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일기 - 최인호 선답 에세이
최인호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애야, 여기가 어디라고 벌거벗느냐. 감기 들겠다. 어서 옷 입어라."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와 아들의 모자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같건만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p243

 

누군가 나를 친 듯 멍하다. 경허스님의 이 기상천외한 해탈법문이 그닥 종교적이라는 느낌이기보다는 나를 바라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했다고나 할까? 아니다. 건방진 소리일 듯하다. 다만 생각지도 못했던 어리석음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  어릴적 엄마는 아들을 씻기고 젖을 물리고 함께 잠을 자고 아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이 낯설지 않았을 터이다. 다만 나이가 들었을 뿐인데 아들을 성인으로 보아 수치와 분노를 가졌을 어머니의 마음이 경허스님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순간 잠시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최인호작가의 산문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산중일기이다. 선답에세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불교에서 참선하는 사람들끼리 진리를 찾기 위하여 주고받는 대화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알려진 최인호작가가 삶과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한다. 종교가 다르면 어색할 만도 하것만 작가의 모습과 불가와 삶이 너무나 멋더러지게 어우러진다. 45편의 산문들속에는 뽀안 안개가 피어난 산사의 모습과 초록빛이 넘쳐나는 숲과 눈이 소복하게 내려 가지를 덮은 눈꽃만큼이나 평범한 삶이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바쁜 일상속에 정신없이 뛰어가는 현대인에게 60이 넘었지만 만년 소년같은 마음을 가진 최인호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의 문학속에 담긴 철학이기도 하다.

 

책을 잡고 정신 없이 읽어 나갔다. 유명작가의 일상을 들여다 본다는 것이 좋았고 다가오는 따뜻함이 좋았고 또한 간간히 펼쳐지는 사진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왜 이리 마음이 편해지는 것일까? 마치 산 중턱에 걸려있는 구름을 보고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처마끝의 풍경소리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따끈한 차 한잔을 마시는 기분이다. 작가의 소소한 일상은 그저 평범함 우리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어린시절 목욕탕에서 마추쳤던 같은 반 남자친구를 기억나게 만든 "깨깨씻어라 인호야."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손녀 정원이의 속도를 내어 할머니를 향해 기어오다 턱방아를 찧는 그 모습에서 가슴을 저려하는 할아버지의 애정어린 시선을 보여주고  어린아이의 맑고 순수함이 어른이란 이름의 야만으로 탈바꿈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알수 있다.

 

작가는 간간히 선문답을 인용해 가족, 우정, 삶, 욕망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최인호작가가 들려주는 삶과의 대화는 참 살갑다.

나눔이 있고 여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힘겨움을 극복할 용기와 희망이 있다. 느리게,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라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제 1악장이 요즈음 그의 삶의 화두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내 삶의 페이지를  또박또박 써 내려갈 수 있도록 인생을 설계하고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상과 욕망과 해탈에 관한 마흔다섯 편의 선답 에세이가 내게주는 하나의 선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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