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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103 소설Y
유이제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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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검은과부거미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터널에서만 살아온 주인공 다형은 무피귀를 피해 섬 깊숙이 들어가면서

뜻밖의 인물, 그리고 사실 들과 조우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며 섬을 장악한 무피귀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 섬에서 생존자들을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궁금한 점들이 많았는데

읽다 보면 대부분 해소가 되고, 설정들도 굉장히 흥미롭다.

사실 초반에는 열여섯살짜리 여자 아이 혼자

500여명에 달하는 터널 속 사람들의 생존이 걸린 여정에 나선다는 설정이

(게다가 어떤 어른 하나 만류하지 않는다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지만

극한의 상황이 닥치면 위험부담을 누구에게라도 떠넘기고 싶어지는 치졸한 심리나

다형이 이미 터널 안에서도 많은 일들을 도맡아왔고,

사람들은 거기에 익숙해져 그런 다형을 의지해왔을 상황을 헤아리다 보니

그리 말도 안되는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널 안에서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황필규가 소설의 대표 빌런 중 한 명이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쥐와 구데기를 먹으며 연명해가는 와중에

자신과 자식들만 배불리 먹으며 살이 올랐다는 대목을 읽으며 눈살이 찌푸려졌다.

게다가 개인적 원한으로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다형을 사지로 몰려는 점도...

결말에 다다라 자신의 인간성에 걸맞는 최후를 맞는다는 점이 통쾌했다.

같은 장르에서 종종 등장하는 클리셰가 소설에서도 등장하곤 하는데

(알고보니 다른 생존자들이 있었다는 것, 괴물의 변종이 있었다는 것 등등)

클리셰를 묘하게 비껴간 장면들도 많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예컨대 승하를 따라 바리섬으로 간 다형을

사람들이 굉장히 적대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무피귀 감염 위험성)

생각보다 따스히 환대하고 호의를 베풀어주는 다정함 같은 것들.

또 수용소에서 만난 준익과 다른 '언더원'들의 모습도.

따라서 무피귀와의 전투가 아닌 인물들이 유발하는 스릴감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중간 중간 적절히 긴장감을 유발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중후반부에 '조태관'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반전과 더불어

굉장히 크리피한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소설은 무피귀에 대한 묘사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3m가 훌쩍 넘는 거구에 근육과 뼈가 드러나는 피부, 돌출된 안구라니...(ㄷㄷ)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 비주얼인데다 이어지는 추격 상황들도 생생하게 그려져

더욱 공포감을 느끼며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스위트홈>도 그렇고 크리처물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충격적인 괴물의 '비주얼'이 아닐까?

만약 영상화가 된다면 구현될 '무피귀'의 비주얼 역시

여느 크리처물 속 괴물들 만만찮게 공포스러울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반무피귀 '준익'이다.

무피귀들에게 쫓기다 위험에 처한 다형과 승하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러나 반은 괴물이고 반은 인간인 비주얼로 충격을 주었던 준익.

그를 통해 과거 무피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반무피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 '싱아'를 정성껏 보살펴 왔는데

다형과 승하가 찾아오자 위 대목처럼 이야기하며 싱아를 부탁한다.

실험의 희생양으로 인간도 괴물도 아닌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인간성'만은 상실하지 않은, 인간보다도 인간같은 괴물이라니...

다형과 사람들이 내륙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고 나서도

섬에 남아있을 준익을 포함한 반무피귀들이 눈에 밟혔다.

'언더원'으로 자신들을 칭하며 인간과 소통 가능한 이들과 인간과의 공존은 불가능한 걸까...

이성을 가졌지만 육체 능력은 초인적인 이들 존재가 무피귀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키가 될 법도 한데...!

모쪼록 이 궁금증을 풀어줄 다음 이야기가 얼른 나와주었으면 싶다.


소설 중반, 공포의 대상인 무피귀가

인간들의 욕심이 초래한 결과였음이 밝혀진다.

또 때로는 괴물 보다 더 괴물같은 인물들이 위험을 야기하기도 한다.

긴박하게 벌어지는 괴물과의 사투, 액션신과 더불어

절망적인 상황 속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인간 군상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이다.

더불어 끝끝내 '우리'를 선택하며 절망을 물리치는 이들의 모습도.

희박한 희망 속, 인간답게 살아남는 일은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을 버려야만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지켜야 할 대상을 나에서 우리로 확장시킬 때라야 비로소 연대는 가능해지고,

희망이 싹을 틔울 수 있음을 소설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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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 - 제4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우수상 수상작
김윤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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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4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소설상 우수상 수상작, 『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를 읽어보았다.

제목을 보자마자 호기심이 들었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열아홉 살 주인공이 집을 두고 학교에서 지내게 된 사연이 궁금해져 서평단을 신청했다.

고등학교 3학년 하면 자연스레 수능, 대학 입시와 같은 단어들이 함께 떠오른다.

모두가 인생의 '중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으는 때.

꼭 수능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목표에 맞게 전력투구해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준영은 편안하고 안전한 집이 아닌 학교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학교가 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무엇인지,

혼자라고 생각한 학교에서 자꾸만 들리는 기척의 정체는 무엇인지

본책을 읽어보며 확인할 수 있었다.

제대로 몸을 뉘일 곳도 없이, 든든한 끼니를 챙겨 먹지도 못하며 지내는 와중에도

자신만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준영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걸려서 탈이 날 정도의 물건은 그대로 두고

열쇠를 사용하되 도둑질은 하지 않는 등.

또 전교 1등의 노트를 갖다달라는 지혜의 제안에 대해

노트를 찾더라도

"거기에 1등의 숨기고 싶은 비밀이나 치부가 적여 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런 건 추잡한 게 아니라, 선을 넘는 거다."

라고 생각하는 반응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올곧았던 준영이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세운 규칙들을 하나둘 깨며 무너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열쇠를 얻어 학교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된 후

기가실은 부엌, 과학실은 세면대, 보건실은 손님방 등

학교 안 구역에 명칭을 붙이는 모습이 10대다워 귀엽다가도

안쓰러운 마음이 치솟았다.

또한 소설을 읽으며 누군가의 경험담을 듣는 듯

현실적인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라는 감상이 들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나, 인물들이 내비치는 말과 행동, 생각 같은 것들이

정말 그시절 우리의 모습 같다고 느꼈다.

친구 관계, 대학 입시, 연애 등 고등학교 시절 일상을 채운

관심사와 고민 들이 다시금 생생히 떠오르는 듯했다.

조그만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고, 여유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앞섰던 나날들.

이제는 모두 건너온 그 시간을 회상하는 기분이 생경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두 인물은 선생님과 두홍이다.

급식을 못 먹게 된 준영에게 장학금 명목으로 급식을 제공해주고,

원서비는 걱정 말라며 입시를 도와주는 선생님을 보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어른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말 못할 사정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준영에게 한결같이 다가와주며

곁에 함께하는 두홍을 보면서도 정말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도움과 관심이 준영이 자신의 자리로 무사히 돌아오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중간에 책장을 넘긴 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은 장면이 있었는데

정말 웬만한 공포 소설보다 무서운 연출(?)이었다ㅠㅠ

아마 책을 보신 분들 모두 공감하시지 않을까 싶은..또각의 향연👠

입시, 관계, 가족 등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를 날카롭게 담아낸 동시에

서스펜스 넘치는 전개로 흡인력 있게 읽히는 소설이다.

동시에 지나간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며 반갑고 그리운 마음,

위로 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현재 이 시절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도,

성인들도 공감하여 감명 깊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

이 이야기가 "벼랑 끝에 몰린 아이들이 서로를 말려 주는 이야기"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인상 깊었다.

소설 속 아이들이 보여주는 "서로를 말려 주는" 마음이 참 값진 것 같다.

준영이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엇나간 선택을 하려는 소미를 말릴 때,

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해주었으면 싶었던 말들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상대가 처한 상황을 나의 상황처럼, 상대가 겪는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대하는 마음이

잠시 길을 잃은 모두를 '홈'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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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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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티저북을 받아보았다.

2022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 등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소설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궁금했던 작가였기에 티저북 서평단을 신청했고, 그렇게 받아본 티저북에는

전체 소설을 구성하는 네 개의 부 중 두번째 부인 〈관찰의 끝〉이 실려 있었다.

첫번째 부도 아닌 두번째 부를 티저북에 수록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티저북을 다 읽고 나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소설 자체가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구성이 아니기도 하고

〈관찰의 끝〉에는 특히 어느 독자라도 공감할 만한,

언젠가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든 장면들이 많아서가 아닐지.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에는 각 부의 주인공들이 모두 등장한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네 주인공은 한 기획 전시를 통해 얽히게 된다.

티저북에 실린 2부의 주인공 '우주'는 어릴 적부터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본모습을 감추고, 연애를 시작하고서는 상대의 필요에 자신을 맞추는 인물로 소개된다.

사회적인 시선에 의해, 혹은 누군가의 기대로 인해 온전한 '나'를 내놓지 못하고

다른 틀에 나 자신을 끼워맞추어본 경험이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우주 역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분투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고 나니 소설을 읽기 전부터 마음이 갔다.


아홉 살부터 스물여섯 살까지. 소설은 우주의 시간을 따라가며

여성으로서 각 나이대에 겪게 되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또래에게 동화되고자 하는 심리 등을 세세하게 묘파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여자다움'의 강요는 아이들의 세계에도 그대로 답습된다.

그 세계에 속하기 위해 개성이 거세된 채 자라나는 우주의 모습을 보며 씁쓸함이 들었다.

남자애처럼 머리가 짧아서. 인형 놀이가 아닌 공차기를 좋아해서.

외형이나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놀림의 대상이 되거나

배척 당하곤 했던 어릴 적 교실의 풍경이 새삼 폭력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호모'라는 놀림을 받은 어린시절 이후

자신의 욕구보다는 타인의 기대에 맞춰온 우주의 삶의 방식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둘만의 세계에서는 행복하지만 남들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관계.

우주와 선미의 사랑은 동성애를 향하는 편견 어린 시선에 의해 방 한 칸의 크기로 축소되고 만다.

"네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선미의 말에 상처 받으면서도,

화를 내는 대신 남자처럼 행동하기를 택하는 것 역시 그러한 시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한.


그런 우주가 처음으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전시를 함께하는 석현, 보라, 정수, 화영과 시간을 보내면서부터이다.

그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 대화를 하는 방식, 산책을 하는 방식을 관찰하며

성숙하고 건강한 관계 맺기를, 타인과 나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나를 지키는 일을 배워간다.


초반에는 우주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듯한 선미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또 소설에 드러나지 않은 선미의 시간을 떠올려보며 차츰 이해가 갔다.

우주가 선미를 견딘 만큼 선미도 우주를 견뎌왔다는 걸.

선미에게 흔치 않게 찾아온 행운의 상징인 '셰이크'를 우주가 둘 곳이 없다는 이유로 갖다버린 대목에서도 느껴졌다.

어떤 단어로도 정립되지 않는 관계를 놓지 못했던 둘은

그 정립되지 않음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끝이 난다.


도무지 끊어질 수 없을 것 같던 둘의 관계가 무사히 끊어진다.

"한 명이 무너진 그 순간에 다른 한 명은 무너지지 않"는 엇갈림으로.

두 사람이 보다 건강하게, 각자 몫의 행복을 누리며 남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부만 읽었는 데도 밀려오는 감정과 여운의 밀도가 높아

소설의 나머지 분량이,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기를 주고 받는 사이.

소설 속 네 사람의 관계의 온도가 가을 날씨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맹렬했던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저녁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많은 관계 속에서 나는 얼마나 '나'인가를 되짚어보며 읽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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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연인 소설Q
이승은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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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집 『오늘밤에 어울리는』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이승은의 첫 장편소설 『도망치는 연인』이 출간되었다.

익숙한 저자는 아니었기에 김미월 소설가의 추천사를 유심히 읽어보았다.

그중 "가진 것 없이 가질 것도 없이 떠도는 두 연인이

어느 겨울 몰아치듯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내몰리는 이 이야기"

라는 소개에 마음이 동했고

"이 작가는 첫 장편에서 이렇게 다 보여주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과

첫 장편이 이 정도인데 무슨 걱정이랴 싶은 마음이 즐겁게 충돌한다."

라는 찬사에 기대하고 읽어도 좋을 소설이겠구나 싶었다.

한겨울, 매서운 한파만큼 시리고 혹독한 사건들이 두 주인공에게 벌어진다는 점에서

표지의 서늘하고도 강렬한 이미지가 이야기와 잘 어우러진다.

소설의 분위기는 무거운 편이나 문장의 호흡이 길지 않아 쉽게 읽혔고

"몇 장만 읽고 자야지 했는데 단숨에 다 읽었다"는 김미월 소설가의 말처럼

책을 펼친 뒤 얼마 안 되는 시간 만에 독서를 마쳤다.


*


"근데 우리가 왜 그렇게 놀랐지."


지수는 예나를 돌보며 머무는 영인의 펜션에서

이유 모를 불안과 강박을 느낀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던 아르바이트가 몸에 배어서인지

편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돈을 벌고 있다는 감각이 낯설어보인다.

시터 일이 차차 익숙해진 지수는

배관을 고치러 온 테오에게 영인이 허락했다며

냉장고 속 음식을 마음껏 대접하고 나눠먹는다.

그러나 밖에서 들려온 영인인 듯한 인기척에

마치 죄라도 지은 듯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곧 그렇게까지 놀란 본인 스스로에게 의문을 느낀다.

아마도 단순히 냉장고 속 음식을 넘어 고급 펜션에서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낸다는,

결코 내 것이 아닌, 내 것일 수 없는 감각들을

주인이 없는 새에 누리고 있었다는 죄책감이 아니었을까.


"돈이 많으면 뭐가 좋은 줄 알아?

돈이 많으면 벌레랑 싸울 필요가 없어.

벌레랑 싸우는 대신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 107p 중


테오는 등유를 섞어 기름을 빼돌리자고 한 정사장의 제안이

퇴직금을 주지 않고 자신을 내쫓기 위한 박사장의 계략이었음을 알고 분노한다.

그런 테오에게 다가선 지수는

돈 때문에 머리 아파했던 숱한 순간들을

'머릿속의 벌레와 싸우는 시간'이라고 일컬으며

더는 벌레와 싸우지 않기 위해

박사장이 훔쳐간 돈, 아니 시간을 되찾아오자고 제안한다.

어찌 보면 정당한 듯한 행위이지만 결국은 범죄이다.

벌레와 싸워야 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지수와 테오를 나쁜 선택으로 내몬 것 같아

안타까우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저를 믿으셨어요? 저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편했던 거 아니에요?"


영인과 지수는 사회적 위치도, 경제적 수준도 다르다.

그러니 사는 세계도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을 실감하는 순간은

영인보다는 지수에게 보다 빈번하게 찾아온다.

비싼 목걸이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제 것처럼 찾아 돌려주려 했지만

영인의 목에 손쉽게 채워져 있던 새 목걸이를 발견했을 때.

자신의 나이인 스물일곱에는 무엇을 했냐는 물음에

토론토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다고 답했을 때.

나와의 다름을 체감하는 순간들이 모여

지수는 영인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대신 침묵을 택하게 되고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게 된다.

어쩌면 지수는 처음부터 위 문장처럼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예나와의 시간이 즐거웠고,

자신에게 예나를 믿고 맡긴 영인에게 고마움이 들었을 것이다.

나쁜 상황이 연속되며 비뚤어진 마음이 안타깝다.


*



그럴듯한 선택지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혀서 흔들리던 마음을 내어주었다면

그래서 '어제'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오늘' 하고 말았다면

후회하고 또 후회할까. 아니면 후회하지 않을까.

괜찮아. 괜찮은 거야, 속삭이다가

너. 너 때문인 것 같아, 곁에 있는 사람이 미워질까.

끝내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싫어지고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이 사라져간다면

그때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작가의 말 중


『도망치는 연인』은 평범했던 두 연인이

'나쁜' 선택을 하게 되며 삶의 궤도가 틀어지는 이야기이다.

테오와 지수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사랑과 꿈을 품은 사람들이었고

"누군가를 도왔다는 사실에 온종일 기분이 좋았"던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살기 위해 나빠져야 했다.

박사장이 촉발시킨 악의가 테오에게,

다시 박사장에게, 또 다시 테오에게 돌아가며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상상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보다 많았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왜 나쁜 일들은 약자에게 유독 자주 일어나는 걸까.

소설을 읽으면서도, 뉴스에서 다종다양한 비극을 접할 때에도 든 생각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행한 일을 두고도 어쨌든 '범죄는 범죄'라고

딱 잘라 결론내리기가 망설여졌다.

물론 돈을 훔치고 사람을 다치게 한 둘의 행위를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 우리는 또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이들이 내린 선택이 단지 온전한 의지로서의 선택일지.

가진 자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된 사회의 시스템이 이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교묘히 선택지를 앗아간 것은 아닌지.

소설 곳곳에 자리한 아이러니도 흥미롭다.

테오와 지수는 자주 누군가를 돌보는 입장에 놓인다.

아픈 아버지를, 다친 영인을, 영인의 딸 예나를, 공격 당한 선욱을.

정작 생존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두 사람인 데도

자주 이러한 입장에 놓이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거나

시급 만 원, 백화점 상품권 등으로 보상받는 상황이 왠지 씁쓸했다.

나쁜 일들만 이어지던 어느날

테오는 끝내 지수에게 이별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서로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런 테오에게 지수가 건넨

"나랑 헤어지면, 넌 잘 지낼 것 같아? 잠을 푹 잘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헤어지는 건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라는 말이 마음 아팠다. 잠을 푹 자는 일이 헤어지는 일보다 어려워진 두 사람의 처지가.

그렇게 그들은 끝끝내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한다.

함께하기로 한 결정은 서로에게 구원일까 해악일까.

섣불리 판단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한겨울 폭설에도 온기를 나누며 장식용 전구 하나로도

어느 연인 못지 않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둘을 기억하기에

그저 응원을 보내고 싶다.

테오와 지수, 하나가 아닌 둘이기에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더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고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는 밤을 되찾기를 바라본다.



*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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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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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듯하고 유쾌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는 응원의 목소리,

"잘하고 있어"

스스로 조금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지나치게 현실에 발붙인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오해였음을, 이번 소설집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각 단편들의 폭발하는 핍진성에 사로잡한 채

이틀 만에 소설집을 모두 읽었다.

너무 자잘하고 자세해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그러나 왜인지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담긴 소설들이었다.

한편 지난 7월 28일, 장류진 작가님의 『연수』 북토크에도 다녀왔다.

당시 풀어주신 『연수』에 대한 이야기들 중 인상 깊었던 대목들을

각 단편들의 리뷰와 함께 공유해보려 한다.


〈연수〉

신규 프로젝트로 인해 못하는 운전을 다시금 시작해야 하는 직장인 주연이

중년 여성 강사에게 운전 연수를 받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향, 무례하게 느껴지는 강사의 언행에 경계심을 갖던 주연이

연수를 거듭하며 차츰 마음을 여는 과정이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운전이든, 삶의 방식이든,

'나는 못'한다고 굳게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마음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는 모습이 좋았다.

모두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정답인 삶도 없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맞는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길목에서,

서로를 향해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주면 되는 것 아닐까.

나는 그럴때마다 겨우 이런 일이,

결국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되어버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기쁜 순간씩이나 되는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40p

〈펀펀 페스티벌〉

원하는 기업 입사 시험의 3차 관문, 합숙면접에 들어간 취준생 '지원'의 이야기이다.

읽으면서 <슈퍼스타K>라는, 예전에 방영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떠오르기도 했다.

면접 마지막 날 열리는 '펀펀 페스티벌' 공연을 준비해야 하는 조원들의 상황이

꼭 <슈퍼스타K>의 조별 미션을 연상케 했다.

'악마의 편집'으로 악명 높았던 해당 방송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장면 중 하나가

경험을 무기로 조원들을 휘두르는 목소리 큰 리더와, 그에 맥을 못 추고 휘둘리는 조원들이었는데

리더 '찬휘'와 지원을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의 모습이 이에 부합했다.

그런 와중에도 지원은 부단히 노력한다.

연습이 수월하게 흘러가도록 상황을 살피고, 갈등이 생긴 팀원들 사이를 중재하며…

만약 이게 방송이었고, 어느 카메라맨이 이러한 모습을 포착해 방송에 내보냈다면

지원은 시청자들의 호감과 응원을 얻어 생방 무대까지 진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원의 이런 노력을 알아주는 건 지원 자신뿐이었다.

'결과'가 아닌 '과정' 속 지원자 개개인의 모습을 세심히 알아봐주는 이는 없었다.

지원의 모습을 보며 공감되기도, 그래서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먼 훗날, 자신을 위축시켰던 찬휘의 말은 무시한 채

'내 쪼대로' 노래를 부르는 지원의 모습이 통쾌하고 환했다.


그건, 크게 망하진 않을 거라는 이야기니까.

역시 대박보다는 폭망하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61~62p

〈공모〉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운다는 '천사장'이 운영하는 술집 '천의 얼굴'.

남성 상사들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드나들어야 했던 그곳을 주인공은 싫어했다.

별맛 없는 안주들도, 천사장의 클리비지도, 짐작 가는 인기 이유도 모두 싫었던 주인공은

본인의 팀을 꾸리기 시작하면서 천의 얼굴에 발길을 끊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을 끌어주던 상사 김상무에게

난데 없는 인사 청탁을 받게 되는데, 그 지원자가 천사장의 딸이며

천사장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들 듣고 왜인지 마음이 요동친다.

남초 회사에서 자신의 존재를 축소시키고

자연스레 미래 역시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던 주인공이

생각지 않게 오래 회사에 남게되면서

사내 분위기를 쇄신하는 한편,

떠나버린 여자 후배들을 떠올리는 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주인공에게 천사장의 딸 세원은

한눈에 알아본, 다신 놓치고 싶지 않은 '아기 새'였기에

윤리 의식과, 개인적인 욕망 사이에서 크게 갈등하게 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와,

주인공의 선택에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또한 북토크에서 마지막 장면에 관해

하나의 해석을 내놓기 보다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요?'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으시다는 작가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본인이 창작한 인물들, 이야기이지만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대상으로

바라보시려는 거리두기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수능을 다시 본다고 했다, 수능을.

그건, 인생을 그렇게까지 리셋하고 싶을 정도로 이곳이 싫다는 말이었다.

내가 데리고 있던 애가 그런 마음을 내내 품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145p

〈라이딩 크루〉

말이 필요없는 화제작(?), 액자식 구성의 우당탕탕 소동극이다.

라이딩 크루를 운영하는 크루장 주인공은

크루 멤버 이슬과 잘 해보려는 흑심을 품지만

새 멤버 영입으로 상황이 의도치 않게 흘러가게 된다.

참 지질하다, 싶으면서도 끝에가서는 연민이 들 지경인 주인공의 행보에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 크게 웃은 것 같다.

나는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벌써 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고,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224p 중에서


〈동계올림픽〉

역대급 한파가 닥친 설 연휴, 인턴기자 마지막 과제로

한국 쇼트트랙의 미래라 불리는

'백현호' 선수 자택 취재를 가게된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온몸이 얼 듯한 날씨도,

전화기 너머 묘한 압박을 주는 부모님도,

힘겹게 찾아간 자택 안 선배 기자들의 눈초리도,

쇼트트랙 경기가 펼쳐지는 빙상장 마냥 냉랭하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 따뜻한 떡국을 대접해주는 백현호 선수의 어머니,

꿈속에서의 다정하고 화목한 가족들,

정신을 잃은 '나'를 집에 데려와 롱패딩을 입혀 보내는 누군가의 부모님,

그들의 환대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던 주인공을 조금이나마 녹인다.

추운 겨울 거리를 헤매던 주인공이 환상적인 꿈을 꾸게 된다는 점에서

'성냥팔이 소녀'가 연상된다는 이야기가 북토크에서 나왔다.

동화의 결말은 모두가 알고 있듯 소녀의 죽음이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죽이는 대신 따뜻한 옷을 입혀주고 싶었다는

다정함이 물씬 느껴지던 작가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어떤 흐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미라와 라라〉

서른두살에 입학한 국문과 최고령 장수생, '미라'를

같은 과 주인공의 시점에서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미라는 회사를 관두고 소설을 쓰겠다며 국문과에 들어온 인물이지만,

형편 없는 소설만 써내는, 합평에서도 '깍두기' 같은 존재이다.

그런 미라가 '창작 여행'으로 그리스 크레타 섬에 다녀온 뒤

완전히 달라진 소설을 써와 모두를 놀래킨다.

대체 미라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잘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웠던 경험이 있는 누군가라면 크게 감응할 소설이다.

남들은 모두 말리지만 내게는 너무도 '귀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소설은 그 일을 끝끝내 놓지 못한대도 함부로 미련하다며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고,

결국 포기한 채 다른 길을 걸어간대도 이를 실패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북토크에서 소설 속 인물들에 작가님 본인이 투영되었다는 사실과

실제 경험담이 녹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왠지 더 마음이 갔던 소설이다.

만약, 첫 소설이 크게 화제되지 않았더라도 계속 소설을 썼을 것 같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계속 썼을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하시던 작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들의 뭐라든 세상이 반응이 어떻든

내게 '귀하고 중요한 일'이기에 계속 해나가는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그래도 나한테는 이게 제일 귀하고 중요해. 너처럼

329p


돌아가는 원리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무언가 출력되는 조그만 기계.

작가의 말에 쓰신 본인에 대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일상의 단면들을 주의 깊게 포착해두었다가

놀라운 이야기들로 파생시키는 작가님의 앞날을 힘껏 응원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연수' 중에 있다.

삶이라는 초행길을 더듬 더듬 나아가는 초보 운전자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정답만 골라내는 사람은 없다.

때론 길을 잘못 들어 돌아가기도 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내가 원했던 곳이 아님을 깨닫기도 한다.

그럴 땐 그저 유턴 지점을 찾아 돌아가면 된다.

그러니 멀리 앞서가는 차를 보며 조급해 할 필요도,

탄탄대로 같은 옆 차선을 보며 부러워할 필요도 없이

빠르진 않더라도 차근 차근, 나만의 길을 가면 될 뿐이라고 소설들은 말해준다.


*창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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