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미술관 1
랄프 이자우 지음, 안상임 옮김 / 비룡소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 입맛에 맞는 것만 먹고 익숙한 곳에만 들르는 것처럼 안이한 내 독서편식을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현재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의 풍미를 더해줄 거라는 아쉬움이 더해지면 더욱 그러하다. 랄프 이자우의 『거짓의 미술관』이 그랬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 미하엘 엔데의 뒤를 잇는 독일환상문학 작가라는 이유로 『거짓의 미술관』을 골라 들었지만 미술 작품들에 대한 지식과 진화를 둘러싼 과학과 종교와 사상의 첨예한 대립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들을 갖고 있었더라면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컸다.  

<르네 마그리트 '경솔한 수면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경솔한 수면자’가 예술품 도난사건의 중심에 있다. 물론 ‘경솔한 수면자’라는 작품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찾아보는 수고를 해야 했다. 작품에 소개된 예술품들에 대한 사진 정도라도 실어주면 좋으련만 독자의 궁금증은 스스로 해결하라는 불친절한 책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헤르마프로디테’ 조각상이 폭파되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 유명 박물관의 미술품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차례로 파괴되거나 도난을 당하고, 감쪽같이 사라진 미술품이 있던 자리에는 마그리트의 ‘경솔한 수면자’에 등장하는 물건들이 놓인다. 거울, 붉은 이불, 황금사과, 비둘기, 양초, 리본, 모자가 그것이다. 예술품 도난의 시작인 ‘헤르마프로디테’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요정 살마키스와 한 몸이 된 모습을 뜻한다.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관을 둘 다 가진 동물이나 식물을 일컫는 말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범인이 남긴 지문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된 알렉스 다니엘스가 바로 완벽한 헤르마프로디테라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고, 세계적인 미술품들의 보험사인 아트케어의 보험탐정인 다윈 쇼우는 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용의자 알렉스 다니엘스를 심문하게 된다. 하지만 알렉스의 혐의가 벗겨지면서 풀려나게 되고 대립관계로 시작된 알렉스와 다윈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점차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의견을 나누는 파트너가 된다. 


미술품 도난사건 배후에는 수십 년 전 비밀리에 진행됐던 인간 유전자를 이용한 비윤리적인 실험의 의해 헤르마프로디테로 복제되어 고통스럽게 살아온 삶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테오’가 있고, 오만하고 무자비했던 실험을 영원히 봉인하려는 ‘경솔한 수면자’가 있다. ‘일반적으로 유효한 대전제’인 진화론의 오류에 대항한 창조론과 지적설계 이론의 불꽃 튀는 대립이 기저에 흐른다. 우리에겐 황우석 사건으로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는 인간 복제에 대한 윤리의식과 인간의 진화과정에 개입하려는 과학의 오만함이 충돌한다. 현생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는 성별 간의 전쟁도 없고,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이 빠르고 생식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고 스스로 번식할 수도 있는 완벽한 ‘진성 헤르마프로디테’여야 한다는 논리에 집착해서 비밀리에 유전자를 이용한 불법 인간 복제 실험을 했던 ‘인간 유전자 연구소(HUGE)’의 마지막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알렉스와 테오를 비롯한 열세 명의 헤르마프로디테 복제인간이다. 인간 유전자 연구 제한을 광범위하게 폐지하려는 법안이 투표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과거에 자행된 불법적인 실험을 지워버리고 인간 유전자 연구를 선점하려는 음모가 깔려있다. 모든 사실이 밝혀진 결말 부분...인류의 아름다운 예술품들과 유전자실험의 부도덕성을 보여주는 기형의 태아들이 담겨있는 유리병들이 한 공간에 전시된 테오의 기묘한 미술관은 상상만으로도 섬칫하다. 인간 유전자 연구가 활발한 현실에서 과학의 위치가 광기와 치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물론 미술 작품에 대한 이해와 생명의 기원을 둘러싼 이론들에 대한 지식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일반적으로 유효한 대전제’에 대한 맹신과 무지함을 경계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랄프 이자우가 말했던 ‘수준 높은 오락과 더불어 사고의 동인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소설의 1차적 과제는 성공적으로 수행한 셈이다. 언젠가 읽어보리라 리스트에만 잔뜩 담아놓은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들을 비롯한 자연과학 책들과 미술 관련 책들을 읽어볼 계획이다. 이번만큼은 오랜만에 찾아온 지적 호기심을 내 게으름이 막아서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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