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중간에 보개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 P21
가끔 나는우리 주위에 하나마나한 말이 너무 많이 떠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 해도 무난한, 어떤 상황에서 해도 대충 통하는 의례적인 말들은 편리하지만 게으르다. 어떤 모임에서 실컷 수다를 떨고 돌아오는 길에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와같은 이유일 것이다. 누구와 나눠도 상관없는 말이 아니라, 오로지 그 사람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P131
내가 사람을 대하는 첫 번째 기준이 그 사람이 가진 나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다 보니 스텝이 자꾸 꼬였다. 그때는 실망했을 때가 서로를 알아가기 가장 좋은 순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실망은 그 사람에 대한 업앤다운 게임에 불과하다. 나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업다운으로 영점을 향해가는 것뿐인데, 나는 상대가 외치는 다운이 무서워 내 숫자를 바꿔갔다. 나를 너무 좋게만 보는것은 나를 나쁘게만 보는 것만큼 안 좋다는 것을 몰랐다. 나를 한없이 좋게만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래의 나보다 좋게 보는 것은 내버려 두고 나쁘게 보는것을 바로 잡기에만 급급했다. 서로에게 현명하게 실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 P64
자랑을하는 건 아니지만,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에게 샘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괭이를 손에 쥐고 부지런히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지 않으면 창작의 수원原에 도달할 수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몸을 혹사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일일이 새롭게 깊은 구멍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활을 오랜 세월에 걸쳐 해가는 동안, 새로운 수맥을 찾아내고 단단한 암반에 구멍을 뚫어 나가는 일을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효율성 있게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의 수원이 메말라간다고 느껴지면 과감히 바로 다음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자연의 수원에만 의지하고 있던 사람은 갑자기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어도 그리 쉽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P72
나와 달리 세상에는 거절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거절 특강’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지만 가르쳐야 하는 건 거절이 아니다. 포기하는 방법이다. 나는 여러 가지를 초기하고 나를 자주 선택하곤 한다. 그게 별거 아닌 나의 비법이다. -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