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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성리학 이황의 성학십도 Easy 고전 9
조남호 지음, 신명환 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 제 3권에서 퇴계에 대한 몇 구절을 끌어다 놓는 것이 퇴계 이황에 대한 소개로 적절할 것이다.

“조광조가 공자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 접목시키려 하였던 실천적 제자라면 이퇴계는 공자의 말년 6년 동안에 집중된 학문과 사상을 발전시킨 동양 최고의 학문적 제자이다.(유림:79쪽)”

“퇴계는 평생 동안 79번이나 벼슬자리에서 스스로 사퇴하였다.. 그가 퇴계라는 호를 지은 것도 말년에 자신의 고향인 토계(兎溪)로 돌아와 마을 이름을 퇴계라 고치고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세상과 완전히 손을 끊겠다는 의지를 <논어>에 나오는 ‘조정에서 물러나다(退朝)’에서 따온 ‘물러날 퇴(退)’자를 사용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유림:80쪽)”

이런 퇴계가 68세의 나이로 이제 막 왕이 된 17세의 선조를 위해, 어린 왕이 명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든 소책자가 바로 <성학십도>이다. <성학십도>의 ‘성학(聖學)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학문을 의미한다. ‘십도(十圖)는 열 개의 그림’으로 성리학의 기본 원리 및 개념을 도표화 한 것이다. 즉 성인이 되기 위해 배워 나가야 할 성리학의 이론적 배경을 간단히 요약 정리한 요약집이 바로 <성학십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책 <그림으로 만나는 성리학: 이황의 성학십도>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추어 풀어낸 서적이다. 퇴계 이황은 청소년기의 선조를 위해 <성학집도>를 지었고, 이 <성학십도>를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맞게 가급적 쉬운 말로 풀어낸 것이 <그림으로 만나는 성리학: 이황의 성학십도>인 것이다.

이 책은 먼저 이황과 성학십도의 배경에 대해 설명한 후 성리학 그림책 성학십도를 읽어 들어간다. 10개의 그림이 말하는 바는 쉬운 말로 바꾸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주(세상)의 원리, 세상의 질서, <소학>, <대학>, 학문과 인간 관계의 원칙, 도덕적 완성을 위한 마음가짐, 유학의 핵심 사상인 인(仁)의 의미와 그 실천책, 마음의 구조와 마음을 다스리는 법, 공부하는 방법, 하루 공부를 위한 일과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며 논술을 위한 교양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반증하듯, <성학십도>에 대한 단순한 해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현대의 가치관이나 사회관과 비교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한 점, 기대승과의 사단 칠정 논쟁과 같은 주제를 통해 일본이 만들어 놓은 왜곡된 역사관에 대한 비평 등의 주제를 끌어내는 동시에 젊은이, 더 크게는 이론(異論)을 가진 상대에게 열려 있던 퇴계의 일화를 소개하는 등 여러 장점들이 눈에 띈다. 퇴계의 <성학십도>에 대한 책이자 결국 퇴계 이황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성리학은 사실 어느정도 교양을 갖춘 성인(成人)이라 할지라도 쉬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책 <그림으로 만나는 성리학: 이황의 성학십도> 역시 청소년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요체를 이해하려 든다면 <성학십도>의 요체를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멀게만 느껴지는 선현의 저작과 거기 내재된 사상의 일면을 중학생부터 쉽게 읽어보고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만도 칭찬을 아낄 수 없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의 목적은 시작을 위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한번 직접 읽어보지도 못하고 갈 과거의 수많은 위대한 사상과 저작들을 어떤 내용인지 감을 잡고 거기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한 시작을 위한 책이며, 따라서 청소년들은 물론 성인에게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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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 전2권 세트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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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헌책방에 갈때면 느끼게 되는 기묘한 느낌이 있다. 좁은 공간에아래에서부터 천정까지 가득 쌓여져 있는 책들 속에서, 오래된 책이 으레 내뿜는 아늑한 향기 속에서, 꼭 나만을 기다려 온 보물과도 같은 책을 만날 것과 같은 기대에 젖는다. 부흐하임은 바로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이다. 도시 전체가 서점으로 가득하고, 각 서점마다 가득히 책이 쌓여 있는 곳,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부터 지하에 가득 메워져 있는 책들.

그곳으로의 여행은 책의 첫 문장ㅇㄴ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로 시작된다. 단첼로트 숙부로부터 받은 원고의 가장 독창적인 문장 또한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이며, 숙부가 넘겨준 원고의 작가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는 미텐메츠의 모험 또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만화가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는 지은이의 약력을 증명하듯, 책 전체에는 기발한 상상력과 만화적 구성이 넘친다. 일단 우리의 주인공 미텐메츠 역시 린트부름 요새에 사는 공룡족의 일흔 일곱의 젊디 젊은(?) 청년이다. 공룡뿐만 아니라, 갖가지 동물을 연상시키는 등장 인물들, 지하에 사는 여러 종류의 괴물, 그리고 사람은 없는 곳이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결정적인 인물로 등장한 인간 등이 어우러져, 재미를 한층 돋운다. 책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삽화는 귀엽지는 않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다채롭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아무리 봐도 미텐메츠의 얼굴은 주인공 감은 아닌데 하면서도, 조금 모자란 듯한 그의 모습이 이번 모험에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듯 하다.

비록 글로 쓰여져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이라기 보다는 비주얼이 강한 영상 매체와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시각적인 묘사가 많다. 특히나 미텐메츠가 책으로 독살될 때, 두 페이지 가득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 있는 ‘당신은 독살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은 읽는 독자마저 좀 섬뜩하게 만든다. 내심 아직 책이 한권도 넘게 남았으니 미텐메츠가 죽을리는 없는데 하면서도… 마치 롤러 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박진감 넘치고 스피디한 전개가 이루어져 책의 남은 분량이 줄어 들수록 빨리 모험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과 남은 분량을 줄이고 싶지 않음 마음 사이에 갈등하게 한다.

하지만 한바탕 지적 모험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는 책 뒷표지의 말은 좀 무색한 감이 있다. 굳이 비교를 들자면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나 엘이에트 아베카시스의 ‘쿰란’과 같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지적인 모험은 없다. 진정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하세계에 유배당한 호문쿨루스의 존재가 출판 문화의 현실을 거의 직접적으로 얘기해주고 있을 뿐이다. 또한 상상력의 범위는 넓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에서와 같이 끝을 알 수 없는 상상력까지는 아니라고 굳이 흠을 잡아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상상의 세계는 – 비록 상상력을 어느 정도 한정시키겠지만- 곧 영상 매체로 소개될 것 같다. 내년에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니. 전체적으로 보면 이 책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 태어난 책 같아 보인다. 지은이가 시나리오 작가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책의 많은 부분에서 영화적 구성을 쉽게 눈치채게 된다. 한바탕 시원하게 미텐메츠와 함께 여행을 다녀 왔다. 이제 영화를 기다린다. 내가 책을 보며 눈앞에 그려낸 영상과 전문가들이 직접 그려내는 영상의 차이는 어떨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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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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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은이가 옛 선조에게 두들겨 맞은 죽비소리가 선방을 가득 채우고 문득 함께한 우리들의 정신에도 일침을 가한다. 이 책에는 방안 가득 퍼지는 향내처럼 마음 가득 울리는 죽비소리가 담겨있다. 모름지기 어떤 학문이든 어떤 경험이든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여기에 담긴 글들이 어떤 느낌으로 자신에게 와 닿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지극히 오묘한 말은 오래되어야 맛을 알게 되고, 낮고 가벼운 작품은 언뜻 보기에는 좋아보인다. 배우는 사람은 책을 볼 때, 마땅히 되풀이해 읽고 깊이 생각하여 글쓴이의 뜻을 얻으려고 기약해야 한다.”는 책 속의 말이 더욱 어울리는 글들이 가득한 동시에, 언제고 다시 펴서 읽어도 새로운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을 보면, 수백년이 흘러도 사람이란 존재를 관통하는 진리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눈도 밝고 두 손도 멀쩡하면서 게으름 부리기를 즐기는 자는 툭하면 소일消日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소일’ 즉 ‘날을 보낸다’는 두 글자는 ‘석음’惜陰 곧 ‘촌음을 아낀다’는 말과는 서로 반대가 되니 크게 상서롭지 못한 말이다.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일찍이 이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는 구절을 대하며 마치 직접 죽비에 맞은 듯한 느낌이다. 좋은 문장은 많으나 받아들일 내 그릇이 아직 크지 않으니 이 책을 읽으며 아쉬운 점이란 이런 것 정도이겠다. 몇 줄 되지 않는 치졸한 감상을 남기며, 다시 한번 나를 내리치는 죽비소리가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정신을 맑게끔 깨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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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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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한 것은 93년경 ‘일각수의 꿈’을 통해서다. 원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라는 다소 긴 제목인데, 감히 무라카미 일생의 역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루키 고유만의 특색 있는 글로 가득찬 소설이다. 특유의 쿨한 느낌의 글과 기발한 상상력은 나를 단숨에 하루키 팬으로 변화시켰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필두로 해서 ‘댄스댄스댄스’까지 이어지는 일명 양 시리즈 또한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국내에는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루키 자신이 이 책은 독자들을 위해서 쓴 책이라고 밝혔던 것처럼, 하루키가 어느새 자신만의 글쓰기에서 벗어나 수많은 독자들을 고려해야 될 만큼 인기도가 상승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책이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더불어 하루키에 대한 애정을 반감시키는 책이기도 하였다.

이후 하루키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이후 발간되는 수필집, 단편 소설 등은 이제 더 이상 구입 일순위의 책이 아니었다. 아마도 양 시리즈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인상이 너무 깊게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작가 데뷔 25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되었다는 After Dark도 내게 약간 망설임을 주었지만, 잠시 ?어본 줄거리는 내게 새로운 기대를 품게 하였다.

After Dark라는 원제가 한국어판에서는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어둠의 저기 멀리 있는 ‘저편’은 아니고 ‘어둠이 내린 후’ 혹은 ‘어둠 속’ 정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품어본다. 일본에서도 딱히 일어 번역 없이 카타카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 after dark로 의도한 의미가 어떤 단어와 부합될지는 모르겠다.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어둠이 절정에 이른 12시경부터 새벽이 올때까지 어둠 속에서의 여러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집에서 계속 잠들어 있는 언니를 필해 어둠속으로 나온 마리, 이런 마리가 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일은 현실을 크게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밤이 아니었다면 일어나거나, 들을 수 없었거나, 느낄 수 없었던 것이며 마리는 이러한 현실을 하룻밤새에 겪게 된다. 쿨하게 외부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시도하지 않고도 혼자서 꿋꿋할 수 있는 마리는 중국인 창녀, 모텔의 직원들, 다카하시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 맞추어 살아갈 수 밖에 없어서 지쳐 이제는 끊없는 수면 속으로 빠져버린 언니 에리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 나간다.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치 예전으로 돌아가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듯이 에리는 작품 내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지만 여러 공간을 넘나든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루키 특유의 기발한 상상은 더 이상 없다. ‘쥐의 소설에는 섹스 얘기와 사람이 죽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놔두어도 사람은 섹스를 하고 죽기 때문에, 당연한 일을 적을 필요는 없다던 쥐의 소설에 넘치던 상상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지독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는 현실과의 개연성이 아주 농후한 상상이라고 보아 주면 될 것 같다. 양 시리즈에서 꽤 쿨하지만 누구보다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주인공은 마리에게 애정을 가지고 마리와 에리의 화해를 도와주러 이 소설에서 드디어 다카하시라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이제는 보다 애정이 깊어진 시선으로 마리에게 접근한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 특히 불이 발견되기 전에 미명의 인류들은 해가 떨어지면 상대적으로 우월한 신체 조건, 후각 등을 가진 맹수들을 피해 나무위나 동굴 속에서 서로 꼭 끌어않은채 어둠에 적응한 눈을 치켜뜬 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려야 했을 지도 모른다. 밤은 편안한 휴식시간이 아니라, 견뎌내어야만 하는 두려움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기억들이 인류의 유전자속에 남아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의 발견으로 안전한 밤의 수면이 보장되고 또한 문명이 발전하면서 밤은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갔지만 밤을 새서 컴퓨터 업무를 봐야 하는 등장 인물이나, 창녀들, 모텔 직원들처럼, 어둠 속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박탈감에 불특정 대상에게 모진 폭행을 가한 시라가와는 새벽이 오는 것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며, 복수를 꿈꾸는 조직은 엉뚱한 곳에 대고 주절거리기만 한다.

어렸을 적 마리와 에리가 정지해버린 어두운 엘리베이터 내에서 서로 꼭 껴안고 있었던 것처럼,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껴안고 의지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다들 스스로의 어둠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카하시나 마리는 능동적으로 어둠 속에 뛰어들어 어둠을 대면하고 이겨내는 입장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어둠 속에 던져셔 어둠을 견뎌내어야만 하는 입장이다. 끝없는 수면에 빠져 있는 에리의 경우 시간적인 어둠의 의미는 중요치 않다. 그녀의 경우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삶 자체가 어둠이었으며 그 어둠을 밝혀줄 수 있는 가족과 마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 어둠을 피하기 위해 수면 속에 빠져든다. 이제 마리가 와서 그 어둠을 걷어내어주면 에리 또한 어둠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읽어본 하루키의 책이다. 예전 좋아하던 작품들에서 느껴지던 가깝지만 나와 타인과의 경계는 확실하게 구분되던 쿨한 주인공들은 이제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하루키 자신이 그만큼 연륜이 쌓여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된 것일까? 전형적인 하루키 스타일의 등장인물로 보이는 마리는 다카하시와 중국인 창녀, 모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혼자만의 쿨한 세계에서 벗어나 교류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하루키와의 교류의 문을 나도 열어본다. 갖가지 은유나 비유, 혹은 고급스러운 표현들을 가져다 칭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루키는 하루키면 된다. 하지만 예전의 하루키는 아닌 것 같다. 10여년 전 처음 만났던 하루키는 이제 내개 조금 색다르고 원숙한 모습으로 새로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나도 닫아두었던 문을 다시 열고 귀기울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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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잡담의 기술
아키니와 도하쿠 지음, 박순분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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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하루를 지나면서 많은 대화들 속을 오고 간다. 회사 동료, 가까운 친구와의 통화, 연인과의 대화 등. 건실한 주제를 담고 있다기 보다는 생활의 일부로 하는 잡담들이 대부분인 경우가 많다.

 

그런 잡담을 하는데 무슨 기술이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앞선다. 그렇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잡담은 우리가 편히 하는 잡담의 범주와는 약간 차이가 있는 듯하다. 우리가 친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하는 대화는 이 책에서 얘기하는 잡담의 범주와는 거리가 멀다. 이 책이 대상으로 삼는 독자는 굳이 따지자면 비즈니스 맨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업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평소 말하기에 어려움을 겪었다던지 하는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유익한 책인 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처음의 서먹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한 잡담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규칙들을 가벼운 말로 접근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잡담은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화제를 전제로 해야 한다거나 잡담의 요령은 천천히 여유 있게, 옆으로 대화를 넓혀가는 데 있다는 등의 문장은 익숙한 사람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새 몸에 배인 것이겠지만, 정확한 언어로 옮겨 놓았다는 데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화의 실마리를 찾는 기술, 대화를 넓히는 기술, 화제 이어가기, 이야기가 막혔을 때 돌파하는 기술 등 만일 평소에 업무상 만나는 사람이 많은 직장에 근무하거나, 대화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실전에 써먹을 만한 많은 유용한 규칙들이 책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그 실천에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거나, 높은 수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 한 구절 읽고 가면 내일 당장 활용해 볼 수 있을 정도로 간단 명료하다.

 

대략 70여개 정도의 규칙들이 거의 1-2페이지 내외로 설명되어 있는데,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매번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에서 대화를 끌어나가는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을 펴서 읽어도 좋을 것이고, 한번 죽 읽고 나면, 목차만 보고도 아 이런 거였지 하고 쉽게 되새길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런 것쯤 다 알고 있었다 라고 얘기하기는 어려운 기술들이기도 하다.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서 작은 크기의 문고본 정도로 나왔으면 딱 좋은 책으로 보이는데(일본에서는 문고본으로 출간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출판문화에 맞추다 보니, 하드커버에 고급종이에 가격도 평균선이라, 약간 언발란스한 느낌마저 든다는 점이 아쉬운 점으로 들자면 아쉬운 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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