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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솔아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티저북을 받아보았다.
2022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 등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소설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궁금했던 작가였기에 티저북 서평단을 신청했고, 그렇게 받아본 티저북에는
전체 소설을 구성하는 네 개의 부 중 두번째 부인 〈관찰의 끝〉이 실려 있었다.
첫번째 부도 아닌 두번째 부를 티저북에 수록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티저북을 다 읽고 나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소설 자체가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구성이 아니기도 하고
〈관찰의 끝〉에는 특히 어느 독자라도 공감할 만한,
언젠가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든 장면들이 많아서가 아닐지.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에는 각 부의 주인공들이 모두 등장한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네 주인공은 한 기획 전시를 통해 얽히게 된다.
티저북에 실린 2부의 주인공 '우주'는 어릴 적부터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본모습을 감추고, 연애를 시작하고서는 상대의 필요에 자신을 맞추는 인물로 소개된다.
사회적인 시선에 의해, 혹은 누군가의 기대로 인해 온전한 '나'를 내놓지 못하고
다른 틀에 나 자신을 끼워맞추어본 경험이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우주 역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분투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고 나니 소설을 읽기 전부터 마음이 갔다.
아홉 살부터 스물여섯 살까지. 소설은 우주의 시간을 따라가며
여성으로서 각 나이대에 겪게 되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또래에게 동화되고자 하는 심리 등을 세세하게 묘파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여자다움'의 강요는 아이들의 세계에도 그대로 답습된다.
그 세계에 속하기 위해 개성이 거세된 채 자라나는 우주의 모습을 보며 씁쓸함이 들었다.
남자애처럼 머리가 짧아서. 인형 놀이가 아닌 공차기를 좋아해서.
외형이나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놀림의 대상이 되거나
배척 당하곤 했던 어릴 적 교실의 풍경이 새삼 폭력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호모'라는 놀림을 받은 어린시절 이후
자신의 욕구보다는 타인의 기대에 맞춰온 우주의 삶의 방식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둘만의 세계에서는 행복하지만 남들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관계.
우주와 선미의 사랑은 동성애를 향하는 편견 어린 시선에 의해 방 한 칸의 크기로 축소되고 만다.
"네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선미의 말에 상처 받으면서도,
화를 내는 대신 남자처럼 행동하기를 택하는 것 역시 그러한 시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한.
그런 우주가 처음으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전시를 함께하는 석현, 보라, 정수, 화영과 시간을 보내면서부터이다.
그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 대화를 하는 방식, 산책을 하는 방식을 관찰하며
성숙하고 건강한 관계 맺기를, 타인과 나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나를 지키는 일을 배워간다.
초반에는 우주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듯한 선미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또 소설에 드러나지 않은 선미의 시간을 떠올려보며 차츰 이해가 갔다.
우주가 선미를 견딘 만큼 선미도 우주를 견뎌왔다는 걸.
선미에게 흔치 않게 찾아온 행운의 상징인 '셰이크'를 우주가 둘 곳이 없다는 이유로 갖다버린 대목에서도 느껴졌다.
어떤 단어로도 정립되지 않는 관계를 놓지 못했던 둘은
그 정립되지 않음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끝이 난다.
도무지 끊어질 수 없을 것 같던 둘의 관계가 무사히 끊어진다.
"한 명이 무너진 그 순간에 다른 한 명은 무너지지 않"는 엇갈림으로.
두 사람이 보다 건강하게, 각자 몫의 행복을 누리며 남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부만 읽었는 데도 밀려오는 감정과 여운의 밀도가 높아
소설의 나머지 분량이,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기를 주고 받는 사이.
소설 속 네 사람의 관계의 온도가 가을 날씨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맹렬했던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저녁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많은 관계 속에서 나는 얼마나 '나'인가를 되짚어보며 읽고 싶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