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연인 소설Q
이승은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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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집 『오늘밤에 어울리는』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이승은의 첫 장편소설 『도망치는 연인』이 출간되었다.

익숙한 저자는 아니었기에 김미월 소설가의 추천사를 유심히 읽어보았다.

그중 "가진 것 없이 가질 것도 없이 떠도는 두 연인이

어느 겨울 몰아치듯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내몰리는 이 이야기"

라는 소개에 마음이 동했고

"이 작가는 첫 장편에서 이렇게 다 보여주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과

첫 장편이 이 정도인데 무슨 걱정이랴 싶은 마음이 즐겁게 충돌한다."

라는 찬사에 기대하고 읽어도 좋을 소설이겠구나 싶었다.

한겨울, 매서운 한파만큼 시리고 혹독한 사건들이 두 주인공에게 벌어진다는 점에서

표지의 서늘하고도 강렬한 이미지가 이야기와 잘 어우러진다.

소설의 분위기는 무거운 편이나 문장의 호흡이 길지 않아 쉽게 읽혔고

"몇 장만 읽고 자야지 했는데 단숨에 다 읽었다"는 김미월 소설가의 말처럼

책을 펼친 뒤 얼마 안 되는 시간 만에 독서를 마쳤다.


*


"근데 우리가 왜 그렇게 놀랐지."


지수는 예나를 돌보며 머무는 영인의 펜션에서

이유 모를 불안과 강박을 느낀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던 아르바이트가 몸에 배어서인지

편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돈을 벌고 있다는 감각이 낯설어보인다.

시터 일이 차차 익숙해진 지수는

배관을 고치러 온 테오에게 영인이 허락했다며

냉장고 속 음식을 마음껏 대접하고 나눠먹는다.

그러나 밖에서 들려온 영인인 듯한 인기척에

마치 죄라도 지은 듯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곧 그렇게까지 놀란 본인 스스로에게 의문을 느낀다.

아마도 단순히 냉장고 속 음식을 넘어 고급 펜션에서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낸다는,

결코 내 것이 아닌, 내 것일 수 없는 감각들을

주인이 없는 새에 누리고 있었다는 죄책감이 아니었을까.


"돈이 많으면 뭐가 좋은 줄 알아?

돈이 많으면 벌레랑 싸울 필요가 없어.

벌레랑 싸우는 대신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 107p 중


테오는 등유를 섞어 기름을 빼돌리자고 한 정사장의 제안이

퇴직금을 주지 않고 자신을 내쫓기 위한 박사장의 계략이었음을 알고 분노한다.

그런 테오에게 다가선 지수는

돈 때문에 머리 아파했던 숱한 순간들을

'머릿속의 벌레와 싸우는 시간'이라고 일컬으며

더는 벌레와 싸우지 않기 위해

박사장이 훔쳐간 돈, 아니 시간을 되찾아오자고 제안한다.

어찌 보면 정당한 듯한 행위이지만 결국은 범죄이다.

벌레와 싸워야 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지수와 테오를 나쁜 선택으로 내몬 것 같아

안타까우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저를 믿으셨어요? 저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편했던 거 아니에요?"


영인과 지수는 사회적 위치도, 경제적 수준도 다르다.

그러니 사는 세계도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을 실감하는 순간은

영인보다는 지수에게 보다 빈번하게 찾아온다.

비싼 목걸이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제 것처럼 찾아 돌려주려 했지만

영인의 목에 손쉽게 채워져 있던 새 목걸이를 발견했을 때.

자신의 나이인 스물일곱에는 무엇을 했냐는 물음에

토론토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다고 답했을 때.

나와의 다름을 체감하는 순간들이 모여

지수는 영인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대신 침묵을 택하게 되고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게 된다.

어쩌면 지수는 처음부터 위 문장처럼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예나와의 시간이 즐거웠고,

자신에게 예나를 믿고 맡긴 영인에게 고마움이 들었을 것이다.

나쁜 상황이 연속되며 비뚤어진 마음이 안타깝다.


*



그럴듯한 선택지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혀서 흔들리던 마음을 내어주었다면

그래서 '어제'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오늘' 하고 말았다면

후회하고 또 후회할까. 아니면 후회하지 않을까.

괜찮아. 괜찮은 거야, 속삭이다가

너. 너 때문인 것 같아, 곁에 있는 사람이 미워질까.

끝내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싫어지고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이 사라져간다면

그때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작가의 말 중


『도망치는 연인』은 평범했던 두 연인이

'나쁜' 선택을 하게 되며 삶의 궤도가 틀어지는 이야기이다.

테오와 지수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사랑과 꿈을 품은 사람들이었고

"누군가를 도왔다는 사실에 온종일 기분이 좋았"던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살기 위해 나빠져야 했다.

박사장이 촉발시킨 악의가 테오에게,

다시 박사장에게, 또 다시 테오에게 돌아가며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상상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보다 많았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왜 나쁜 일들은 약자에게 유독 자주 일어나는 걸까.

소설을 읽으면서도, 뉴스에서 다종다양한 비극을 접할 때에도 든 생각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행한 일을 두고도 어쨌든 '범죄는 범죄'라고

딱 잘라 결론내리기가 망설여졌다.

물론 돈을 훔치고 사람을 다치게 한 둘의 행위를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 우리는 또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이들이 내린 선택이 단지 온전한 의지로서의 선택일지.

가진 자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된 사회의 시스템이 이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교묘히 선택지를 앗아간 것은 아닌지.

소설 곳곳에 자리한 아이러니도 흥미롭다.

테오와 지수는 자주 누군가를 돌보는 입장에 놓인다.

아픈 아버지를, 다친 영인을, 영인의 딸 예나를, 공격 당한 선욱을.

정작 생존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두 사람인 데도

자주 이러한 입장에 놓이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거나

시급 만 원, 백화점 상품권 등으로 보상받는 상황이 왠지 씁쓸했다.

나쁜 일들만 이어지던 어느날

테오는 끝내 지수에게 이별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서로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런 테오에게 지수가 건넨

"나랑 헤어지면, 넌 잘 지낼 것 같아? 잠을 푹 잘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헤어지는 건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라는 말이 마음 아팠다. 잠을 푹 자는 일이 헤어지는 일보다 어려워진 두 사람의 처지가.

그렇게 그들은 끝끝내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한다.

함께하기로 한 결정은 서로에게 구원일까 해악일까.

섣불리 판단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한겨울 폭설에도 온기를 나누며 장식용 전구 하나로도

어느 연인 못지 않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둘을 기억하기에

그저 응원을 보내고 싶다.

테오와 지수, 하나가 아닌 둘이기에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더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고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는 밤을 되찾기를 바라본다.



*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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