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5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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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만 같이 검토해보기로 하자.


"자동차들이 깊고 좁은 거리에서 얕고 환한 광장으로 질주했다."(문학동네 1권 11쪽)


"자동차들은 좁고 깊은 거리에서 얕고 밝은 광장으로 튀어 나갔다."(나남 1권 23쪽)


"차들이 좁고 깊숙한 거리에서 밝은 광장의 평지로 달려나왔다."(북인더갭 16쪽)


Autos schossen aus schmale, tiefen Strassen in die Seichtigkeit heller Plaetze.(원문)


원문을 보면 tiefen(깊은)과 Seichtigkeit(얕음)가 대비되는 문장이다. 문제는 '얕은 광장', 원문대로 하면 '(밝은) 광장의 얕음(Seichtigkeit heller Plaetze)'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북인더갭판은 아예 '얕음'이라는 표현을 평지라는 말로 의역해버렸으므로 논외로 한다면, 나남판과 문학동네판에서 '얕은'으로 표현된 말은 의미가 분명하지가 않다. 보통 '얕은'에는 '낮은'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광장 지역이 지대가 낮은 것처럼 독자들이 부지불식간에 인지하고 부드럽게 넘어가게 했다면 사실 그건 오역이다. 그렇게 되면 '낮은'으로 이해된 '얕은'은 '깊은'과의 대비를 이룰 수 없다.


이러한 대비를 살리는 한가지 독해방법은 시점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으로 해서 좁은 골목은 양쪽으로 건물이 높아 햇빛이 들어가지 못하는 깊은 그늘의 골짜기를 이루고 있고 반대로 광장쪽의 건물은 높이가 낮아서 그늘의 깊이가 '얕은' 덕에 길 위의 움직임이 잘 보이는, 밝은 느낌을 준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독자에게 주어진 독해방법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밖에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광장이 얕아서 밝다면 광장에도 얕으나마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게 된다. 결국 하늘에서 아래쪽을 내려다 보는 시점에서는 '얕은'이 '광장'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점을 위에서 아래를 보는 것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이 문장은 서술자로부터 먼곳인, 그래서 사물이 분명히 인지되지 않는 좁은 골목으로부터 서술자에게 '가까운' 밝은 광장쪽으로 자동차들이 쏟아져 나오는 원근법적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즉 '깊은'과 '얕은'은 서술자의 시점을 기준으로 '먼'과 '가까운'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곧 거리의 자동차가 마치 물속 '깊은' 곳에서 '얕은' 쪽으로 떠오르는 물체인 것처럼 묘사하는데 무질의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살려 부족하지만 나름의 번역을 제시해 본다면,


"자동차들은 저 깊숙한 협로로부터 얕은 곳인 밝은 광장을 향해 불쑥 불쑥 떠오르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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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hiessen(발사하다, 쏘다, 튀어나가다)의 과거형인 schossen 동사가 자동차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속도의 빠르기 보다도 급격한 변화를 표현하는 말이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자동차는 먼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늘에 갖혀 있다가 밝은 광장에 진입하면서 햇빛 아래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급격한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불쑥 불쑥'이라는 부사가 동원되었다.


**이 문장의 앞 부분은 소설의 가장 처음 부분으로, 대륙에 걸쳐있는 저기압이나 고기압 등의 움직임, 또한 천문학적 기상학적 설명 등으로 1913년 8월의 하루를 묘사하는데 할애되고 있다. 그러한 신의 관점(Gottesblick), 즉 전지적인 시점에서 지상의 한 위치만을 차지한 한 인간의 원근법적 관점으로 전환을 표현하는 것이 이 문장이다. 마치 갑작스럽게 한 인간의 육체에 갖힌 영혼의 입을 통해 소설이 시작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깊은'과 '얕은'이라는 표현은 작품의 서술이 전지적 시점에서 주관적 시점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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