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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 처음 만나는 에티카의 감정 수업
심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항상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가치를 믿으십시오,
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 나의 가치관이 아닌 사회의 기준에, 사람들의 시선에 나를 맞춘다.
ECD 국가 중 한국의 자살률은 3년 내내 1위다. 청소년의 자살의 이유는 당연 입시제도 때문이다. 공부 위주의 교육방식이 아이들에게 주는 압박은 삶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죽음의 문에 그들을 데려다 놓는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극찬을 하던 우리의 교육방식. 그 밑바닥에는 뿌리 없는 무성한 가지뿐인 나무인 것이다. 교육의 본질도 의미도 없는 밑바탕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외면 받고 그들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든다.
현재의 교육 입시제도는 산업화의 산물이다. 공장에서 필요한 인력 구성을 위한 획일화된 사람의 교육. 단순노동에 최적화된 교육이 지금의 교육방식이다.
자유의지가 아닌 주입식 교육방식은 우리의 삶에 부모의 삶을 고스란히 얹어 놓는다. 이러한 삶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속의 버드의 아버지가 삶에 대한 궁극적인 아들이 던진 질문에 자살을 택한다. 그의 죽음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필요하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필연성과 목적성을 가지고 말이다.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에서 우리는 그 답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저자의 입맛대로 혹은 우리의 입맛대로 해석해 놓았다. 우리가 늘 생각하던 욕망이 아닌 최선의 선택,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 욕망 그 자체이다. 이 욕망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이 역량이다. 역량은 그 사람의 그릇, 이성에 의한 의식이자 할 수 있음 그 자체이다.
우리가 갖는 미련과 후회는 정신을 아프게 하는 소화불량이자 구토이다. 누군가 혹은 무엇에 대한 죄책감은 정신의 죽음 이다. 결국 나의 욕망의 그릇은 나의 이성적 그릇에 의해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것에 대한 결과는 나의 부족함이 낳은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대우주 그 자체이고 대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생산되어진 자연과 생산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나의 그릇을 가늠해 봐야 한다. 이 대자연 앞에서의 삶에 대한 욕망은 원초적인 욕망이며 근원적인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라고 명명한다. 이는 자기보존의 욕망이자 삶의 관성이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나답게 만드는 힘, 나만의 관성으로 자리한다.
당신은 선악설과 성선설 중 무엇을 기본으로 생각하는가. 우리의 기본적인 성향은 정해진 방향대로 나아갈까. 스피노자는 이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에 따라서 드러난다고 한다. 어떤 이가 내게는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영화 너덜런스에 나오는 아버지가 그러하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으로 무기력감에 빠진다. 삶 자체를 놓아버리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에게는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살인자이다. 학교총기살인자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음악을 가지고 밴드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들의 음악은 다른 이들에게 삶의 활력이지만 아들의 행동은 다른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나쁜 사람이다. 이처럼 상황과 관계 속에서 오는 선과 악은 결합이냐 해체냐에 따라 코나투스를 증감시킨다.
스피노자를 감정의 철학자라고 부르는데 그가 가장 중요시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감정의 어머니이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상대의 몸, 마음, 단점, 장점, 배려, 노력 등이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든 감정의 빛은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허락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데이트 폭력이 그러하다. 내 마음의 소유욕은 상대방에 대한 집착으로 바껴 사랑을 하는 중이나 그 이후에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폭력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소유나 자기만족이 아니다. 사랑의 정념으로부터의 자유, 사랑의 역량으로부터의 자유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정서적 거리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리고는 나의 심리적 거리의 파토스를 들여다본다.
내가 추구하는 나의 삶의 자유는 나답게 살아가는가에 대답에 나는 큰소리로 YES라고 답할 수 있다. 내 감정에 솔직하고 내 생각에 자유롭다. 나의 이성의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매일의 관성에 충실하다. 우리, 우리의 삶에 정념을 버리고 우리 욕망에 맞는 역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좀 더 이성적인 자유의 영혼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당신 자신을 따르십시오’
스피노자의 말처럼, 일단 나를 믿고 직진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