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 위의 코딩 - 비전공자도 시작할 수 있는 코딩 첫걸음
고코더(이진현) 지음 / 원앤원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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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손에 쥐는 스마트폰부터 시작해서, 출근길에 찍는 교통카드, 점심시간 배달앱 주문, 퇴근 후 넷플릭스 시청까지. 우리는 하루 종일 수많은 디지털 기기와 서비스를 이용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코딩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마치 공기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듯, 코딩은 우리 일상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서 오히려 그 존재감을 느끼기 어렵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새벽까지 키보드를 두드리며 우리가 내일 사용할 앱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코드 한 줄 한 줄이 모여서 우리의 하루를 더 편리하게, 때로는 더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개발자들은 일종의 현대판 마법사가 아닐까 싶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마법을 부려,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이번에 이러한 코딩의 세곌ㄹ 쉽게 이야기 하는 신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고코더님의 <내손 위의 코딩>이었다.

코딩이라는 이 마법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면 갑자기 높고 두꺼운 벽이 앞을 가로막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문과인데', '수학을 못하는데', '나이가 많은데'라는 수많은 변명과 두려움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특히 비전공자라면 더욱 그렇다. 마치 외국어를 처음 배우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두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과는 수학과 과학', '문과는 언어와 사회'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코딩은 당연히 이과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고 단정 짓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코딩이라는 것이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일까? 신호등의 비유를 들어보자. 도로 위의 신호등은 단순하다. 빨간불이면 멈추고, 초록불이면 간다. 이 간단한 규칙이 복잡한 도시의 교통을 원활하게 만든다. 코딩도 마찬가지다.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은 '이런 상황이면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이면 저렇게 하라'는 명령들의 조합일 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코딩을 배운다고 결심했다면, 그 다음에 마주하는 것은 '어떻게 배울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다. 국비지원 교육, 온라인 강의, 부트캠프, 독학... 각각의 방법마다 장단점이 있고, 사람마다 맞는 방법이 다르다. 국비지원 교육은 비용 부담 없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때로는 교육 내용이 현업과 괴리가 있을 수 있고, 취업과의 연결고리가 약할 수도 있다. 부트캠프는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실무 중심의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그만큼 강도가 높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온라인 강의는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학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혼자서 꾸준히 동기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독학은 가장 자유롭지만 동시에 가장 외로운 길이기도 하다. 막힐 때 물어볼 사람도 없고,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코딩은 하루 이틀에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마치 악기를 배우는 것처럼, 매일 조금씩이라도 손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해야 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것도 어렵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개발자라고 하면 보통 컴퓨터 앞에서 밤새 코딩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발자의 세계도 훨씬 다양하고 입체적이다. 웹사이트의 화면을 만드는 프론트엔드 개발자, 뒤에서 데이터를 처리하는 백엔드 개발자, 스마트폰 앱을 만드는 모바일 개발자까지. 각각의 영역마다 필요한 기술과 역량이 다르다. 프론트엔드 개발자는 사용자가 직접 보고 만지는 부분을 다룬다. 버튼을 누르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화면이 얼마나 예쁘고 사용하기 편할지를 고민한다. 어찌 보면 예술가와 엔지니어의 성격을 동시에 가져야 하는 직업이다. 백엔드 개발자는 사용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시스템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담당한다. 데이터베이스에서 정보를 가져오고, 서버 간의 통신을 처리하고, 보안을 관리한다. 마치 무대 뒤에서 모든 것을 조율하는 연출가 같은 역할이다. 모바일 앱 개발자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 앱을 만든다. 작은 화면에서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부터, 터치 인터페이스의 특성을 고려한 설계까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코딩을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기술적인 부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끊임없는 실패와 좌절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 수 있다. 어제까지 잘 돌아가던 프로그램이 갑자기 오류를 뿜어내거나, 몇 시간 동안 찾던 버그가 단순한 오타였던 경우를 경험하면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모두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에러 메시지를 보며 당황하던 초보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에러 메시지를 보고 대략 어디가 문제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구글링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능력도 늘어난다. 스택오버플로우라는 개발자들의 질문답변 사이트가 마치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독학의 길은 특히 외로울 수 있다. 막혔을 때 바로 물어볼 동료나 선생님이 없어서 며칠씩 같은 문제로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혼자서 해결한 문제들은 더 오래 기억에 남고, 비슷한 문제를 다시 만났을 때 더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게 해준다.

코딩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워 보이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게 된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 감동받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가면 된다. 코딩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금의 호기심과 꾸준함만 있다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언어이자 도구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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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스 콜 - 주의력 자본주의는 우리 시대의 비즈니스와 정치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크리스 헤이즈 지음, 박유현 옮김 / 사회평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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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2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로 무한 스크롤의 늪에 빠져 있을 때가 있다. 처음엔 그저 잠깐 뉴스나 확인하려 했는데, 어느새 몇 시간이 흘러버린다.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화면을 쓸어내리고, 눈은 의미 없는 정보들을 흡수한다. 그러다 문득 깨어나면 묘한 공허함이 밀려온다. 무엇을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시간이 도둑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크리스 헤이즈의 <사이렌스 콜>을 읽으며, 이런 일상적 경험들이 개인의 의지박약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주의력이 상품이 되어 경매장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나를 더 오래 붙잡아두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자신을 돛대에 묶었다. 그는 사이렌의 유혹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비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사이렌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그들의 노래에 홀려 있다. 더 안타까운 건, 우리 주변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각자 자신만의 디지털 세계에 빠져 있고, 현실의 타인과는 점점 멀어져 간다. 가족끼리 식당에 앉아서도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풍경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더욱 고립되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을 목격할 때마다 씁쓸함을 느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감정의 정체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연결과 깊이 있는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자유였던 것이다.

헤이즈가 묘사한 '슬롯머신 모델'은 충격적이면서도 너무나 친숙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열 때마다 느끼는 그 묘한 기대감, 새로운 알림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근거림, 그리고 아무것도 없을 때의 실망감까지.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정교한 설계의 결과라니.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든 이 논리였다. 육아도, 연애도, 친구 관계도 이제는 '좋아요'와 '댓글' 개수로 평가받는다. 아이가 첫걸음을 떼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그 순간 자체를 온전히 경험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소셜미디어에서 더 많은 반응을 얻을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 진정한 경험보다 그것의 재현과 공유가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우리의 감정과 관계까지 공연이 되어버렸다.

트럼프 현상에 대한 헤이즈의 분석은 특히 날카로웠다. 그가 어떻게 모든 정치적 관례를 무시하면서도 결국 승리할 수 있었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니 현대 정치의 암울한 현실이 보였다. 진실이나 정책의 옳고 그름보다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느냐가 정치적 성공의 척도가 되어버린 시대. 이런 환경에서는 가장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목소리만이 살아남는다. 한국 정치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정책 토론보다는 개인적 스캔들이 더 주목받고, 복잡한 사회 문제들은 단순한 슬로건으로 축약된다. 시민들은 깊이 있는 정보를 얻기보다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에만 반응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숙의와 토론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감정적 동조와 진영 논리가 차지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소외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내 주의력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딘가로 끌려간다는 느낌, 내가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보게 되는 것 사이의 괴리감.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삶에 대한 통제감을 잃어간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소외감이 더 깊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된 그들에게는 주의력을 스스로 조절한다는 것 자체가 낯선 경험이다.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영화 한 편을 집중해서 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깨닫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깊이다. 몰입의 즐거움, 하나의 주제에 오랫동안 집중하며 생각을 발전시켜가는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과 만족감. 이런것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대신 우리는 표면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들에 둘러싸여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진정한 관계는 부족하다.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의미 있는 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

헤이즈가 던진 근본적 질문 앞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만약 내가 내 주의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에 집중하고 싶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사람들이었다. 가족,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휴대폰을 보지 않고 온전히 그들에게만 집중하고 싶다. 그들의 말을 진정으로 듣고, 그들의 감정을 느끼며, 함께 웃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두 번째는 창조적 활동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몰입하고 싶다. 중간중간 알림에 방해받지 않고, 몇 시간이고 하나의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 번째는 자연이다. 산책하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새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이런 경험들이 주는 평온함과 충만함을 더 자주 느끼고 싶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판 오디세우스의 지혜다. 사이렌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유혹에 대비하는 것. 하지만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묶어둘 필요는 없다. 대신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휴대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고, 특정 시간대에는 아예 접근하지 않는 규칙을 만들었다. 소셜미디어 앱을 삭제하고, 필요할 때만 웹브라우저로 접속한다. 중요한 일을 할 때는 휴대폰을 다른 방에 두고 온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인식하는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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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원칙 사고 - 원점에서 시작하는 일론 머스크식 문제 해결법
안유석 지음 / 처음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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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사회는 빠른 변화와 불확실성으로 특징지어진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가속화되고, 산업 간 경계는 모호해지며, 어제의 성공 공식이 오늘의 실패 요인이 되는 상황이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전통적인 문제 해결 방식, 즉 과거의 사례를 참조하거나 업계의 관행을 따르는 유추적 접근법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제1원칙 사고'이다. 문제 해결 기법을 넘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의 전환을 요구하는 사고 체계이다.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와 스페이스X를 통해 보여준 혁신의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1원칙 사고란 복잡한 문제를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분해하여, 그 핵심 진실로부터 새로운 해결책을 구축하는 접근법이다. 이는 기존의 가정이나 통념에 의존하지 않고, '왜'라는 근본적 질문을 통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유추적 사고가 "A가 성공했으니 우리도 A와 비슷하게 하자"는 논리라면, 제1원칙 사고는 "A가 성공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며, 그 핵심 원리를 우리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모방과 진정한 혁신 사이의 분기점이 된다. 제1원칙 사고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각 영역에서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제1원칙이라고 정의했다. 이후 이러한 사고방식은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갈릴레이가 천동설을 의심하고 관찰을 통해 지동설을 확립한 것,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 모두 제1원칙 사고의 결과물이다. 현대 과학 역시 가설 설정, 실험을 통한 검증, 이론의 수정이라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기존 패러다임에 도전한다.

머스크가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 때, 업계의 통념은 "전기차 배터리는 비싸다"였다. 하지만 그는 이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배터리를 구성하는 리튬, 니켈, 코발트 등 원자재의 실제 가격을 분석한 결과, 이들의 합계는 완성된 배터리 팩 가격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문제는 제조 공정의 비효율성, 복잡한 유통 구조, 그리고 기존 업체들의 안주하는 태도에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머스크는 기가팩토리라는 수직 통합 전략을 수립했다. 원자재 조달부터 배터리 생산까지 전 과정을 직접 관리함으로써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고, 전기차의 대중화를 앞당겼다. 일론 머스ㅡ의 또다른 혁신인 스페이스X는 우주 산업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 기존에 우주 발사 비용이 막대한 이유에 대한 머스크의 접근 역시 제1원칙 사고의 전형이다. 로켓을 구성하는 알루미늄, 티타늄, 연료 등의 실제 원자재 비용을 계산해보니 전체 로켓 가격의 2%에 불과했다. 나머지 98%는 제조, 조립, 그리고 무엇보다 '일회용'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존 우주 산업은 로켓을 발사 후 폐기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하지만 머스크는 "항공기가 한 번 비행 후 폐기되지 않는데, 왜 로켓은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로부터 재사용 로켓이라는 혁신적 개념이 탄생했고, 팰컨 9의 성공적인 수직 착륙은 우주 산업의 게임 체인저가 되었다.

제1원칙 사고를 실무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론은 다음 4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는 분해(Deconstruction)로 문제를 '사실'과 '가정'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여기서 핵심은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과 단순히 믿고 있는 가정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다. '5 Whys' 기법을 활용하여 문제의 근본 원인까지 추적한다. 2단계는 의심(Questioning)이다. 익숙한 전제와 업계 통념에 체계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사고의 관성에서 벗어난다. 3단계는 재설계(Reconstruction)로 검증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구축한다. 기존 제약 조건을 제거한 상태에서 창의적으로 요소들을 재결합한다. 가설적 사고를 활용하여 극단적이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아이디어도 탐색한다. 4단계는 실험(Testing and Validation)으로 도출된 해결책을 작은 규모로 실행하여 현실에서 검증한다. 실패를 학습의 기회로 삼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간다.

제1원칙 사고는 문제 해결 기법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 시각의 전환을 의미한다. 기존의 가정과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이 접근법은 개인과 조직, 나아가 사회 전체의 혁신 역량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일론 머스크의 사례에서 보듯이, 제1원칙 사고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현실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특별한 천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체계적인 훈련과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누구나 습득할 수 있는 사고 체계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일상의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매일 마주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기존의 가정을 의심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연습을 지속해야 한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제1원칙 사고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이 사고방식을 통해 우리는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바로 "이것이 정말 필요한가?"라는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오늘 던지는 하나의 "왜?"가 내일의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제1원칙 사고는 바로 그러한 변화의 출발점이자, 미래를 설계하는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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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읽는 당신이 옳다 - 공감과 경계로 짓는 필사의 시간
정혜신 지음 / 해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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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하루 30분, 한 페이지, 때로는 한 문장만 써도 된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매일 조금씩, 천천히, 내 마음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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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읽는 당신이 옳다 - 공감과 경계로 짓는 필사의 시간
정혜신 지음 / 해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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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필사는 글만을 베껴 쓰는 것이 아니다. 필사를 통해 우리는 저자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고, 자신의 생각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한다. 필사한 글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당시의 감정과 생각을 되짚을 수 있다. 이는 현대인의 정신적 피로를 풀어주는 동시에, 일상에서의 작은 발견과 깨달음을 얻는 중요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필사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내심을 기르고, 집중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명상과도 같으며, 현대인들에게 필수적인 정신적인 휴식이 된다. 매일 한 장씩 글을 필사하면서, 우리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가 천천히 자라듯이, 필사의 과정이 우리에게 내적 성장을 가져다준다. 이번에 필사와 함께 위안과 삶의 가이드를 해 줄 수 있게 꾸며진 필사책을 사용해 보았다. 정혜신님의 <손으로 읽는 당신이 옳다>였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책상 위 하얀 종이를 비춘다. 펜을 든 손이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문장을 따라 쓴다.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길 잃은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2024년 12월3일, 우리는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으로 또 다른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었다. 저자는 말한다, "심리적 재난은 이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일상으로의 복귀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어제의 상식이 오늘의 무용지물이 되고, 오늘의 확신이 내일의 착각이 되는 시대다. SNS 타임라인을 스크롤하다 보면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점점 작아진다. 누군가는 성공했다고, 누군가는 행복하다고, 누군가는 완벽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는다. 그럼 나는? 이 불안하고 초라한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순간, 그 모든 소음이 잠잠해진다.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된 나가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필사는 단순한 베껴 쓰기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정혜신이 그토록 강조했던 '집밥 같은 심리학'이 바로 여기 있다. 마음이 허기질 때마다 밥 먹듯이 펼쳐보는, 그런 일상적 치유의 시간 말이다.

현대인의 마음은 늘 상처투성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갑옷을 입고 살아간다. 강해 보이려 애쓰고, 괜찮은 척하며, 아픈 것도 모른 척한다. 그렇게 쌓인 상처들이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다. 혼자 있을 때, 깊은 밤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필사를 하다 보면 그런 상처들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 써놓은 "괜찮다"는 말을 따라 쓰면서 정작 괜찮지 않은 내 마음을 발견한다. "사랑한다"는 문장을 옮기면서 사랑받고 싶었던 내 마음의 목마름을 느낀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문장들은 마치 상처받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 같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나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슬픔을 그 문장들이 대신 말해준다. "네가 아픈 게 당연해. 네가 슬픈 게 이상하지 않아. 너도 충분히 소중한 사람이야."

​디지털 시대는 우리에게 속도를 강요한다. 빨리 읽고, 빨리 이해하고, 빨리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필사는 정반대다. 천천히, 한 글자씩, 온전히 그 순간에 머물러야 한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고,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필사는 바로 그 느낌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처음에는 답답했다. 이렇게 느릿느릿 쓸 시간에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남의 글을 베껴 써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빠름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멈춤이야말로 가장 큰 용기라는 것을. 필사를 하는 동안 나는 완전히 현재에 머문다.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불안도 잠시 내려놓고 오직 지금 이 순간, 펜끝에서 피어나는 문장들에만 집중한다. 그 짧은 순간이지만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이다.

역설적이게도 남의 글을 베껴 쓰면서 나만의 목소리를 찾게 된다. 다양한 작가들의 문체를 따라 쓰다 보면, 어떤 문장에서는 마음이 뛰고, 어떤 표현에서는 눈물이 나고, 어떤 단어에서는 희망을 느낀다. 그런 반응들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다. "우는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우는 어른들을 열렬히 응원한다"는 정혜신님의 말을 따라 쓰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자신을 돌아보며 흘리는 눈물이든, 오래전 상처를 마주하며 쏟아진 눈물이든, 그 어떤 눈물이든 다 괜찮다는 말에 내 마음의 문이 열린다. 어떤 날은 시인의 서정적인 문장을 따라 쓰며 내 안의 감성을 발견한다. 또 어떤 날은 소설가의 날카로운 통찰을 옮기며 내 안의 이성을 깨운다.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며 삶의 의미를 묻기도 하고, 에세이스트의 일상적 성찰을 통해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타인의 언어를 빌려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과정에서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수많은 문장들이 내 안에서 발효되고 숙성되어 언젠가는 나만의 이야기로 피어날 것이다.

필사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하루 30분, 한 페이지, 때로는 한 문장만 써도 된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매일 조금씩, 천천히, 내 마음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작은 시간들이 모여 내 삶을 조금씩 바꾼다. 급하게 살던 나에게 여유를 주고, 무감각해진 나에게 감수성을 선물한다. 타인의 시선에만 매달려 살던 나에게 내 목소리를 찾아준다. 필사는 일상 속 작은 혁명이다. 소비하기만 하던 나에게 창조의 기쁨을 알려주고, 받기만 하던 나에게 나누는 마음을 깨워준다. 혼자인 것 같던 나에게 연결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 필사는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다. 매일 조금씩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햇볕을 쬐어주는 것처럼, 필사도 매일 조금씩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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