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것을 보았어 - 박혜진의 엔딩노트
박혜진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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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잘 해내지 못할 일은 나 자신의 감정을 믿어주는 일이 아닐까 싶다. 거의 평생을 내 감정을 믿어주지 않았다. 타인의 표정에, 목소리 크기에, 높낮이에 의탁해 나의 감정을 규정했다. 뜨끔 자주 놀라고 놀란 눈으로 자주 앞을 바라봤다.

그래서 친구들이나 사람들 그러니까 타인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나는 ‘반성문‘이라는 가상의 지면에 내가 했을지 모를 실수들을 적어내려갔다.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말, 자제하는게 좋았을 행동들을 추려보면 좋았던 시간과 대화는 어느새 누더기처럼 이곳 저곳에 구멍이 나버린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해서 미안해.˝ 참지 못하고 메세지를 보낸 적도 많다. 그러면 그날의 좋은 추억을 안고 집에가 푸근하게 누워있던 타인들은 깜짝 놀라고 나는 결국 아름다웠던 시간을 망쳐버린 듯한 죄책감까지 떠안고 오지 않는 잠을 기다렸다.

이렇게 지내다보니 어느 순간 내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가끔 그리고 자주 내가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곧이어 정신차리고 단디 앞길을 헤쳐나가라고 채찍질을 했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데. 아직도 나는 나의 감정을 쉽게 믿어주지 못하는 사람으로 멈춰있다. 나의 엔딩이 결국 진짜 나를 알지 못하고 끝날까봐 아직 두렵다.



• 나의 적은 나라는 말. 이럴 때 보면 더할 수 없이 정확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는 나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다. 내가 어떤 도전을 앞두고 있을 때 내 안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 될 거야. 잘할 수 없을 거야. 상처받으면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몰라.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내가 나를 너무 많이 알아서 그런 거다. 나를 방해하는 것은 나, 나를 붙잡는 것도 나, 나를 죽이는 것도 나. 체르바코프는 자신을 너무 많이 알아서 자신을 너무 강하게 방어하려는 나머지 짓지 않은 죄의식을 느끼고 받지 않을 미움을 받고 듣지 않아도 될 지탄을 받으며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18쪽)
- P18

• 상대방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내야만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체르바코프, 그러니까 이 ‘작은 인간‘의 작은 마음이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를 내쫓아버린 가장 강력한 적인 셈이다.(19쪽)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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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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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아픈 줄 알아야 한다.˝ 어릴 때 엄마가 자주 말했다. 시켜놓은 일을 해놓지 않을 때,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자신의 말을 흘려들을 때. 우습게도 나는 이미 말은 물론이고 행동과 분위기에도 베이며 상처받는 아이였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매일같이 말이 아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날에는 예민하게 굴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했다. 말 아픈 줄 알아야 하지만 말을 느끼지 말라는 엄마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의 나는 매일같이 어리둥절 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하며 ˝엄마 없을 때는 빨간 불에 건너면 안돼.˝ 하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무게의 혼란을 주었다. 자주 바뀌는 어른의 기준에 나는 중심이 물렁한 사람으로 자랐다.

타인의 말에 상처를 받게 되는 상황에 나는 꾸준히 내 탓을 한다. ˝내가 예민해서 그래. 내가 소심해서 그래. 내가 덜렁대서 그래. 내가 무능력해서 그래.˝ 말이 너무 아픈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아픈 말들을 꼭꼭 싸놓는다. 그리고 나를 함부로 대하고 싶을 때 열어본다. 그런 날이면 틀림없이 불행해지고 확실히 괴롭다.

• 할머니는 눈을 감고 그가 쏟아내는 말의 매를 맞았다.(248쪽)
- P248

• 그래도 ..... 그냥 그러고 싶을 때가 있잖아. 내가 나한테 벌주고 싶을 때. 괜히 못되게 대하고 싶을 때. 그럴 때 그런 생각 자주 했지.(251쪽)
- P251

• "너무 상처받아서, 아파서 소리를 지른 게 죄가 될 수는 없어요."(251쪽)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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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 -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앳(at) 시리즈 1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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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관해서도 쓸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죄책감은 상대에게 용서를 요구하고 따라서 이기적이다. 바꿔 말해서 나는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사과할 수 있을까?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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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쓸모 - 그늘진 마음과 잘 지내기 위해 애썼던 날들의 기록
최예슬 지음 / 빌리버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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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두드러기가 불안으로 처음 자리잡은 후 1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두드러기, 호흡 곤란, 피부 안쪽의 열감, 그도 아니면 뭔가가 가려워지기 시작하는 듯한 기분들 모두 내가 놓칠 수 없는 감각이 되었다.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것은 온도차에 의한 콜린성 두드러기인데, 그것은 내가 좋아하던 산책마저도 두려움으로 밀어넣게 만들었다.

지난 주말에는 남편과 종일 집에서 쉬다가 몸이 찌뿌둥하여 산책에 나섰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니 가벼운 바지를 입어도 되겠다고 신이 난 내가 말했고, 좋아하는 레깅스와 새로 산 양말을 신었다.

우리는 평소의 산책 코스대로 걷기 시작했고 움트는 봄꽃들처럼 사람들의 표정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모두의 행복한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산책길의 절반에도 닿지 못했을 무렵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피부 속 뾰족함과 뜨거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사포가 피부 안쪽에 있는 걸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 다리가 간지러운 것 같아˝ 내가 말하자 남편은 능숙하게 ˝옷을 얇게 입고 와서 그런가? 어서 들어가자˝라고 말했다. 서둘러 집을 향해 걷고 있는 오빠를 향해 나는 날카롭게 말했다. ˝천천히 좀 걸어. 다리 가렵고 아프단 말이야.˝ 오빠는 속도를 낮췄고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아픈 사람이 되어버린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친절한 말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내가 너무 싫어져 버렸다.

˝마음의 깊은 곳에 힘이 채워지면 모서리가 둥글고 친절한 말을 타인에게 건넬 수 있게 된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나도 모난 마음을 둥글리고 싶어졌다. 체력이 성격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마음의 체력을 기르고 두드러기를 물리치는 상상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추운 날에도 용감하게 산책하는 모습도 떠올려본다. 마음껏 동그란 모습으로 용감해진다.

• 마음의 깊은 곳에 힘이 채워지면 모서리가 둥글고 친절한 말을 타인에게 건넬 수 있게 된다. 다정한 시선으로 풍경을 응시하고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드러난다. 삶에서 불안을 만났을 때 나를 지키는 힘 역시 내부에 있다.(최예슬, 불안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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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3-08-03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ㅠㅠ 피부 두드러기 질환 빨리 가라앉으시길 바라요ㅠ

mamang_book 2023-08-03 18:40   좋아요 0 | URL
달자님 안녕하세요 ㅠ 걱정해주서서 너무 감사합니다 ㅠ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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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크고 있고. 여전히 자라고 있으며. 계속 배우고 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는 것처럼. 오늘의 나는 분명 어제의 걔와 다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월요일 아침이면 그냥 부디 딱 어제 같은 오늘만 되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시행착오도 배우는 것도 변하는 것도 오늘은 잠깐 건너뛰고 싶게 된다.

마음이 그럴 때는 도토리 줍듯 책에서 용기를 줍는다.

• 흔히들 10대가 끝나면 곧 어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비록 아이가 아닌 사람을 모두 어른이라고 한데 싸잡아 부르기는 해도, 어른이란 사실 쉼 없이 변하는 상태다. 이것은 우리가 해 뜰 녘의 긴 그림자와 아침의 이슬이 정오의 쨍한 빛과는 다름을 느끼지 못하고 그 모두를 낮이라고 싸잡아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은 늘 변한다. 운이 좋다면, 차츰 자아와 목표를 굳혀나간다. 최선의 경우에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과 또렷한 시각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젊음의 순진함과 절박감이 살며시 빠져나간 자리에 대신 완숙함과 차분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채워진다.(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28쪽)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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