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마지막 습관 -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산의 마지막 시리즈
조윤제 지음 / 청림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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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마지막 습관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어렸을 때 배웠다. 기본으로 돌아가 산다. 나는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나리라. 초라한 노인이 되어 고항으로 돌아온 다산은 자신 앞에 놓인 남루한 생을 마주하며 절망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다만 다산이 두려워한 것은 오직, 정체된 채로 늙어가는 것이었다.

 

다산은 삶이 불안하고 정체감을 느낄 때마다 소학에서 잊고 있었던 가르침을 떠올렸다.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소학을 다시 손에 잡고 읽었다.

 

"나에게 소학에 보금가는 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질없는 삶을 살아왔단 말인가. 평생 필살기로 가져갈 단 한 권의 책을 쓰자. 바로 하루하루를 어른답게 살고자 하는 습관을 들이자. 인간의 지식이 아닌 태도로 증명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책상부터 정리하라. 몸을 단단히 하고 싶다면 말부터 단단히 단속하라. 익숙한 사이일수록 예의를 다하라. 가르침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배움에 남은 평생을 다 바쳐라. 가장 빠른 지름길은 지름길을 찾지 않는 것이다. 하루하루 내려앉아 나를 가두게 된 껍질이 습관이다.

 

 

"내 나이 예순, 한 갑자를 다시 지낸 세월이었다. 나의 삶은 모두 그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빈틈없이 나를 닦고 실천하고 내 본분을 돌아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

 

"어릴 때 학문에 뜻을 두었느나, 20년 동안이나 세속의 길에 빠져 다시 선왕의 훌륭한 정치가 있는 줄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여가를 얻게 되었다. 험난한 귀양 생활에 몸은 점차 쇠약해졌다. 중풍이 심해지고 오한을 견디기도 힘들었다. 마음도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고난의 극한상황, 절망에 처한 상태였다."

 

 

다산은 이러한 순간, 집필에서 자신이 길을 찾았다. 복숭아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로,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한자리에 앉아 글을 썼다. 그 어떤 마음공부에서도 찾지 못했던 마음의 안정을 집필에 몰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독실하게 실천할 방법을 찾아보니 오직 소학심경만이 특출하게 빼어났다. 진실로 두 책에 침잠해 힘써 행하되 소학으로 외면을 다스리고 심경으로 내면을 다스린다면 현인의 길에 이르지 않을까?

 

다산은 바로 고난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 힘이 된 것이 근본을 바로 세우는 수신이었다. 다산은 고난을 통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몸을 바로 세우고 자신이 해야 할 일, 이루고자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면 스스로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뜻을 이루게 하고 결과를 만들러내는 것도 수신의 힘이다. 다산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집필에 열중했다. 마음을 다스리게 위해 집필에 애를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필에 마음을 쏟음으로써 마음을 읽어버렷다는 사실을 잊었다.

 

 

"배움이란 매일 채워도 끝이 없다. 이제 너희들은 폐족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해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밖에 없다. 독서는 사람에게 가장 깨끗하고 중요한 일일뿐더러, 호사로운 집안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시골의 자제들은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반드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가 있고, 너희들처럼 중간에 재난을 겪어본 젊은이들이 진정한 독서를 할 수 있다. 그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모르면서 그냥 글자만 읽어 내려가는 것은 진정한 독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난 속에서 묵묵히 실력을 쌓아온 사람은 언젠가는 그 진가를 발휘할 기회가 찾아온다. 고난을 통해 얻은 지혜와 통찰을 바탕으로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산의 두 아들은 폐족의 한계를 넘어섰다. 큰아들은 고위직은 아니었으나 관직에도 진출할 수 있었고, 두 아들 모두 시인으로 또는 문장가로 높은 명성을 누렸다.

 

처음에는 반짝반짝 빛나던 인물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는 까닭은 모두 초조함과 조급함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눈앞의 성과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꾸준히 자신을 연마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이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옳은 방향으로 쉬지 않고 갈 수 있다면 결국 일은 이루어진다.

 

 

다산 정약용 또한 소학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말년에 모든 공부를 비우고 소학심경만을 남겼다. 두 책은 사서삼경에서 좋은 구절을 선별한 결과이며, 사대부들의 필독서였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지향은 정반대다. 심경이 유학의 가장 높은 경지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심오한 구절들을 정리했다면 소학은 가장 낮은 곳에 뿌리를 내린 다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양과 상대방을 대할 때의 몸가짐을 강조한다. 심경소학각각의 핵심을 합치면 극기와 복례가 된다. 다스린 마음을 몸으로 옮겨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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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의 정원 - 텃밭에서 뒷산까지, 퍼머컬처 생태디자인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귀농총서 45
토비 헤멘웨이 지음, 이해성.이은주 옮김 / 들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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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의 정원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생태적 도덕성은 유기농 먹거리나 공정무역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먹거리와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고, 내가 점유한 공간을 최대한 생산적으로 이용하는 데 달려 있다. 친환경과 유기농이 다르듯이 유기농과 생태농도 다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급농으로 살다 보면 자기 먹을 것만 키우는 게 대체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다. 소농과 자급농, 도시농업은 영농이 파괴하는 미래 세대의 삶의 터전과 지구 생태계를 지키며, 건강한 먹거리 생산, 쓰레기 재활용, 예술문화 활동, 교육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곳의 면적이 약 500(150) 정도인데, 대략 500종의 식물이 있어요. 우리는 여기를 자급자족하는 장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돌보는 한 우리를 돌봐주는 그런 장소로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기후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를 수 있는 대로 다 기르고 있어요."

 

두 사람은 거름과 피복재를 운반해 와서 가뭄에도 습기를 머금는 기름진 땅을 만들었다. 튼튼한 성질의 어린 교목과 관목이 일단 자리를 잡자, 그 그늘 아래에는 좀 더 연약한 식물을 배치했다. 정원의 북쪽 경계를 따라서는 작은 과일나무와 베리류를 섞어 심어서 먹거리 산울타리를 만들었다. 산울타리는 근처의 협곡에서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으 차단할 뿐만 아니라 먹을거리도 제공했다.

 

"정원을 처음 만들기 시작할 땐 참 힘들었어요. 하지만 일단 어린 묘목이 자리를 잡고 나니까. 세상에, 그 다음엔 일사천리였어요."

 

 

장미덤불을 예로 들어보자. 장미덤불은 다른 많은 종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물론 장미에 아주 잘 붙는 진딧물도 포함되어 있다. 진딧물은 무당벌레를 끌어들이고, 새들은 무당벌레를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운다. 새들은 다시 미생물의 먹이가 되는 똥을 남기고, 그것은 장미에게 거름이 된다. 이처럼 경관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요소들과 활발하게 상호작용을 하며 차례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단순히 자연스럽게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연 생태계처럼 작용하는 경관을 조성하려면, 디자인의 요소에 대해서 생각할 때 겉모습 이상의 것을 파악해야 한다. 각각의 디자인 요소에 대해 생각할 때 겉모습 이상의 것을 파악해야 한다. 각각의 디자인 요소가 다른 부분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충분히 파악해야만 그 요소들을 우아하고 효율적이며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다.

 

자연경관이 얼마나 자립적인지 떠올려보자. 생태계는 자급자족한다. 숲에 비료를 트럭으로 갖다 붓는 사람은 없고, 숲의 쓰레기를 쓰레기처리장으로 운반하는 사람도 없다. 숲은 그 모든 것을 내부에서 처리한다. 숲은 스스로 양분을 생산해내고 온갖 찌꺼기와 부스러기를 재활용한다. 다르게 말해, 숲에서는 투입과 산출의 균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쓰레기가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작업에 드는 에너지는 햇빛이 공급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점을 모방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정원사들 사이에 많이 알려져 있는 것으로, '세 자매'라고 불리는 식물 3종 세트가 있다. 이것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함께 심곤 했던 옥수수, 강낭콩, 호박을 말한다. 3종 세트는 길드라고 할 만한 자격이 있다. 이 식물들은 서로를 지지하고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강낭콩은 공기 중의 질소를 끌어와서 공생 관계의 박테리아를 통해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세 가지 식물 모두의 성장을 촉진시킨다. 옥수숫대는 강낭콩 덩굴이 타고 올라가는 지지대가 된다. 그리고 덩굴진 호박은 넓은 잎으로 살아 있는 파라솔을 형성해 땅바닥을 빽빽하게 덮어서 잡초를 억제하고 흙을 시원하고 촉촉하게 유지해 준다. 과학자들에 의해 삼총사의 결의를 더욱 튼튼하게 하는 것으로 밝혀진 새로운 사실이 있는데, 옥수수 뿌리에서 나오는 특별한 당분은 질소고정 박테리아에게게 완벽한 자양물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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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의 재발견
조지프 코캐너 지음, 구자옥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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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의 재발견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그는 중요한 말을 할 때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재빠르게 세우며 말했다.

 

", 난 오랫동안 이 쇠비름을 관찰하면서 하나의 결론을 얻었단다. 이 쇠비름은 옥수수밭에 전혀 해를 끼지치 않아. 아니 오히려 이롭다고 해야겠지. 모든 잡초가 해롭다고 생각하는 건 엉터리야. 아무래도 지금까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잘못된 추측만 하고 있었나보다. 제대로 알려면 좀 더 실험을 해봐야겠구나. 내 옥수수밭에서 쇠비름을 없애지 말고 말이야."

 

그는 쇠비름 뿌리 사이에 붙어 있는 부서지고 잘린 뿌리를 보여주었다.

 

"이게 뭔 뜻인지 알겠니? 옥수수가 땅속 깊이 뿌리 내려서 더 많은 양분을 흡수할 수 있게 쇠비름 뿌리가 길을 만들어주는 거야. , 따라와 보거라. 또 보여줄 게 있단다."

 

 

잡초 뿌리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수분 약탈자가 아니라는 걸 농부들이나 정원사들에게 인식시키기는 쉬운 노릇이 아니다. 가뭄이 닥펴 농작물이 말랐을 때 쇠비름, 비름, 까마중, 돼지풀 등이 정원이나 밭에서 발견된다면, 농작물의 가뭄 피해에 대하여 이들 잡초들은 미움받기를 면할 길이 없다. 아주 빽빽하게만 자라지 않는다면 잡초들은 스스로 낮은 토양층에서 양분을 흡수한다. 만약 하층토가 없다면 그들은 자신의 뿌리 바깥 면에 모세관 현상을 일으켜 물의 상승운동을 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래쪽에 저장되어 있는 물의 양이 아주 적다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위로 이동하는 수분은 표층토의 농작물 뿌리가 즉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설사 농작물이 말라 죽어간다 해도 잡초들은 최소한 그 농작물의 수명을 늘렸을 것이다.

 

반복하건대, 잡초밭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잡초가 희박하거나 전혀 없는 땅에서 자란 농작물보다 훨씬 수분 부족을 덜 겪을 것이다. 수분은 잡초 뿌리의 바깥 면은 따라 올라온다. 잡초 뿌리들은 많은 농작물 뿌리들을 데리고 하부 토양층으로 진출함으로써 여분의 수분을 확보한다. 또한 잡초는 표층토로부터 수분 증발을 억제하는 기능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 신경과민증이 사라졌다. 나는 존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 인디언들은 왜 잡초를 밭에서 메어내지 않죠? 게으르기 때문인가요, 아님 다른 이유라도 있나요?"

 

그는 즉석에서 '인디언은 게으르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나를 꾸짖는 대신 내가 천천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리 있게 설명해줄 만큼 현명했다,

 

"인디언은 잡들을 먹기 때문에 밭에서 잡초들이 자라도록 그냥 둡니다."

 

"인디언 여성들이 야채요리를 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그냥 둔다는 말인가요?"

 

존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야채요리라는 말이 생소했던 것이다.

 

"인디언들은 옥수수 호박을 먹는 것처럼, 싱싱한 야생초들을 많이 먹습니다."

 

그가 말했다.

 

"밖에는 많은 잡초들이 있어요. 모든 포니족이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지요."

 

밭에서 자라는 잡초들은 별로 돌보는 사람이 없어도 보살핌을 받는 농작물처럼 먹러기 잡초로서 품질이 우수했던 것이다. 밭에서 자란 잡초들은 성장속도가 빠르고 잎과 줄기가 부드러운 반면, 야생초들은 얼마만큼 자라면 즉시 뻣뻣해진다는 것이었다. 원주민 여자들은 잡초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랄 수 있도록 잡초를 솎아냈다.

 

 

포니족 인디언들은 거의 모든 고기를 요리할 때 예외 없이 잡초를 넣었다. 특히 고기가 싱싱하지 않을 때는 꼭 그랬다. 식용으로 적합한 잡초가 경작지에서 풍부하게나오기 전부터 인디언 여자들은 매일 산림이나 깍아지른 듯한 협곡에서 잡초를 캤다. 인디언 여자들은 나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잡초 외에도 많은 풀들을 뜯어왔다. 이네들은 털비름을 아주 귀하게 여겼고 쇠비름도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즙이 많은 쇠비름의 줄기와 잎은 말려서 겨울 먹거리로 쓰였다. 오래된 종족인 포니족은 야생 나팔꽃과 야생 순무를 먹기도 했다. 또 다른 인디언 부족처럼 그렇게 많은 종류는 아니었지만 씨앗을 먹는 경우도 있었다. 여자들이 채집한 비름과 명아주 씨앗은 빻아서 빵이나 포리지를 만들 때 밀가루와 함께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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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 먹다 - 전희식의 귀농일기
전희식 지음 / 역사넷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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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보따리학교는 동학2대 교주이신 해춸 최시형 선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사꾼이자 동학교도이자 군사이기도 한 농민들에게 해월 선생은 보따리 개념을 도입했다는 게 김재형 대표의 설명이다. 호미나 주먹밥을 싸면 농사 보따리요, 칼이나 창을 싸면 개인 군장이요, 베고 자면 베게요, 덮고 자면 이불이다. 이 보따리 개념은 농사철에는 농사짓고, 봉기하며 싸우던 당시 농민군들에게 인내천도 가르치고 요즘말로 민족자주인 척양척왜도 가르치는 개념으로, 동학의 지도자로서 아주 잘 착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난 말이 7년이지 처음 시골 왔을 때나 7년이 지난 지금이나 초보 농사군을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처음처럼' 살고 있다. 여름에 고춧모를 심고 고춧대를 안 세운다고 앞집 팔순 할아버지가 보다보다 딱했던지 고춧대를 백여 개나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며칠동안 땡볕에 비적비적 풀을 매는 걸 보고는 5천원짜리 농약 한통이면 잡풀을 말끔히 잡을텐데 젊은 사람이 참 독하다고 그런다. 돈 아까워 농약 못사는 줄 아시는 거다.

사람들은 탄저병이 동네 고추밭을 뭉개 버릴 때도 잡초들과 어울려 싱글벙글 의연한 우리 고추가 농약과 비료를 모르고 자랐기 때문이란 걸 모른다. 우리 밭에는 무당벌레나 땅개, 거미, 지렁이가 우글우글하면서 나 대신 해충들을 물리쳐 주고 땅도 일구고 한다. 잡초들은 가뭄이 들어도 수분을 보존시켜 주면서 작물들을 말라 죽지 않게 하니까 스프링쿨러니 하는 것으로 일부러 물을 뿌린 적이 없다. 고추 모종 옮길 때는 고춧대를 안 세우고 그냥 두면서 뿌리와 줄기를 먼저 키우는 것이라는 걸 할아버지들에게 어떻게 설명 드릴 수가 없었다. 나는 밭농사 중심으로 자급 위주의 유기농을 하고 있다. 기업형 대농이 아니라 가족형 자급농을 가장 이상적인 농사로 정하고 있다.

메주나 청국장이 잘 뜨려면 누룩 곰팡이가 있어야 하는데 이 누룩 곰팡이는 공기 중에도 있지만 볏짚에 많다. 너무 건조한 볏짚의 곰팡이는 활동을 못하지만 이제 막 만들어낸 메주나 삶아 건진 청국장콩 같은 습기 있는 음식을 볏짚으로써 감싸 놓으면 기가 막힌 발효음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룩곰팡이는 40~45℃에서 잘 자라며, 단백질 분해효소나 당화효소 등의 효소가 있어서 소화율이 높다. 그래서 청국장을 띄울 때 콩 사이사이에 볏짚을 넣고 띄우면 아주 잘 뜬다. 아마도 볏짚의 이런 성분이 민속신앙과 주술적인 행사에 볏짚을 사용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혼자 짐작을 해 본다. 아내도 그랬겠지만 나도 생명농법이니 태평농법이니 하는 설명을 포기했다. 밭도 안 갈고 괭이로 구멍만 파서 감자씨를 넣은 우리 밭은 풀만 무성해지고 있었으니 할아버지 눈에는 올 우리 집 감자농사는 영락없이 실농하는 걸로 보였을 것이다.

시골집 마당까지도 죽음의 회색 시멘트가 뒤덮여 있고 산골짜기 밭은 비닐로 숨통이 막혀 있다. 땅이 죽으면 그 위에 어떤 생명도 살 수가 없다.

아이쿠 지렁이가 내 괭이에 두 동강이가 났다. 순간적으로 괭이를 놓고 지렁이를 살폈다. 흙으로 묻어 주었다. 흙 속에 묻어 주면 잘린 지렁이도 살아나는 법이다. 지렁이 한 마리가 1년 동안 800kg의 거름을 만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지렁이 몸뚱이는 그냥 흙이 통과하는 통이다. 흙이 지렁이 몸통을 통과하면서 좋은 무기물로 변한다. 7년 동안 생활부산물 이외에 일부러 거름을 우리 밭에 준 적이 없지만 해마다 풍년이 드는 것은 이 지렁이 공로가 크다.

괭이를 잘못 놀려 지렁이를 잘라 버려도 죽지 않고 산다. 잘린 양쪽이 각각 앞 뒤 부분을 만들어 내어 두 마리로 변한다. 무서운 생명력이다. 하지만 표피는 어찌나 부드럽고 연약한지 한동안 햇볕에 노출되어 자외선을 쬐기만 해도 죽어버린다.

오늘도 세상 부모님들에 대한 불효자들이 우리 마을에 전원주택을 짓고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치고 있다. 마당까지 아스팔트를 깔아대면서 도시를 망쳐먹은 자들이 시골까지도 망치고 있다.

이처럼 이 가을에 농촌에서 새로이 잉태되는 생명의 기운이 있다. 확연하게 생동하는 생명의 움직임들을 아는 사람은 안다. 생명역동농업, 생태농업, 환경농업이라고 부른다.

옆 동네에서 농사짓는 친구네는 일년 전기세가 2만원이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컴퓨터가 없다. 읍내에 가면 복지회관이건 면사무소건 인터넷이 다 무료다. 나는 얼마 전 한번도 보지 않고 서재를 가득 메웠던 천 권이 넘던 책들을 다 나눠져 버렸다. 책도 안 산다. 도서관에 가면 신간서적이 가득하다. 요즘은 도서관에 CD도 있고 비디오도 있다. 옷을 안 산지는 5~6년이 넘고, 양말도 기워서 신는다. 바느질이 너무 재밌다. 성당 바자회에 가면 한두 번 입다만, 흔히 한물 간 스타일이라는 멀쩡한 고급 옷이 단돈 500원이다.

관행과 남의 시선을 위한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귀농이다. 삶의 패러다임을 전면 전환하는 것이 귀농이다. 자동차를 위해, 핸드폰과 최신 사양의 컴퓨트럴 위해, 비어있는 시간, 비어있는 공간이 더 많은 아파트를 가지기 위해 자기 인생을 소진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귀농한 농부의 삶이어야 하리라. 또 그것이 가능한 곳이 농촌이어야 하리라.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의 원척인 농촌, 농업의 경제외적인 가치 즉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외칠 수 있으리라. 그런 농부들이 만드는 생명의 ㅣ먹을거리들을 덥석 사 먹는 도시인이 그립다.

나는 가급적이면 빈 농가 고쳐 살 생각이다. 돈도 돈이려니와 텅텅 비어 있는 집들이 있는 마당에 황초집이다. 통나무집이다 하면서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은 낭비란 생각이 들고, 아무리 생태건축을 한다 해도 자연에 대한 훼손을 막을 길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 대한 사치와 거품이 우리 생활에 스며 있다는 평소의 생각도 한몫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십여년 이상 비어 있는 집을 주인들이 팔지 않으려고 한다. 막연한 노후 구상이 집터와 집을 십수년째 방치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로 고쳐 살게 해달라고 해도 선뜻 내락을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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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
허병섭 외 지음 / 함께읽는책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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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이런 준비과정을 하면서 농사할 땅을 찾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수중에 돈이 없어서 남의 땅에 빌붙어 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목회하던 교회(동월교회)에서 지원해 주어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돈만 있다고 농촌에 올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아무 곳이나 갈 수도 없었다. 우리에게 적합한 곳이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곳이었다.

 

일조량과 물이 풍부한 곳

 

경관이 좋은 곳

 

산업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곳

 

앞으로 개발될 여지가 없는 곳

 

땅값이 싼 곳

 

 

그리하여 우리의 농사는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업이 아니라 생명을 농사짓는 생태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물론 수확량은 적다. 그러나 우리의 농작물이 각종 생명체드과 공존하면서 맺어주는 열매를 먹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넉넉하다. 그러나 공과금과 세금이라는 사회적 요구와 책임을 감당하기는 부족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서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것 때문에 고민할 겨를이 없다. 생명의 공동체가 주는 감동과 보람과 가치가 너무나 크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없는 신바람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너희만 먹고 살면 되나? 여러 사람의 식량도 생산해야 하지 않느냐? 건강한 먹을 거리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먹도록 할 책임과 사명이 있지 않느냐?" 라고 질문을 하기도 한다. 생태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요원한 꿈에 도전하는 삶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생명이 넘치는 농촌 생활을 위해서는 자연에 귀의를 해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자연을 위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구축하게 된다. 삶이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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