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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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듯하고 유쾌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는 응원의 목소리,

"잘하고 있어"

스스로 조금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지나치게 현실에 발붙인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오해였음을, 이번 소설집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각 단편들의 폭발하는 핍진성에 사로잡한 채

이틀 만에 소설집을 모두 읽었다.

너무 자잘하고 자세해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그러나 왜인지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담긴 소설들이었다.

한편 지난 7월 28일, 장류진 작가님의 『연수』 북토크에도 다녀왔다.

당시 풀어주신 『연수』에 대한 이야기들 중 인상 깊었던 대목들을

각 단편들의 리뷰와 함께 공유해보려 한다.


〈연수〉

신규 프로젝트로 인해 못하는 운전을 다시금 시작해야 하는 직장인 주연이

중년 여성 강사에게 운전 연수를 받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향, 무례하게 느껴지는 강사의 언행에 경계심을 갖던 주연이

연수를 거듭하며 차츰 마음을 여는 과정이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운전이든, 삶의 방식이든,

'나는 못'한다고 굳게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마음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는 모습이 좋았다.

모두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정답인 삶도 없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맞는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길목에서,

서로를 향해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주면 되는 것 아닐까.

나는 그럴때마다 겨우 이런 일이,

결국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되어버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기쁜 순간씩이나 되는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40p

〈펀펀 페스티벌〉

원하는 기업 입사 시험의 3차 관문, 합숙면접에 들어간 취준생 '지원'의 이야기이다.

읽으면서 <슈퍼스타K>라는, 예전에 방영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떠오르기도 했다.

면접 마지막 날 열리는 '펀펀 페스티벌' 공연을 준비해야 하는 조원들의 상황이

꼭 <슈퍼스타K>의 조별 미션을 연상케 했다.

'악마의 편집'으로 악명 높았던 해당 방송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장면 중 하나가

경험을 무기로 조원들을 휘두르는 목소리 큰 리더와, 그에 맥을 못 추고 휘둘리는 조원들이었는데

리더 '찬휘'와 지원을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의 모습이 이에 부합했다.

그런 와중에도 지원은 부단히 노력한다.

연습이 수월하게 흘러가도록 상황을 살피고, 갈등이 생긴 팀원들 사이를 중재하며…

만약 이게 방송이었고, 어느 카메라맨이 이러한 모습을 포착해 방송에 내보냈다면

지원은 시청자들의 호감과 응원을 얻어 생방 무대까지 진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원의 이런 노력을 알아주는 건 지원 자신뿐이었다.

'결과'가 아닌 '과정' 속 지원자 개개인의 모습을 세심히 알아봐주는 이는 없었다.

지원의 모습을 보며 공감되기도, 그래서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먼 훗날, 자신을 위축시켰던 찬휘의 말은 무시한 채

'내 쪼대로' 노래를 부르는 지원의 모습이 통쾌하고 환했다.


그건, 크게 망하진 않을 거라는 이야기니까.

역시 대박보다는 폭망하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61~62p

〈공모〉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운다는 '천사장'이 운영하는 술집 '천의 얼굴'.

남성 상사들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드나들어야 했던 그곳을 주인공은 싫어했다.

별맛 없는 안주들도, 천사장의 클리비지도, 짐작 가는 인기 이유도 모두 싫었던 주인공은

본인의 팀을 꾸리기 시작하면서 천의 얼굴에 발길을 끊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을 끌어주던 상사 김상무에게

난데 없는 인사 청탁을 받게 되는데, 그 지원자가 천사장의 딸이며

천사장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들 듣고 왜인지 마음이 요동친다.

남초 회사에서 자신의 존재를 축소시키고

자연스레 미래 역시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던 주인공이

생각지 않게 오래 회사에 남게되면서

사내 분위기를 쇄신하는 한편,

떠나버린 여자 후배들을 떠올리는 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주인공에게 천사장의 딸 세원은

한눈에 알아본, 다신 놓치고 싶지 않은 '아기 새'였기에

윤리 의식과, 개인적인 욕망 사이에서 크게 갈등하게 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와,

주인공의 선택에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또한 북토크에서 마지막 장면에 관해

하나의 해석을 내놓기 보다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요?'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으시다는 작가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본인이 창작한 인물들, 이야기이지만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대상으로

바라보시려는 거리두기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수능을 다시 본다고 했다, 수능을.

그건, 인생을 그렇게까지 리셋하고 싶을 정도로 이곳이 싫다는 말이었다.

내가 데리고 있던 애가 그런 마음을 내내 품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145p

〈라이딩 크루〉

말이 필요없는 화제작(?), 액자식 구성의 우당탕탕 소동극이다.

라이딩 크루를 운영하는 크루장 주인공은

크루 멤버 이슬과 잘 해보려는 흑심을 품지만

새 멤버 영입으로 상황이 의도치 않게 흘러가게 된다.

참 지질하다, 싶으면서도 끝에가서는 연민이 들 지경인 주인공의 행보에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 크게 웃은 것 같다.

나는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벌써 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고,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224p 중에서


〈동계올림픽〉

역대급 한파가 닥친 설 연휴, 인턴기자 마지막 과제로

한국 쇼트트랙의 미래라 불리는

'백현호' 선수 자택 취재를 가게된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온몸이 얼 듯한 날씨도,

전화기 너머 묘한 압박을 주는 부모님도,

힘겹게 찾아간 자택 안 선배 기자들의 눈초리도,

쇼트트랙 경기가 펼쳐지는 빙상장 마냥 냉랭하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 따뜻한 떡국을 대접해주는 백현호 선수의 어머니,

꿈속에서의 다정하고 화목한 가족들,

정신을 잃은 '나'를 집에 데려와 롱패딩을 입혀 보내는 누군가의 부모님,

그들의 환대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던 주인공을 조금이나마 녹인다.

추운 겨울 거리를 헤매던 주인공이 환상적인 꿈을 꾸게 된다는 점에서

'성냥팔이 소녀'가 연상된다는 이야기가 북토크에서 나왔다.

동화의 결말은 모두가 알고 있듯 소녀의 죽음이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죽이는 대신 따뜻한 옷을 입혀주고 싶었다는

다정함이 물씬 느껴지던 작가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어떤 흐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미라와 라라〉

서른두살에 입학한 국문과 최고령 장수생, '미라'를

같은 과 주인공의 시점에서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미라는 회사를 관두고 소설을 쓰겠다며 국문과에 들어온 인물이지만,

형편 없는 소설만 써내는, 합평에서도 '깍두기' 같은 존재이다.

그런 미라가 '창작 여행'으로 그리스 크레타 섬에 다녀온 뒤

완전히 달라진 소설을 써와 모두를 놀래킨다.

대체 미라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잘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웠던 경험이 있는 누군가라면 크게 감응할 소설이다.

남들은 모두 말리지만 내게는 너무도 '귀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소설은 그 일을 끝끝내 놓지 못한대도 함부로 미련하다며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고,

결국 포기한 채 다른 길을 걸어간대도 이를 실패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북토크에서 소설 속 인물들에 작가님 본인이 투영되었다는 사실과

실제 경험담이 녹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왠지 더 마음이 갔던 소설이다.

만약, 첫 소설이 크게 화제되지 않았더라도 계속 소설을 썼을 것 같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계속 썼을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하시던 작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들의 뭐라든 세상이 반응이 어떻든

내게 '귀하고 중요한 일'이기에 계속 해나가는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그래도 나한테는 이게 제일 귀하고 중요해. 너처럼

329p


돌아가는 원리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무언가 출력되는 조그만 기계.

작가의 말에 쓰신 본인에 대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일상의 단면들을 주의 깊게 포착해두었다가

놀라운 이야기들로 파생시키는 작가님의 앞날을 힘껏 응원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연수' 중에 있다.

삶이라는 초행길을 더듬 더듬 나아가는 초보 운전자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정답만 골라내는 사람은 없다.

때론 길을 잘못 들어 돌아가기도 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내가 원했던 곳이 아님을 깨닫기도 한다.

그럴 땐 그저 유턴 지점을 찾아 돌아가면 된다.

그러니 멀리 앞서가는 차를 보며 조급해 할 필요도,

탄탄대로 같은 옆 차선을 보며 부러워할 필요도 없이

빠르진 않더라도 차근 차근, 나만의 길을 가면 될 뿐이라고 소설들은 말해준다.


*창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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