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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고향 - 조선시대 학자들의 리더십과 역사 기행
KBS 학자의 고향 제작팀 엮음 / 서교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좋은 책이다. 조선 시대를 풍미하였고, 현재 우리의 머릿속 깊은 곳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위대한 학자들에 관한 책이다. 삼봉 정도전부터 추사 김정희까지 조선 시대를 관통하는 16명의 학자, 정치인, 예술가들의 삶과 업적이 잘 드러나 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있다면, 책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제목이다. ‘학자의 고향’ 멋있는 제목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제목이다. 학자들의 삶과 사상에 영향을 준 고향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낸다. 또 아직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맹신하는 풍수에 관한 향수도 일으키는 제목이다. 내가 이 책을 고르고 읽게 된 이유도 조선 시대 학자라기보다는 학자들의 고향에 관심이 가게 되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고향 이야기는 정말 생뚱맞은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도전이 조선 창업의 공신이고 조선의 기틀을 닦는데, 영주 삼판서 고택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신숙주의 고향 나주와 조선 초 문화 발달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물론 영주 사람들과 나주 사람들이 들으면 싫어할 말이긴 하지만 본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학자들의 고향과 그들의 생애와 업적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은 책에 ‘고향’이라는 제목을 떡하니 붙였다는 점에서 소위 제목에 ‘낚여’ 원치 않게 책을 접하게 된 한 사람으로서 불만을 표하는 것일 뿐이다. 다큐멘터리로서는 딱 좋은 소재이다. 학자의 고향을 찾아가서 학자의 삶과 업적을 하나씩 연결해 가면서 소개하면, 그만큼 효과적이고 검증된 촬영 방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효과는 반감되고 오히려 책을 읽는데 엉뚱한 내용들이 툭툭 튀어나와 독서를 방해하기만 하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 같다.
그렇다고 책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는 다면 피상적으로 국사 시간에 배운 조선 시대 내용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학습할 수 있을 것이고, 일반인들이 읽는다면 교양 수준을 한층 더 높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분명 이 책은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책 제목에 속아 넘어갔다는 점 때문에 높은 평점을 주기에는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두 가지 있다. 우선 고향 이야기 덕분에 조선 초는 부계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모계 중심 사회의 영향이 강한 사회였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여자가 남자 집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를 가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였다. 정도전도 어머니 집에서 자랐고, 신숙주도 어머니 집에서 자랐다.
또 하나는 조선 시대 붕당 정치는 깊은 철학적 기반에 근거하여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를 송시열의 나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송시열은 자신의 철학적 기반 위에서 정치를 실천해 나가려 한 것이다. 송시열뿐만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사회나 집단 내의 구성원 간에 갈등이 없는 집단은 없다. 오히려 갈등이 없는 사회나 집단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상투적 문구이기는 하지만 갈등을 원만히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사회와 집단이 바람직한 사회이다. 조선 시대는 그 시대의 갈등을 성리학에 근거한 이념에 기반을 둔 논쟁으로 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 시대였다. 물론 서구 열강의 압도적 힘에 굴복한 모양새가 되기는 했지만, 조선 시대의 시대적 정신 자체가 무기력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책 제목에 낚였다는 이야기가 길어져 책에 대한 불만이 커져 보이는 독후감이기는 하지만 분명 독자들의 관심 분야에 따라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책임을 다시 강조하면서 끝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