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아스는 왕의 정복전쟁을 막고자 그의 원정에 질문을 던진다. 맨 먼저 그리스를 정복하자는 말에 ˝그 다음에는?˝ 하고 묻는다. 왕은 아프리카를 손에 넣자 한다. ˝그 다음에는?˝ 인도까지 가자. ˝그 다음에는?˝ 휴식하기로 하자. ˝왜, 지금 당장이 아니고?˝ 결국 돌아올 것이라면 왜 시작하겠느냐는 논리다. 궤변인 것 같으나 왕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기에는 충분했으리라. 우리는 지금도 이런 굴레에 빠지곤 한다. 이는 실패할 거라면 왜 시작해야 하는가 싶은 허무의 굴레가 되기도 하고 대입, 취직, 은퇴 뒤의 허망함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신의 의식을 어딘가로 보내어 그곳에 닿아야만 세계 안에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보부아르는 인간이 목적의식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말로 시작해 그 의식으로 인해 세계가 구성되는 과정, 나아가 개인의 자유가 부딪히는 필연까지 기술한다.https://tobe.aladin.co.kr/n/231539
문학은 흔히 자기가 열망하던 목적에 도달한 인간이 느끼는 권태를 묘사한다. 그다음에는? 인간은 채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모든 주어진 것을 지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도달하자마자 인간의 충만성은 과거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발레리가 말하는 "영원히 미래인 구멍"을 쩍 벌려놓은 채. - P38
"너는 나로부터 생명을 받았다"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말한다(….)그러나 아이는 알고 있다.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현존해 있음에 의해서만 그에게 세계가 있다는 것을. - P103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운명을 부러워하지만, 어느 누구도 타인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몽테스키외는 결론지었다. - P118
우리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요하네스가 처한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상황은 분명하나 요하네스의 발소리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안개 낀 부두를 따라 그의 모호한 시간을 함께 걷는다. 반복되는 대화는 노랫소리와 같은 운율을 갖는다. 실제로 어떤 페이지는 노래로 가득 차 있다. 어딘가의 민속적인 노래 같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여러 사람의 노랫소리에 주인공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얹히는 노래 말이다. 죽음이라는 분명한 사건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장면이다. 그 장면을 어떻게 노래하고 있는가. 페이지마다 짙은 멜랑콜리의 안개를 드리우는 글쓰기는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반점이 지나치게 많고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는 와중에도 단정하기만 한, 이 불가해한 작가는 대체 누구인가.https://tobe.aladin.co.kr/n/228934
<샤이닝>은 숲 속에서의 짧은 여정을 묘사한다. ‘나‘는 왜 숲속까지 차를 몰고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저것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 모호함 속에서 내가 차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차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따위의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의심을 이어나간다. 모호함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명료해지기를 거부한다. 아무도 ‘나‘의 물음에 정확히 답해주지 않는다. 눈 내리는 숲 속에서의 여정은 순간 자체로 존재한다. 의미를 갖기를 거부한다. 욘 포세는 장면과 장면의 끄트머리를 겹쳐서 반으로 접는다. 그 다음 장면도, 그 다음 장면도. 겹쳐진 부분이 점점 작아지면서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나‘의 드라이브가 목적지를 갖지 않았던 것처럼 이야기도 종착지를 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죽음으로 가는 빛의 터널이거나 그에 준하는 꿈, 환상이라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https://tobe.aladin.co.kr/n/228934
안갯 속 다리를 걷는 S의 발걸음은 너무나 구병모 작가님의 것이라서 읽고 있는데도 그리울 정도다.특유의 느릿하고 올드하면서도 이 시대를 저벅저벅 관통하는 문체가.....˝이야기란 어때야 하는가.족적을 따라가 그것의 주인을 찾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오늘날 소설의 위치를 천천히,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더듬어 보는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이것은 단지 내가 보기에 그러했다는 ‘이야기‘.그리고 이것도 하나의 ‘이야기‘.줄타기를 하는 거리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