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까닭을 묻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만난 하나님
김기현 지음 / 두란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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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이~ 클났다(큰일 났다). '욥'의 찐 모습이 드러났다. 그동안 욥기를 이상하게 설교한 분들은 다 어쩌누. 근데 이거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실하고 성실했던 의인 욥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 바랐다고 들었을 텐데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아름답게 고난을 이겨낸 우직한 그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거칠고도 대담하게 하나님을 대항한다. 개혁자,  반항자, 개척자, 그리고 신학자가 그에게 붙여진 새로운 이름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도 욥의 친구들처럼 그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역시 김.기.현.이다. 한국의 필립 얀시라 불리는 그 답게 잠자는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덕분에 성경의 인물은 살아나고, 변명의 기회를 얻는다. 이미 저자는  <내 안에 야곱 DNA>,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등의 책을 통해 멀게만 느껴졌던 성서 인물과 독자 사이에 교감의 다리를 놓은 바 있다. 이번에는 '욥기'다. '왜 하필 욥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책을 펴는 순간, 오히려 이 책의 시의성에 놀라며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저자는 욥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 한다.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욥기 전체를 아우르는 묵상집이다. 그럼에도 책 곳곳에 묻어나는 깊이 있는 연구의 흔적과 묵상을 통해 발현되는 상상력은 이 책에 무게감을 더한다. 고통의 문제는 이성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기에 저자의 이러한 접근이 욥기를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이라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가독성이다. 잘 읽힌다.  편안한 문장과 적절하게 나누어진 소단락이 친절하게 독자를 욥기의 세계로 인도한다. 여기에 저자의 주특기인 인문, 고전, 철학, 신학,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를 버무려 읽는 재미를 더한다. 덕분에 '욥기' 이외에 얻는 콩고물도 상당하다.

 

책 내용을 살펴보자. 몇 가지 충격적인 부분이 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항하는 욥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은 일반적인 신앙에서 용인될 수 없는 죄이다. 그럼에도 의인 욥은 하나님께 대항한다. 덕분에 하나님 앞에 질문하고 토론하는 그 모습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좋은 신앙의 자세임을 알게 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칠게 맞서는 것이 허용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성경의 하나님, 곧 신론 때문이다...하나님은 맹목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으신다."(282)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표리부동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정직한 투정을 하나님은 즐겨 받으신다.

 

또한 구약의 시대,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던 때에 감히 하나님께 당당히 나섰다는 사실은 오히려 욥이 그 누구보다 깊이 구원자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반증이 된다. 욥의 아내도 이런 관점에서 악처가 아닌 그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한 "결정적 공헌자"이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2:9). 이 구절로 많은 이들이 욥의 아내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나 오히려 욥을 향한 질책, 겉으로 경건한 척 그만하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가라는 요청으로 해석된다. 그녀 덕분에 욥은 선비의 점찮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었다. 더 구체적인 근거는 책 5장을 참고하시길.

 

두 번째는 사탄, 세 친구, 리워야단의 존재이다. 저자도 인정하는바, 욥기에서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이 바로 이들이다. 특히 욥기에 등장하는 사탄은 일반적 이해와 다르게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꾼으로 그의 역할이 부각된다. 저자는 이 사탄의 존재와 역할, 그리고 한계를 아는 것이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25). 그렇다면 저자가 이해한 이들은 무엇인가? 그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이들이 '나' 자신이라 주장한다. 그 구체적인 근거는...책에서 보시길.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논리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교훈이다. 이들의 목적은 나도 누군가에게 사탄이고, 세친구이며, 리워야단이라는 사실에 있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처럼, 평범한 혹은 신실한 신앙인인 나도 누군가에게는 악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욥의 세 친구는 성경과 전통을 가지고 신명기적 하나님(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을 저주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으로 욥을 재단하고 넘어진 그를 짓밟는다. 상처의 뿌리는 소금처럼. 종교도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그랬고, 중세의 십자군도, 어쩌면 오늘 우리도.

 

사실 책 전체를 흐르는 핵심 주제는 '신정론'이고 고통의 문제이다. 진퇴양난, 하나님이 악하던지, 욥이 죄인이어야 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욥이 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이 사실을 참을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누구도 죄인이 아닐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은 인간이다. 욥이 지은 죄가 매우 크다고 치자. 설사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드넓은 세계에 비하면 먼지 한 줌만큼도 안 될 텐데.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해칠 리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 아닌가.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이리 처절히 욥을 응징 하신다고?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덕분에 고통에 여러 의미가 부여되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타인의 아픔에 눈을 돌리게 된다. 무엇보다 고통은 성숙을 수반한다. 이런 류의 고통을 '창조적 고통'이라 부른다. 그러나 창조적 고통은 한계가 있다. 그 논리를 따르면 욥의 성장을 위해 열 명의 자녀가 죽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는 또 하나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대속적 고통'이다. 무고한 자가 타인을 위해 받는 고통, 예수님의 고통,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고통이다. 저자는 욥이 받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서 희미하지만 대속의 고통을 엿보며 이해를 위한 작은 힌트를 남긴다.

 

큰일 났다. 욥기가 좋아졌다. 사실 욥기가 참 싫어했다. 이해도 어렵고, 내 인생도 버거운데 욥의 아픔까지 더하기 싫었다. 그러나 인생은 고통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생명의 초장으로의 여정이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걸음이다. 삶에서 고통은 필연이다. 이에 저자는 말한다. "고난은 이기는 게 아니다. 버티는 것이다" (229). 그리고 욥을 통해 어두 컴컴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법을 나눈다. 그러니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을 읽지말라.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고통이기에 모두를 위해 기록된 <욥, 까닭을 묻는다>에 깊은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참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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