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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0
리브카 갈첸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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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형상들
 
 
 이 소설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기후학적이며 원론적인 이야기이고, 또한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의 우주관과 닮은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 그 달콤한 과즙에 묻어 나오는 낯선 것에 대한 경계와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 그것을 우리는 백설공주가 선택한 마녀의 사과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 향긋한 풋내에 결국을 입을 맞춘다. 한 입 깨어 물며 달콤함을 음미하며 그 맛을 기억하고 그 다음을 베어 물면 이상하게도 그 때의 기대만큼의 달콤함이 입 안을 메우지 못했을 때, 그 때의 상실감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새빨간 유혹 속 그것에 넘어가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그 언젠가 후에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하얀 속살과 함께 맛본 후, 그 나중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낯선 것이 다가왔을 때 땅이 무너져 내리듯 통곡하여도 나는 그 유혹에 퐁당 마음을 담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 레오 리벤슈타인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자신의 연인과 함께 하는 아파트로 들어온다. 그런데 이게 왠 일? 그 곳에는 자신의 아내 레마와 객관적으로 똑 같은 여인이 있었지만, 자신의 육감이 말한다. 저 여자는 자신의 레마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녀가 레마가 아닐까? 그와 함께 했던 그 여인이 아닌걸까? 그것에 대한 답은 이렇다. 그녀가 정말 레마가 맞든 아니든 간에 레오와 그 가짜 레마는 계속해서 함께 살 것이고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tv를 보고 있을 것이란 거다.


 
 책 안에서는 레오의 클라이언트인 하비가 나오며, 그가 속해 있다고 말하는 왕립기상협회의 일을 들먹이며,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도시들을 포함한 세계의 기상 현상과 그로 인한 영향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왕립기상협회의 일을 레오 역시 츠비를 통해 하게 되면서 그들은 모두 불안정한 상황과 마주한다. 진짜 레마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레오. 그는 레마의 어머니를 찾아가 그녀의 흔적을 보지만, 그가 생각했던 레마와 그녀의 어머니가 말하는 레마가 다르고, 도대체 진짜 레마는 어디로 갔는지 점점 더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불안정한 기상 환경만큼, 사람의 마음도 불안정한걸까? 레오와 하비가 겪는 일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부조화 이론에 근거한 사례일 수도 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붕괴시키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이론. 폭풍우가 내리고 깎여진 산처럼 메마르면서도 봄날의 산들바람이 귓가를 스치듯 또한 포근한 사랑. 기억 속의 그녀와 내가 생각하는 그녀, 그리고 서서히 양파 껍데기가 벗겨지듯 하나씩 자신의 숨겨져 있는 속살을 내보이는 그녀. 그들은 같은 사람일 수도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레오가 아파트로 들어와 레마를 가짜 레마로 인식하는 순간, 그 레마는 레오는 유일하고 찬란했던 사랑이 다시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온전한 그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도 불완전 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사랑했던 레마를 찾아 그렇게 미친듯히 헤매고, 광인이 되면서 괴로워하고 자신을 속이고 죽이며 그렇게 레마를 사랑했던 것이겠지.


 
 그러나 말하고 싶다. 그만큼 뒤죽박죽에 여러 색이 섞여서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엉켜있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앞에 있는 사람을 우정이라 말하고 애정이라 칭하며 사랑이라 속삭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가 어찌되었든 간에 흔들리는 전깃줄 위에서 새들은 노래하고 나는 설레인다. 아침 그리고 황혼이 오고 비가 내리는 새벽녘 그 사람만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시간과 나중에 남겨질 고통마저도 감미로울 우주를 기다리는 한 사람의 레오이자 하비이며 레마인 사람이 있다.



 더 늦기 전에, 그리고 더 늦어서라도 그 모든 것을 쪼로록 병에서 떨어지는 붉은빛의 와인의 혀끝에 남겨진 짜릿하고 달콤한 상흔을 모두 담아 함께 놓여진 크라페와 함께 이야기하는 그런 사랑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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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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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세상에 남은 진실된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이다.
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은 이름도 채 나오지 않는 한 소년의 어렸을 때부터 소년에서 청년으로 바뀐 그 시점까지의 일생을 격정적이면서도 담담히 풀어내고 있다. 무엇이 정의롭고, 무엇이 옳지 않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소년의 일상에서 필요 없는 것이었다. 반인륜적인 행태를 보인다고 손가락질 할 것도, 왜 그런 길을 걸어야 했는지를 묻는 것도 무의미하다. 단지, 소년은 죽음을 향해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책을 읽고 소년이 길을 나서는 여정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그저 거친 황야와 거친 메마름 땀내나는 버석한 인생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소설의 배경이 미국이 서부를 개척하는(사실상 개척이 아닌, 침범이지만.) 시기였기에 많은 피가 흐르고, 내가 누구인지를 잃어가는 과정을 그릴 것이라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그 막연함이 얼마나 안일하였는지는 이 글을 읽어가면서 서서히 깨달아갔다. 어느 것도 진실된 것 없이 내일의, 아니 당장 오늘 저녁의 자신의 모습이 내가 죽인 인디언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예감과 또 그러면서도 심장이 아직 뛰고 있기에 계속 살아가고 싶은 소년의 모습은 조금씩 시간이 갈수록 하나의 인격체이자 전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영글어 간다. 그 과정은 잔인하지만, 사람이 성인이 되듯,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이며 결국에는 주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허함과 닮아있다. 
 


시대의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 인간의 존엄? 아니, 책은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키워드라고 읽어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핏빛 자오선이 주는 엄숙함에 가까운 전율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결국에 궁극적으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것이자 도착지, 죽음이다. 글을 읽으며,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그만큼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그 스스로에게는 가장 특별한 것. 그러면서 어떻게 정의 릴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게도 그 심판이 돌아올 것이라는 진실이다. 그 죽음을 가지고, 소년을 말한다. 
 


소년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이기도 하고, 단지 그 때의 한 평범한 인물일 수도 있으며 지금의 나일 수도 있다. 그는 순수이기엔 더럽혀졌고, 순수가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어수룩하다. 그렇기에 가장 깨끗하게 진실을 마주보고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무엇을 마음에 끌어안고 살아가는가? 한 번 숨쉬기도 힘들고, 내가 인간으로 취급 받지도 않으며, 나 또한 인간성을 잃었을 때, 우리가 꿈꾸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답은 어디에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목덜미를 스치듯 입맞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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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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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지금도 풋 토마토의 싱그러우면서도 바삭바삭한 맛이 저절로 그려진다.-물론, 아직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바로 스프레굿가의 모습이면서 살아가는 방법이라 생각하니 더욱 특별한 맛이라 기대된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휘슬스톱이라는 기차역이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스프레굿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로 그 중에서도 스프레굿가의 막내딸인 이지 스프레굿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왜, 이지 스프레굿이냐고? 그렇게 많은 스프레굿가의 사람들 중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녀가 이지 스프레굿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당차고 유쾌하며 또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이 소설의 두 화자인 에벌린과 니니 스레드굿은 에벌린의 시어머니가 니니 스레드굿과 같은 요양원에 있었다는 우연으로 그리고 에벌린이 자신의 시어머니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요인으로 매우 적은 확률 아래 만나게 된다.-이렇기에 참으로 인생사가 재미난 것 아니겠는가? 우연이 인생의 길을 열어줄 수 있으니.- 니니가 말하는 과거 스레드굿가의 이야기-특히 이지 스레드굿의-가 더욱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에벌린에게 있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점점 바뀌는 모습을 보며 좀 더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가슴 벅차 오르는 느낌이 한 가득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출을 바라보며 느끼는 먹먹함과도 같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한바탕 니니의 이야기가 끝나면 에벌린의 모습이 매우 다르게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방향으로. 사람들에게는 흔히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그것을 붙잡느냐, 마느냐가 바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런 것을 보면 에벌린은 니니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이지 스레드굿을 잡고 자신의 전환점을 찾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의미를 찾으라 한다면 두 가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는 에벌린이 얻은 삶에 대한 의지와 잃어버렸던 꿈에 대한 것. 그리고 또 한가지는 차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말이다. 사실, 이 두 개가 그리 다르지는 않다고 본다. 적용하는 방향에 따라 같은 것을 도출해 낼 수도 다르게 결론을 낼 수도 있는 것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화자를 중심으로 해서 이 글을 해석한다고 하면, 이 소설은 결국 여성해방에 관한 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네이버에서 관리하고 있는 내 블로그를 보면, 굉장히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영화제나 영화의 주제 그리고 책들까지. 나 자신이 여성이라 그런 것이어서 그런지 그런 류의 이야기가 나오면 많이 공감이 되고 내 인생을 설계하는 것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이 때의 설계의 방향은 여성과 남성의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완성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에벌린, 그녀는 솔직히 말해 그리 특별한 인물은 아니다. 그냥 이 곳 저 곳에 존재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 그러면서도 그 자신의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 나가는 매우 평범한 여성이다. 폐경기의 여성이 실제로 저런 감정 속에서 무기력해지고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사실 소설에서는 그런 여성을 대입하여 노골적으로 여성의 무기력함을 보여주었지만 이것 역시 어찌 보면 상징일 수도 있다고 본다. 어쩌면 에벌린 자체가 결혼을 하고 자신의 인생이 아닌 타인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여성에 대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누구씨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는 그녀들의 정체성. 무기력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자존감이 상실되어 가는 여성의 삶.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따스하고 그저 단지 지나가는 바람일지도 모르는 그 바람에 에벌린은 변화한다. 마치 유충이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어 날개를 펴듯 말이다. 그 계기는 니니 스프레굿이며, 또한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서 그리고 위험과 불의를 해쳐 나가는 이지 스프레굿이었다.


 
 소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매우 특징적인 이야기를 또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지 스프레굿과 그녀의 평생의 동성의 연인이자 사랑이었던 루스 제이미슨의 이야기일 것이다.-소설 속에는 백인과 흑인에 대한 차별, 경제공황 등의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그것들을 제외하고 나는 이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실, 처음에 접했을 때는 이지 스프레굿의 성별이 모호해서-계속해서 스프레굿가의 막내딸이라고 나오지만- 잘 못 이해한 줄 알았었다. 우호,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들의 연애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어찌되었든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이들의 모습은 그리 불편함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지 스프레굿에게 반해서 청혼하고 싶을 정도였달까? 성별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 당당함과 정의, 따뜻한 온기, 재치와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정렬과 인내까지. 휘슬스톱 카페가 아름다웠던 것은 그녀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녀들이 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휘슬스톱 카페를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생기고 사라지면서 루스가 죽고, 휘슬스톱 카페도 사라지고 스프레굿가가 있던 집터도 무너지지만, 루스를 사랑한 꿀벌 조련사는 항상 그 곁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반전이 숨겨진 이야기의 추억의 한 모금이며, 한 입 베어 물면 상큼하게 터지는 과즙의 싱그러움과 신맛이 어우러진 달콤함. 그리고 바삭한 식감이 입 안을 맴도는 풋토마토 튀김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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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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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음 이 소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단순히 살인사건과 실종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미스터리 심리극? 아니면, 평행우주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서? 이 모든 것들이 종합해서 새로운 세계를 열고 이야기가 만들어져 나간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던 책, 그것이 바로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이하 실프-‘였다.  
 
  
 사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정말 간단한 게 이 이야기이다. 물리학자인 제바스티안, 그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다. 마치 그가 주장하고 있는 우주처럼. 그에게는 갤러리 관장인 아내와 그를 빼어 닮은 아들, 리암과 함께 하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바람직한 삶을 이어나가면서 오스카와의 우정 이상의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간다. 그러다 갑작스레 “다벨링은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전화를 받고 그의 아내와 트래킹을 함께 하는 사이였던 의사 다벨링을 살해하고 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아들인 리암이 유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바스티안은 결국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다벨링을 살해하게 된 것. 하지만 제바스티안의 아들 리암은 유괴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제바스티안은 그가 겨우 지탱해 온 삶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영문 모를 이 사건을 노형사인 실프가 등장해 하나씩 풀어나간다.
  
 
사실 이 사건은 너무나 깜찍할 정도의 비밀을 숨기고 있다. 어이없을 정도로 말이다.- 만약 독일어를 하실 줄 아시는 분이라면 원서를 읽기를 추천한다.- 더블싱크와 다벨링의 유사한 발음으로 인한 사건이라니. 하지만, 여기에서 밝히자면 사실상 제바스티안이 선택한 다벨링의 살인사건은 그의 다중우주를 깨뜨리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이 소설은 제바스티안의 다중우주론과 오스카의 평행우주론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곧 인간이 어떠한 선상에 놓여있는가를 묻는 글이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다중우주를 꿈꾸지만, 인간에 대해 한 번 떠들어보라고 한다면 평행우주 쪽으로 인간의 위치를 말할 것 같다. 인간은 너무나 고독하고 무엇인가와 섞이기에는 이질적이며 타인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고 언제나 그렇기에 함께 이기를 바라는 사회적 동물이다. 나의 삶은 누군가의 삶으로 대체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슬프고 나의 ‘아’가 다른 이에게는 ‘어’로 다가오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이 다른 이들의 삶과 너무나도 같게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평행하게 놓여있기 때문은 아닐까?
  
 
 감성와 오성으로 구축된 제바스티안의 세계는 우연과 필연이 빚어지는 구축된 그러면서도 자유의지 또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이 함께 공존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을 단지 꿈꾸어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본래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단지 우리 역시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존재의 가치 속에서 그렇게 단지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존재는 아닌 건지. 소설의 마지막 제바스티안의 더블싱크. 즉 다중우주와 그의 세계 중 하나가 무너지면서 생겨난 혼란은 인간의 고독과도 닮아있다. 한없이 초라하고 또 허무한,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내가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해 내려는 그런 노력들이 하나의 혼돈이 되어 나타난다.   
  
 
 글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 깊이 남아있던 문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바로 이 말이다.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어.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는 이 둘을 잘 구분할 줄 모른다는 거야.”
한동안 내내 전공 수업으로 스토리에 관해 조금은 공부했던 지라 아주 약간은 엿볼 수 있었던 이 한 마디. 삶과 이야기는 함께 존재하지만 동시에 하나가 될 수 없는 모순적인 가치들이다. 마치 다중우주를 주장하는 여러 우주들 속에서 그 것들이 결국에는 하나로 합쳐 질 수 없는 평행우주이듯이 말이다. 인간의 함께 하는 삶이 그리고 여러 개인 삶이 그렇게 나쁜 것일까? 본질을 흐린다는 것. 아아, 정말 슬프지만 그렇다. 이 저주는 나를 비웃는다. 낄낄거리며 나의 시간을 좀먹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모두 자각하며 냉철해 질 수 없는 나를 아련하게 바라본다.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에 대한 다른 답이 바로 여러 개의 나의 삶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모순적이면서도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나의 모습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인 것 같다. 그 각성의 끝에 떨어질 것 같은 위태위태함이 그럼에도 각성 후에도 꼿꼿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그 모습이. 사람을 사랑하고 싶고, 그렇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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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시작 민음사 모던 클래식 37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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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나 많은 시작
 

 
 내가 살아가는 어떠한 이유가 될 수 있는 것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길 위에서 채이는 돌멩이보다도 사소한 것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감히 두 번을 더 만져보지 못할 만큼 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나누어 삶을 살아갈 때 그 원인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 지금의 현재 그리고 조금 더 있어야 도래할 미래는 내 삶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시작. 그 시작점. 감히 누군가의 삶을 제 3자의 입장에서 판단한한다고 할 때, 그 인물이 행동하는 모든 행동의 시작이 되는 때. 그 때는 과연 언제일까? 나는 그 시작 역시 삶을 살아가는 이유와 같은 맥락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뿌리를 찾아 여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방황은 그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과 삶을 조금씩 흔들어 댄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줄리아 아줌마의 아주 우연된 말실수로 인하여 자신의 뿌리가 흔들리는 데이비드. 그런 데이비드의 곁에서 자신의 꿈을 잃어버리고 겁쟁이가 되어 버린 엘리너. 데이비드의 방황을 지켜보며 서운해하고 힘겨워하는 그의 양어머니. 전에는 그의 모든 것들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그가 생각하기에- 아니, 거짓이었던 거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진짜 친어머니를 찾기 시작한다.
 
 그는 우선 자신과 관련된 물품들을 하나씩 모으면서, 그 것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무엇인가 의심될만한 것은 없었는지 꼼꼼히 생각해 본다. 자신에게 친어머니에 대한 단서를 말해 줄 유일한 사람이었던 줄리아 아줌마는 말실수를 한 이후 갑작스럽게 닥친 치매로 인하여 더 이상 그에게 어떠한 말을 해 줄 수 없는 상태로 세상을 떠나고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의 진짜 어머니를 찾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러다가 기록물을 함부로 열람하여 자신이 큐레이터로 일하던 박물관에서 경고를 받고 나중에는 직장 동료에게 밀려나 결국에는 해고까지 당하고 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삶이 시작된 그 시작점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마지막, 컴퓨터를 이용하여 찾게 된 그의 친어머니와 같은 과거를 가진 여성. 그러나 그녀는 그의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잔인하게도 결국 그의 친어머니는 그 길의 끝에 없었던 것이다.
  
  
  
 
 데이비드가 그의 아버지-자세히 말하자면 양아버지이지만-가 돌아가시고 나서 자신의 시작을 찾기 시작한 모습을 보다가 그 결과까지 알게 된 후, 얼마자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후로 내 삶이 시작을 알아가려는 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누군가의 끝이 나의 시작이 된다니! 굉장히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임종에 슬프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허무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그 죽음이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이 나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던 기억과 시간의 흐름 속에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그에 얽혀있는 나의 과거를 찾으며 그렇게 상처를 치료하고 내 삶을 돌아보면서, 성숙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이 아닌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큰 충격이 나를 강타했을 때, 그 때야 비로소 삶을 바라보며 그 시작을 찾아 계속해서 방황하고 그 시작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아 여행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란 존재의 평생 과제이자 속성이 아닐까?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 행동이 시작되었다. 한가지 손동작 숨을 내쉬는 그 짧은 순간까지도 우리의 시작은 아닐까?
 
 나비효과란 말이 있다. 나비의 날개짓이 결국에는 태풍을 일으킨다는 엄청나게 사소한 것이 큰 결과를 일으킨다는 말. 나는 그것이 삶 속의 시작이라고 생각된다. 나중에 가서는 무엇이었다고 바로 밝혀질 수도 수긍할 수도 있고, 데이비드처럼 허무하고 모든 것이 꿈결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움켜쥐고 어떻게든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바로 시작이라는 것이다. 왜냐고? 그것이 지금의 나의 모습을 구성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삶을 구성하는 것은 시작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시작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작이 반이지만, 그 시작 다음의 과정은 그 반을 차지한다. , 시작이 어떠하든 간에 과정에 충실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 결과 역시 좋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과 달리 역시나 시작에 집착하며 그것을 다시 되찾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뿌리를 찾는 것으로 나의 근본을 탄탄히 다지는 것은 그 과정을 다지는 것보다 좀 더 그 기본을 탄탄히 하고 나를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 거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나쁘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데이비드와 같이 자신의 시작에만 집착하여 지금의 삶의 과정까지도 모두 포기하게 된다면 그것이 옳다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은 데이비드와 닮아 있을 거라 생각된다. 수많은 그림자들이 있고, 수많은 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것들만큼의 더 많은 시작이 있다. 지금도 나는 시작하고,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나에게 묻는다. 그 시작을 찾아 여행하는 인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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