한 조희룡, 침술의 대가 허임, 고약처방으로 정조를 완치시켜 종 6품 까지 오른 피재길, 최초의 한류열풍 역관시인 홍세태,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인 변수와 조선 최초의 신문기자였던 오세창까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중인들이 조선후기에 세상의 변화를 꿈꾸며 그들이 전문적 식견과 재능을 발휘한다.

 

왕실을 돕는 직업이 많았던 중인들의 터전은 한양 인왕산이었다고 한다. 청계천 언저리에 역관이나 의원들이 살았고 지대가 높고 외졌던 인왕산자락에는 가난한 서리들이 관청과 가깝다는 이유로 살게 된다.  그곳에서 인왕산을 노래한 시문학동인인 송석원시사가 탄생하고 인생을 함께한 벽오사 동인도 시인 화원 의원이 함께 하는 문학동호회로 이름이 나게 된다.  

 

저자는  인왕산 굽이진 기슭에서 시처럼 산 문학동인과 세상의 우여곡절을 그리고 노래한 예술인 , 계급의 질곡에 맞서 시대를 끌어안은 전문지식인 대륙과 바다를 넘나들며 신세계를 꿈꾼 역관으로 나누어 신분의 제약에 막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중인들의 삶과 일 그리고 세상과의 인연을 풀어나간다. 때론 재주를 이용해 많은 돈을 벌기도 하고 그 재주를 인정한 사람들에게 많은 부름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온당히 평가 받지 못했던 중인들의 일생은 그들의 한 편의 시와 음악에 묻어 나온다.

 

제가 정민교가 일자리를 찾아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자  홍세태가 지어준 글 안에 중인들의 서러움과 시대를 이겨나가고자 하는 힘이 비친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남 탓만을 하는 것을 반성하게 하는 지금 읽어 보아도 멋진 글이다.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내게 달렸으며, 그 재주를 쓰고 쓰지 않는 것은 남에게 달렸다. 나는 낸게 달린 것을 할 뿐이다. 어찌 남에게 달린 것 때문에 궁하고 통하여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그만둘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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