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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 김기현 목사의 사순절 가상칠언 묵상집
김기현 지음 / 두란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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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관지의 힘 - 일곱 개가 하나였네!!!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가상칠언에 대한 책은 보기가 싫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첫 번째이고, 부활절마다 반복의 반복의 반복을 경험하니 지겹다는 생각이 그다음을 따른다. 무엇보다 이거 특별 기도회, 새벽 기도회, 금식 등과 연결되다 보니 무겁고도 피곤하게만 느껴진다. 사역자로서는 매년 다가오는 이 기간에 올해는 또 뭘 해야 하나?’라는 부담감과 함께 가상칠언을 열다 보니 의도치 않게 부정적인 느낌을 품게 된다.

 

그럼에도 해마다 돌아오는 이 시기를 온전히 채우기 위해서는 가상칠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일곱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정점이자 절정이기 때문이다”(7). 올해는 또 어떤 책들이 나왔을까 이 책 저 책 뒤져보지만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겁다. 혹은 번역이 이상해서 도통 와닿지 않거나, 감성 과다로 마음이 닫힌다. 감사하게도 올해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성경 교사인 김기현 목사님이 가상칠언 묵상집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를 출판했다.

 

저자는 <, 까닭을 묻는다>,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불완전한 삶의 말을 걸다> 등의 책을 통해 말씀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남다른 해석 능력을 인정받은 목사, 작가, 학자, 교수, 글선생인 김기현이다. 가독성이 뛰어나 대중적이지만, 학자의 깊이를 놓이지 않는 그의 묵상을 읽고 있노라면, 말씀을 향한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는 가상칠언에 대한 묵상집이다. 7절의 말씀을 5-6번 반복하여 40일간(사순절 기간)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거기에다 한 절에 대한 필사, 묵상, 실천 공란이 있어 그날의 생각을 기록할 수 있게 했고, 정성스러운 기도문까지 안내한다. 무엇보다 각 장은 A4 용지 한 장 정도이 분량으로 누구나 쉽게 의미 있는 40일을 보낼 수 있게 돕는다. 소그룹에서 함께 나누기도 용이해 보인다.

 

무엇보다 구성과 내용이 너무 좋다. 서론에 이 책의 사용 방법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 참 대단하다. 일곱의 말씀을 한 단어로 정리했고 각각은 다음과 같은 흐름을 가진다. “용서->낙원/안식->가정/관계->고통->의미->목적->죽음가상칠언을 명확히 정리해 준 것만으로 감사한데, 일이관지로 전체를 꿰어준다. 흡사, 드래곤볼 같다. 7개의 구슬 낱개도 아름답지만 함께 모이면 보이지 않던 신룡이 드러나듯, 각각의 말씀도 좋지만 연결되니 십자가도 보이고, 삶도 보이고, 천국도 보인다. 신기하다.

 

다 좋다. 부족함이 없다. 짧은 장으로 이루어져 모든 것을 깊이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약간 아쉽지만, 말씀이 균형감 있게 잘 해석되고 적용되었다. 무엇보다 시작을 용서로, 마지막을 죽음으로 연결하는 그의 시선이 참 특별하다. 하필 왜 예수님의 첫 마디가 용서였을까? 왜 십자가의 마지막이 죽음일까? 그럼에도 그 죽음은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 능력이 될까? 참 탁월하다.

 

신기하다. 짧은 묵상을 읽다 보면 새로운 이해가 생기고, 이해가 안경이 되어 보이지 않던 세계를 드러낸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니 삶의 회개/변화가 시작된다. ‘작가란 이리도 대단한 사람이구나’, ‘말씀은 이렇게 강력하구나감탄과 감동이 잇따른다. 고통 속에 있는 분, 십자가를 더 깊이 이해, 적용하고 싶은 분, 사순절 기간 예수님을 강렬히 만나고자 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책의 순서에 따라 묵상하다 보면 죽음 뒤에 들려진 부활의 소식처럼 내 삶의 고난 뒤로 피어나는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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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한 신학자의 영성 고전 읽기 한 신학자의 고전 읽기 2
김기현 지음 / 죠이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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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싫은데 고전이라니... 꾸릿한 오래된 종이와 잉크 냄새, 누렇게 빛바랜 이해할 수 없는 암호들,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할 백면서생 주제에, 세상 모든 진리를 품은 양 고고한 척 하는 것이 싫다. 하루치 삶의 숙제도 산인데 또 뭐 하려고 고생 또 고생 거인의 어깨까지 올라야 하는가. 그런데도 나의 인생에 가장 충만한 순간을 꼽아라 한다면 "읽을 때"이고, "쓸 때"이다. 열심히 살아도 바람 빠진 풍선이 될 때면 어김없이 읽는 것에서 멀어져 있다. 반대로 정신이 쏙 빠질 만큼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도 멀쩡히 서있을 때는 책에 닻줄을 내리고 있을 때이다. 그러니 또 펴 본다.

"생태계 교란종" 누군가 이 책의 저자 김기현을 그렇게 불렀다. 신학과 철학을 넘나들고,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를 그의 깊이가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가벼이 나풀거리는 유튜브 시대에 학자라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그는무엇보다 여러 저서를 통해 좋은 글 선생으로 판명났다. 저자는 <공격적 책 읽기>, <공감적 책 읽기>, <부전자전고전>,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로 서평의 새장을 열었고, 많은 중생을 독서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이번에는 그의 전문분야인 고전, 특히 신앙 고전이다. 만권의 사람 김기현이 선택한 고전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책은 2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는 10권씩 총 20권의 신앙 고전을 다룬다(여는 책과 닫는 책을 합치면 22권이다). 무거운 주제와 달리 가독성이 갑이다. 세월이 검증한 고고한 지혜가 작가의 손끝에서 소화하기 딱 좋은 모양이 되었다. 동시에 학자다운 깊이와 날카로운 비판에 그 맛이 달콤하면서도 쌉쌀하다. 덕분에 이 책은 고전의 높은 진입 장벽을 거뜬히 넘게 하는 좋은 사다리가 된다. 선정된 도서도 대부분이 널리 알려진, 혹은 책장에 몇권 쯤 있을 책이라 관심이 더 한다. 서문에서 포기 했던 거인들을(고전) 저자는 뭐라 말할지 궁금하다.

일단 목차만 봐도 배가 부르다. 아타니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파스칼 <팡세>,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짐 윌리스 <하나님의 정치>,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도스토옙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엔도 슈사쿠 <침묵> , 앙드레 지드 <탕자, 돌아오다>, 헨리 나우엔 <영적 발돋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 몰리노스의 <영성 깊은 그리스도인>, 귀고 2세의 <수도사의 사다리>,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등등등. 지적 욕구를 마구 자극하는 고전이 즐비하다. 설명도 좋고, "함께 읽을 책"은 좋다. 베일 벗겨지니 다시 도전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고전만을 소개하는 목록은 아니다. 저자는 22권의 책을 통해 "영성"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우리가 그리도 외치는 '영성'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영성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몸으로 살아내는 일"이라 정의한다. 말씀이며,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 되셨고, 육이 되신 예수님은 글(성경)이 되셨다. 그 글을 따라 육이 되신 예수님 처럼 살아가는 것이 영성이다. 20여명의 대가들의 글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말)을 삶(몸)으로 살아낸 '영성'의 실체인 것이다.

다 좋은데, 도대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케케묵은 고전이 무슨 필요일까? AI가 인간을 대신하고, 전기차에 우주여행도 코 앞인데... 근의 공식도 모를 위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웬걸 의미가 있다. 변하는 것은 세상이지, 말씀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 그들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그들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고, 나의 고통은 그들의 고통이었다. 그러니 고전에는 나의 고민에 대한 대가들의 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천 년을 건너온 보물이 거기에 있다.

왜 글과 가까이할 때 충만함을 경험하는지 이제 알겠다. 읽는 것이 전부는 아니나 영성의 일부,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읽는 것과 멀어질 때 삶은 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소크라테스를 이를 알아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읽을 때 성찰이 일어난다. 낑낑대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저자) 덕분에 나는 난쟁이 위에만 올라가도 되니 감사할 뿐이다. 이 책의 도움으로 나도 난쟁이나 되어 보아야겠다. 최고의 고전 가이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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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아가 되어
김정태 지음 / 홍성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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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수가 없네... <말씀이 육아가 되어>를 읽고


조정래가 그랬다.  ‘제목이 그 소설의 절반을 결정 짓’는다고(황홀한 글 감옥, 334). 제목이 그렇게나 중요하다. "말씀이 육아가 되어". '어... 제목 괜찮은데.' 이런 생각을 하며 시원하고 따뜻한 표지를 넘겨 '김정태'라고 적힌 작가 소개 글을 읽는다. 압권이다. "... 아들 결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말씀과 하나님 나라를 몸으로 새롭게 읽어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소개 글 전부를 옮겨 적고 싶을 만큼 좋다. 받아야 할 은혜를 이미 다 받은 듯하다. 아직 표지만 넘겼는데, 진도를 뺄 수가 없다. 읽을 수가 없다. 너무 좋아서.

목차를 보니 구성도 좋다. 두 챕터로 제목이 "구약이 육아가 되어", "신약이 육아가 되어"이다. 멋지다. 각 챕터는 13개의 짧은 에세이로 되어 있는데, 한두 구절의 성구와 작가가 경험한 육아를 연결하여 신앙의 관점에서 육아를 풀어낸다. 책의 서두를 장식한 류호준 교수의 말처럼 "일상 신학"이 대세인 요즘, 저자는 '육아'라는 평범한 일상에서 깊고도 넓은 진리를 궁구한다. 썩어 문드러질 육신에서 임마누엘 하나님을 찾듯, 어린아이의 냄새 나는 똥 기저귀에서 은혜를 발견한다.

프롤로그. 또, 또, 내 눈을 잡는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그냥 갈 수 가 없다. 성육신과 육아의 공통점을 이야기하며 육아의 소중함을 설명한다. 여기서 끝이면 그냥 좋은 글이었겠다. 그런데 한 문장을 더해 육아를 짊어진 모든 이들의 마음을 낚아 버린다. "그러다 문득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을 잃어 버릴 때! 아이에게 헌신하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때,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나를 지켜낼 것인가?"(16-17) 이 책이 저 질문에 대한 그의 여정이란다. 리원이 엄마도, 기쁨이 엄마도, 재아 엄마도 그렇게 고민했던 문제인데...

내용도 참 실하다. 몇 자 적는다면, 성경적이다. 감동적이다. 현실적이다. 무엇보다 쉽게 잘 읽힌다. 그렇게 작가의 묵상과 육아를 따라 술술 넘어가다 보면 육아 숨어 계신 하나님이 보인다. 부엌데기 로렌스 형제가 살아왔나 싶다.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장 몇 권 더 구해서 엄마, 아빠님들께 선물해야겠다. 하나님도 육아를 하셨다니(53) 사역자들도 읽혀야겠다. 몇 자 글이 이렇게 강할 줄 알았다면 나도 글쟁이가 될 걸 그랬다. 아이를 키우는 빡빡한 일상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아... 책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읽을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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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을 위한 독서 - 책은 어떻게 교회와 이웃의 번영을 돕는가
C. 크리스토퍼 스미스 지음, 홍정환 옮김 / 죠이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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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같은 자리만 맴돌지 전혀 진전이 없다. 족쇄에라도 묶였는지 나가질 않는다. 열심히 기도하고, 가르쳐도 변함은커녕 내 삶을 바르게 하기도 버겁다. 더 좋은 방향을 위해 함께 대화라도 하려 했으나, 어떤 철학자의 가르침과 같이 그저 "목숨을 건 도약"이 될 뿐이다. 어디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대화 속에 우리는 오히려 길을 잃고, 허기진 배만 더 움켜쥐게 된다. 왜 이렇게 하나 되기도 어렵고 함께 가기도 힘든 것일까. 아니,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무엇엔가에 꽁꽁 묵인 듯 하다.

<공동선을 위한 독서>는 이런 나에게 단비와 같은 책이다. 저자 C. 크리스토퍼 스미스는 자신이 섬기는 '잉글우드교회'의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 공동체의 새로운 목적을 제시한다. "함께 읽고 대화하기." 이 단순한 두 개의 돌로 신앙의 개인주의와 성공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시류를 거스른다. 신학, 역사, 생태학, 경제학, 소설 등 독서 영역뿐 아니라 삶의 영역에도 확장을 이루어 전혀 새로운 신앙의 역량을 발휘하게 한다. 한국 독자들은 이미 저자의 <슬로처치>를 통해 교회의 맥도널드식 경영에 대한 선지적 질책을 경험한 바 있다. 이제 이 책은 슬로처치를 향한 조금 더 구체적인 한 걸음을 떼게 하고, 오늘에 교회가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학습 조직으로서 지역 교회'라는 생소한 전제를 상정하고, 이를 위한 유일하고 안전할 길로서 '독서'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학습'과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쉽게 생각해서 예수님의 도를 배우고, 그것을 살아내어야 한다. 학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단순하게 반응하게 되고, 상황에 작용하는 많은 요소를 이해하지 못한 채 피상적인 존재가 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죽게 만든다. 교회는 학습하고, 행동하는 '학습 조직으로서 지역교회'가 되어야 하면, 이를 위해서 독서가 필수이며, 개인의 영역으로 생각하던 독서가 공공의 영역으로 공유될 때 새로운 상상력으로 건강하고 번영하는 공동체를 세워 갈 수 있게 된다.

'학습 조직으로서의 지역 교회'의 핵심 사역은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창조한다. 사회적 상상력은 우리 의사 결정의 이면과 전반에 걸쳐 현실을 형성하는 힘이다. 사고와 경험의 프레임이다. 인간은 이 상상력에 묶여 있다. 언어 구조, 시간 구조(365일, 7일 일주일, 하루 24시간), 교육 구조(초, 중, 고, 대학), 경제 구조, 건축 환경 구조 등 우리를 규정된 길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회적 상상력'은 우리를 빠르고 쉽게 판단하게 하며 안전감 속에 살게 하나, 기반이 된 이론이 정당성을 상실한 후에도 구조는 남는다. 즉, 새로운 시대에도 꼰대와 같이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사회적 상상력'을 변혁할 수 있을까? 저자는 "변혁의 씨앗은 삶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가진 공동체(또는 작은 공동체)에 있다(46)"고 주장한다. 월터 브루그만이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우리를 둘러싼 지배적인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려왔다"고 강조한다. 즉, 교회가 대안을 제시하고 살아내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가 되어야 하며, 독서, 함께 하는 독서가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으로 공동체를 인도할 것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스티븐 킹은 "독서를 텔레파시"라고 칭했다. 다른 시간, 장소의 사람이 작가의 글을 읽으며 작가의 공간과 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즉, 독서는 내 영역/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놀라운 행위이다. 인간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위해 하나님이 세계 외부에서 오셨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변혁할 에너지를 찾지 못한다. 따라서 <공동선을 위한 독서>는 변혁을 해야 하나, 한계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평범하지만 분명한 출구가 될 것이다. 꿈을 꾸는 공동체, 꿈이 필요한 공동체라면 함께 일독하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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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까닭을 묻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만난 하나님
김기현 지음 / 두란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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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이~ 클났다(큰일 났다). '욥'의 찐 모습이 드러났다. 그동안 욥기를 이상하게 설교한 분들은 다 어쩌누. 근데 이거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실하고 성실했던 의인 욥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 바랐다고 들었을 텐데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아름답게 고난을 이겨낸 우직한 그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거칠고도 대담하게 하나님을 대항한다. 개혁자,  반항자, 개척자, 그리고 신학자가 그에게 붙여진 새로운 이름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도 욥의 친구들처럼 그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역시 김.기.현.이다. 한국의 필립 얀시라 불리는 그 답게 잠자는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덕분에 성경의 인물은 살아나고, 변명의 기회를 얻는다. 이미 저자는  <내 안에 야곱 DNA>,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등의 책을 통해 멀게만 느껴졌던 성서 인물과 독자 사이에 교감의 다리를 놓은 바 있다. 이번에는 '욥기'다. '왜 하필 욥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책을 펴는 순간, 오히려 이 책의 시의성에 놀라며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저자는 욥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 한다.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욥기 전체를 아우르는 묵상집이다. 그럼에도 책 곳곳에 묻어나는 깊이 있는 연구의 흔적과 묵상을 통해 발현되는 상상력은 이 책에 무게감을 더한다. 고통의 문제는 이성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기에 저자의 이러한 접근이 욥기를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이라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가독성이다. 잘 읽힌다.  편안한 문장과 적절하게 나누어진 소단락이 친절하게 독자를 욥기의 세계로 인도한다. 여기에 저자의 주특기인 인문, 고전, 철학, 신학,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를 버무려 읽는 재미를 더한다. 덕분에 '욥기' 이외에 얻는 콩고물도 상당하다.

 

책 내용을 살펴보자. 몇 가지 충격적인 부분이 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항하는 욥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은 일반적인 신앙에서 용인될 수 없는 죄이다. 그럼에도 의인 욥은 하나님께 대항한다. 덕분에 하나님 앞에 질문하고 토론하는 그 모습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좋은 신앙의 자세임을 알게 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칠게 맞서는 것이 허용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성경의 하나님, 곧 신론 때문이다...하나님은 맹목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으신다."(282)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표리부동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정직한 투정을 하나님은 즐겨 받으신다.

 

또한 구약의 시대,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던 때에 감히 하나님께 당당히 나섰다는 사실은 오히려 욥이 그 누구보다 깊이 구원자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반증이 된다. 욥의 아내도 이런 관점에서 악처가 아닌 그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한 "결정적 공헌자"이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2:9). 이 구절로 많은 이들이 욥의 아내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나 오히려 욥을 향한 질책, 겉으로 경건한 척 그만하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가라는 요청으로 해석된다. 그녀 덕분에 욥은 선비의 점찮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었다. 더 구체적인 근거는 책 5장을 참고하시길.

 

두 번째는 사탄, 세 친구, 리워야단의 존재이다. 저자도 인정하는바, 욥기에서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이 바로 이들이다. 특히 욥기에 등장하는 사탄은 일반적 이해와 다르게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꾼으로 그의 역할이 부각된다. 저자는 이 사탄의 존재와 역할, 그리고 한계를 아는 것이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25). 그렇다면 저자가 이해한 이들은 무엇인가? 그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이들이 '나' 자신이라 주장한다. 그 구체적인 근거는...책에서 보시길.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논리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교훈이다. 이들의 목적은 나도 누군가에게 사탄이고, 세친구이며, 리워야단이라는 사실에 있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처럼, 평범한 혹은 신실한 신앙인인 나도 누군가에게는 악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욥의 세 친구는 성경과 전통을 가지고 신명기적 하나님(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을 저주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으로 욥을 재단하고 넘어진 그를 짓밟는다. 상처의 뿌리는 소금처럼. 종교도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그랬고, 중세의 십자군도, 어쩌면 오늘 우리도.

 

사실 책 전체를 흐르는 핵심 주제는 '신정론'이고 고통의 문제이다. 진퇴양난, 하나님이 악하던지, 욥이 죄인이어야 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욥이 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이 사실을 참을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누구도 죄인이 아닐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은 인간이다. 욥이 지은 죄가 매우 크다고 치자. 설사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드넓은 세계에 비하면 먼지 한 줌만큼도 안 될 텐데.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해칠 리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 아닌가.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이리 처절히 욥을 응징 하신다고?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덕분에 고통에 여러 의미가 부여되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타인의 아픔에 눈을 돌리게 된다. 무엇보다 고통은 성숙을 수반한다. 이런 류의 고통을 '창조적 고통'이라 부른다. 그러나 창조적 고통은 한계가 있다. 그 논리를 따르면 욥의 성장을 위해 열 명의 자녀가 죽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는 또 하나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대속적 고통'이다. 무고한 자가 타인을 위해 받는 고통, 예수님의 고통,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고통이다. 저자는 욥이 받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서 희미하지만 대속의 고통을 엿보며 이해를 위한 작은 힌트를 남긴다.

 

큰일 났다. 욥기가 좋아졌다. 사실 욥기가 참 싫어했다. 이해도 어렵고, 내 인생도 버거운데 욥의 아픔까지 더하기 싫었다. 그러나 인생은 고통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생명의 초장으로의 여정이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걸음이다. 삶에서 고통은 필연이다. 이에 저자는 말한다. "고난은 이기는 게 아니다. 버티는 것이다" (229). 그리고 욥을 통해 어두 컴컴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법을 나눈다. 그러니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을 읽지말라.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고통이기에 모두를 위해 기록된 <욥, 까닭을 묻는다>에 깊은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참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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