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겨울차 - 한국약선차꽃차연합회 다인들이 큐레이션한 가을 그리고 겨울 차 40선
이은주 외 지음 / 대경북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찻잔을 꺼낸다. 유난히 날이 서늘해진 오후, 창밖으로 낙엽이 지는 모습을 보며 물을 끓인다. 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고, 그 김이 창문에 닿아 희미하게 흐려질 때, 나는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시간을 마시는 일이고, 자연이 건네는 위로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누군가 정성스럽게 따고, 말리고, 덖어낸 잎과 꽃 과 열매가 뜨거운 물을 만나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잔을 들고, 향을 맡고,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삼키면 된다. 가을 차에는 여름 내내 쌓아온 것들을 내려놓는 힘이 있다. 뜨거운 계절을 견디며 단단해진 뿌리의 기운이, 선선한 바람에 익어간 열매의 달콤함이, 서리 맞기 직전 잎사귀가 품은 마지막 생명력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가을 차는 은은하다. 강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마치 가을 햇살이 따갑지 않지만 깊숙이 스며드는 것처럼. ^.^

어떤 사람은 메리골드 꽃잎이 찻물에 풀어지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기다린다. 노란 꽃잎이 물속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모습은 마치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는 꽃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 같다. 어떤 사람은 구절초 한 송이를 잔에 띄우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흐트러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또 어떤 사람은 로즈마리의 강렬한 향에 감싸이며 오늘 하루를 견딜 용기를 얻는다. 나는 가을이면 천일홍을 즐겨 마신다. 그 붉은 빛깔이 가을 석양을 닮아서일까, 아니면 말라도 색을 잃 지 않는 강인함이 부러워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일홍 차를 마시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어느 가을, 함께 걷던 길.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나눴던 소소한 대화. 그때 우리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지만, 그 시간이 특별했던 건 함께였기 때문이다. 천일홍 차를 마실 때마다 그 시간이 떠오른다. 색이 바래지 않는 꽃처럼, 기억도 바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계절이 주는 선물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꽃이 스스로 향을 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잎이 자신의 색을 풀어놓을 때까지 조용히 지켜봐야 한다. 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기다림의 기술을 알고 있다. 불의 온도를 조절하고, 시간을 견디며,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만 취한다. 그래서 한 잔의 차 안에는 사람의 정성과 자연의 시간이 함께 녹아 있다.

겨울 차는 가을 차와 다르다. 가을 차가 마음을 어루만진다면, 겨울 차는 몸을 다독인다. 추위가 깊어지면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찾는다. 그때 필요한 것은 속부터 데워지는 근원적인 열이다. 생강, 계피, 대추, 인삼. 이런 재료들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의지해온 자연의 난로였다. 발효생강차를 마시면 목구멍부터 위까지, 그리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열이 퍼져나간다. 처음엔 맵고 강렬하지만, 곧 달콤함이 뒤따라온다. 그 맛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몸이 풀어지고, 굳어있던 어깨가 내려오고, 얕았던 호흡이 깊어진다. 감기 기운이 느껴질 때, 온종일 찬바람을 맞고 돌아온 날, 나는 생강차를 끓인다. 그것은 약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돌보는 의식이기도 하다. 어머니 세대는 쌍화차를 끓였다. 당귀, 천궁, 백작약, 숙지황 같은 약재들이 오랫동안 우러나며 만들어내는 깊고 진한 맛. 쓴맛과 단맛이 교차하는 그 복잡한 풍미 속에는 '너의 기운을 북돋아주마'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차가 되었지만, 그때의 쌍화차는 특별한 날에만 마실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시험 전날, 아픈 뒤, 기력이 떨어졌을때. 쌍화차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회복의 신호였다. 겨울 차를 마시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 해를 정리하고, 지나온 날들을 반추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계절.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저절로 생각이 깊어진다. 올해는 무엇을 얻었나, 무엇을 잃었나, 누구를 만났고 누구와 헤어졌나. 그런 질문들이 차 향을 따라 피어오른다. 차를 배우고, 차를 만들고, 차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차는 삶의 방식이고, 세상을 이해하는 언어이며, 타인과 연결되는 통로다. 산과 들을 다니며 재료를 채집하고,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발효와 숙성의 시간을 견디는 과정. 그 모든 것 이 차를 만드는 일이다. 어떤 이는 15년 전, 가족의 건강을 위해 약초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작은 실험이었지만, 차를 마신 이웃들의 몸과 마음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점차 확신을 얻었다. 차는 나눌 수 있는 것이었고, 나누면 더 커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차를 만들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땅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 자연이 전하는 치유의 힘. 그것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가을과 겨울의 차를 마시며 나는 계절의 지혜를 배운다. 여름의 뜨거움을 견디고 가을의 풍요를 맞이하는 법, 추위가 와도 중심을 잃지 않고 봄을 준비하는 법. 차 한 잔 속에는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삶의 교훈이 녹아 있다. 그러니 오늘, 커피 대신 차 한 잔 어떨까. 우리 땅에서 자란 풀과 꽃으로 만든 차. 누군가의 정성과 시간이 담긴 차. 천천히 우려내고,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씩 마시며 계절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그런 시간이 있다면, 가을과 겨울은 조금 더 따뜻하고 의미 있는 계절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품격 있는 태도에 관하여
김종원 지음 / 오아시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하고,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선택하고, 어떤 태도로 세상을 대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품격 있는 태도에 관하여
김종원 지음 / 오아시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다섯 시,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언제부터 나는 '나 '로 살기를 그만두었을까. 언제부터 남들의 시선이 내 존재의 척도가 되었을까. 창밖에서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저 멀리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그들은 누가 먼저 노래하는지, 누가 더 아름답게 우는지 경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새벽 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맞이할 뿐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하나의 진실과 마주했다. 품격이란 완벽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넘어지지 않는 힘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는 용기이며, 상처받았음에도 다시 믿어보려는 선함이고, 늦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지금부터"라고 속삭이는 희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감옥에 갇혀 산다. 그 감옥의 이름은 '비교'다. SNS를 열면 모두가 행복해 보이고,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멋진 여행지에서, 누군가는 승진 소식과 함께, 또 누군가는 완벽한 가족사진과 함께 미소 짓고 있다. 그 순간 나는 작아진다. 내가 걸어온 길이 초라해 보이고, 내가 이룬 것들이 보잘것없어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완성된 10장을 보며 방금 시작한 나의 1장을 비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보이지 않 는 수많은 리허설이 있었을 것이고, 그 미소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물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가을날 저녁, 나는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크고 작은 나무들을 보았다. 키 큰 느티나무 옆에 작은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단풍나무는 느티나무만큼 크지 않았지만, 그 작은 가지 위에서 붉게 물든 잎사귀들이 석양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무는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각자의 계절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아름다움을 피워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다. 아픔을 삼키고, 분노를 숨기고, 슬픔을 감추는 것이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믿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쌓여 독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늦게 알게 된다. 몇 년 전, 나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관계가 깨진 적이 있다. 상처받았지만 괜찮은 척했고, 화가 났지만 웃으며 넘어갔고, 서운했지만 이해하는 척했다. 그렇게 쌓인 것들이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폭발했고, 그 파편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 만약 그때 조금 더 솔직했다면,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나는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 어"라고 말했다면,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더 깊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말한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라고. 사색하며 감정의 이름을 글로 써보라고. 나는 그날 이후로 작은 노트를 하나 샀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오늘 내가 느낀 감정들을 한두 줄이라도 적어본다. " 오늘 나는 불안했다. 프레젠테이션이 잘될지 걱정되어서." " 오늘 나는 기뻤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을 받아서." 이렇게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정리된다. 모호 했던 기분이 선명해지고, 흐릿했던 하루가 윤곽을 갖춘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세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철학적이고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살아가며 점점 그 의미를 체감하게 된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내 생각을 만들고, 내 생각이 내 행동을 만들고, 내 행동이 결국 내 인생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과 " 나는 오늘 조금씩 달라질 수 있어 " 라는 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는 문을 닫지만, 후자는 창을 연다. " 왜 나만 이래? " 라는 원망과 "이 경험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까? " 라는 질문 사이에도 우주만큼의 거리가 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언어로 그것을 담 아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나는 요즘 의식적으로 내 언어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힘들다" 대신 "도전적이다"라고 말하고, "실패했다" 대신 "배웠다"라고 표현한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억지스러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말이 바뀌니 마음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조금 더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되고, 조금 더 여유 있게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침묵이 불편해서 계속 음악을 틀고, 생각이 무서워서 계속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고요 속에서 일어난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세상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순간에, 우리는 비 로소 우리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저자는 고독을 내면의 도서관이 조용히 열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얼마나 아름 다운 비유인가. 우리 안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가득하다. 미뤄두었던 후회, 아직 쓰지 못한 가능성, 남들이 아닌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의 방향들. 그것들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만 펼쳐질 수 있다. 최근 나는 한 달에 한 번,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휴대폰을 꺼두고, 약속도 잡지 않고, 그저 나와 함께 있는 시간.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 스러웠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그 시간이 주는 평온함을 느끼게 되었다. 카페에 앉아 아무 목적 없이 창밖을 바라 보거나, 공원을 천천히 걸으며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냥 가만히 있는 것. 그런 시간들이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나 자신과 친해지고 있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다짐한다. 더 이상 남들의 속도에 나를 맞추지 않겠다고. 더 이상 비교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겠다고. 대신 매일 조금씩,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품격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가겠다고 다짐해 본다. 품격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하고,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선택하고, 어떤 태도로 세상을 대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은 생각한다 - 인간은 동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재정의되어 왔다. 석기시대 사냥꾼들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겼고, 동물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동물은 먹잇감만이 아니라 함께 생존의 전장을 누비는 동반자였다. 신석기 혁명 이후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동물은 이제 이용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육되고 길들여지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 관계의 변동에 그치지 않았고, 동물에 대한 인식의 전 환은 철학적, 종교적 사유 체계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일신교가 등장하면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특별한 존재로, 동물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로 규정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제시한 '로고스' 개념은 이성적 능력을 가진 인간과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웠다. 이 장벽은 2천년 넘게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며, 동물 착취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와 함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통찰이 도덕적 고려의 범위를 확장했다. 제레미 벤담은 문제는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받을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옹호했다. 20세기 들어 피터 싱어와 같은 철학자들은 '종 차별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 신경과학과 동물행동학의 발전은 이러한 철학적 논의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침팬지의 도구 사용, 코끼리의 애도 행동, 까마귀의 문제 해결 능력 등은 동물의 인지 능력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동물을 단순한 자극-반응 기계로 볼 수 없다. 그들은 감정을 느끼고, 관계를 맺고, 고통을 기억하며, 미래를 예 측하는 주체적 존재다. 현대인의 동물에 대한 태도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반려동물에게는 가족과 다름없는 애정을 쏟으면서, 동시에 매년 수백억 마리의 동물을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 생산하고 소비한다. 개와 고양이에게는 최고급 사료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돼지와 소에게는 평생 몸을 돌릴 수조차 없는 좁은 우리를 제공한다. 이 극명한 이중 잣대는 우리의 윤리적 체계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일관성이 없는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모순은 심리적 방어 기제를 통해 유지된다. 우리는 고기를 먹을 때 그것이 한때 살아 있던 생명체였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망각한다. 포장된 고기는 도축장의 현실과 단 절되어 있고, 우리는 그 단절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프레히트가 지적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축장 내부를 본 적이 없다."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현대 공장식 축산의 실상은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닭은 평생 A4 용지보다 좁은 공간에서 살다가 도축된다. 돼지는 새끼를 낳기 위해 임신 틀에 갇혀 움직일 수조차 없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분리되어 우유를 빼앗긴다. 이런 시스템에서 동물은 생명이 아니라 생산 단위, 상품일 뿐이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 착취 시스템이 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동물보호법은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면서도, '합리적 이유'가 있으면 허용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합리적 이유'의 범위는 너무 넓다. 경제적 이익, 과학적 연구, 심지어 취미 활동까지 도 합리적 이유가 될 수 있다. 매년 수백만 건의 동물 실험이 정말 모두 필요한가? 화장품 테스트를 위해 토끼의 눈에 화학 물질을 떨어뜨리는 것이 합리적인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채식주의자와 비건의 증가는 이러한 모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보다 동물의 권리 에 더 민감하다. 이들은 동물 착취가 환경 파괴, 기후 변화, 건강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육식 중심 의 식생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개인적 실천을 통해 변화를 만들려고 한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철학적 전환이 필요하다. 프레히트가 제안하는 '무지의 윤리'는 이러한 전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의 내면 세계에 대해 실제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소나 달팽이가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는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단순하게 동물을 인간과 비교하는 것을 넘어선다. 전통적 동물권 논의는 동물이 인간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기준으로 도덕적 지위를 부여했다. 침팬지는 인간과 유사하므로 높은 도덕적 지위를, 곤충은 그렇지 않으므로 낮은 지위를 부여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것도 여전히 인간 중심적 사고다. 새로운 윤리는 인간과의 유사성이 아니라, 각 생명체의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법적 차원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동물을 '물건'으로 규정하는 민법의 조항은 시대착오적이다. 동물보호법이 동물을 '공동 피 조물'로 인정한다면, 법적으로도 주체로 대우해야 한다. 이는 동물에게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생명권, 자유권, 고통받지 않을 권리 등 기본적인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일부 국가에서 이미 유인원에 게 특별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거나, 돌고래 포획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결국 동물 윤리의 문제는 동물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이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동물을 더 인간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을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 하버드에 오다 - 1세기 랍비의 지혜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버드대학교 강의실에 예수가 들어왔을 때, 그는 십자가도, 후광도 달고 오지 않았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먼지를 털고 들어온 한 명의 랍비였다. 하비 콕스가20년간 진행한 이 강의는 예수를 신학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윤리의 현장으로 데려왔다. 그곳에서 예수는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되묻는다. 1980년대 하버드가 윤리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배경은 아이러니하다.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사실과 논리를 배웠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사회로 나가 부정과 비리에 가담했다. 지식은 풍부했지만 판단력은 부재했고, 논리는 정교했지만 양심은 무뎌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하버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교육 시스템 전체가 '무엇을 아는가'에 집중한 나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방치해온 결과다. 콕스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예수라는 독특한 교사를 소환한다. 그런데 그가 소환한 예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익숙한 구원자가 아니다. 유대인 학생들은 그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전통을 잇는 예언자로 보았고, 불교도들은 자신을 희생하는 보살로 인식했으며, 무슬림들은 꾸란에 등장하는 선지자로 받아들였다. 예수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 윤리 교사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콕스는 강의에서 추상적 윤리 원칙이나 보편적 도덕 법칙을 강의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가 했던 방식대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탕자의 귀환, 잔치에 늦게 온 손님 등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 장치다. 현대 사회는 명확성과 효율성을 숭배한다. 매뉴얼이 있고, 가이드라인이 있으며, 정답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윤 리적 선택의 현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A와 B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때로는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옳거나 어느 정도 그른 상황에 직면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원칙을 암송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예수의 비유들이 지닌 힘은 바로 이것이다. 그 것들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부자 청년은 예수의 제안을 거부하고 슬픔에 빠져 돌아갔을까? 왜 형은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 못했을까? 왜 포도원 주인은 늦게 온 일꾼에게도 같은 임금을 주었을까? 이 이야기 늘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기존의 상식을 뒤흔들며,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강요한다. 콕스는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유대교의 미드라시 전통이나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처럼,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 속 인물이 되어보라고 한다. 그때 비로소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의 윤리적 딜레마와 공명하기 시작한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다루는 장면이다. 많은 학생들이 이 구절에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신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콕스의 해석은 신학적이기보다 실존적이다. 신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위기의 순간마다 개입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느낀 버림받음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경험이다. 우리 모두가 살면서 겪는 고독, 무력감, 절망의 순간을 예수도 똑같이 겪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종종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외롭다. 정답이 보이지 않고,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으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이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존재의 명확한 지시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고뇌했던 이들의 선례와 연대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은 신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적 취약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윤리적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는 정답을 가진 자가 아니라 질문 앞에서 떨었던 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던 자였다.

산상수훈에 대한 콕스의 해석 역시 생각해 볼만하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학생들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권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콕스는 온유함을 나약함과 혼동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온유함은 인내이고 신뢰이며,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는 것이다. 더 도발적인 것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버전이다. 거기서 예수는 가난한 자를 축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유한 자를 저주한다. 이는 하버드 학생들, 즉 미래의 엘리트들에게 불편한 메시지였다. 그들은 성공을 꿈꾸고 있었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가치 체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콕스는 이것을 금욕주의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가 만들어내는 권력 구조와 불평등이다. 부는 사람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고, 특권을 정당화하며, 타자에 대한 무감각을 낳는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런 구조에서 한 발 물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절실한 질문이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 더 많이 소유하는 것,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성공이라 배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가? 누구를 밟고 올라섰는가? 어떤 관계를 희생했는가? 예수는 이런 질문들을 회피하지 말 라고, 불편해도 직면하라고 말한다.

하비 콕스의 강의가 2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가 여전히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갈릴리에서 던졌던 질문들이 21세기 하버드 강의실에서도 여전히 큰 화두를 전달한다. 권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부와 성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폭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책은 기독교 신학서가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성찰을 위한 초대장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그가 던진 질문 앞에서는 동등하다. 우리는 모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하며, 그 선택의 결과를 짊어져야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