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을 한 번도 쳐 보지 못한 너에게 내인생의책 작은책가방 3
하세가와 슈헤이 글.그림, 양억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홈런을 한 번도 쳐 보지 못한 너에게>...아직까지 창공을 가르며 쭉쭉 뻗어나가 담장을 훌쩍 넘겨버리는 시원한 홈런 한번 날려보지 못한 내게 던지는 위협구 같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응원할 테니 힘내서 달리라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한 이 제목이 가슴에 와 툭 떨어진다. 책을 고를 때 평소 열광하는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면 표지 디자인에 끌려서 고르는 경우가 있고, 책 표지의 추천글에 도움받기도 하고, 그림책의 경우 일러스트의 선호도에 좌우되기도 한다. <홈런을 한 번도 쳐 보지 못한 너에게>이 책은 순전히 제목에 끌려서 앞뒤 안 가리고 선택한 책이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희망적이고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게 어린이책의 큰 기획 의도 중 하나일 텐데 야구만큼 인생의 단편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소재는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눈치 챘겠지만 난 야구광이다. 23세의 시인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했지만 마흔을 넘긴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책과 야구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흔히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 한다. 야구를 지루한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소리라서 이제는 별 감흥도 없는 진부한 퇴물 취급을 받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야구 경기를 오래도록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 말이 주는 의미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야구가 펼쳐 보이는 플레이들이 인생을 떠올릴 만한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이 책에서 센기치 형이 말하듯 야구는 선수가 홈, 즉 집을 나갔다가 세계를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점수가 인정되는 경기다. 출발점을 출발해서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홈런처럼 단 한방에 결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쉽지 않다. 팀 동료들의 지원이나 희생이 따르기도 하고, 상대팀 선수의 실책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상대 투수의 견제에 여러 차례 베이스로 귀로를 해야 하고, 투수가 던지는 공의 구질이나 팀 동료의 타구 방향을 살펴 언제쯤 달려 나갈지 얼마만큼 내달릴지 판단해서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 홈을 출발해 1루, 2루, 3루를 돌아 다시 홈까지 돌아오는 여정이 살짝 부풀려 오디세우스의 귀향에 맞먹는 험난한 여정을 지나서도 곳곳에 매복해 있는 묘한 변수에 의해서 끝내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리고 다시 그 여정을 되풀이하기 위해 새로운 이닝의 출발선에 새롭게 서야 하는 게 야구다.

평탄한 길만 계속되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람을 해한 적도 없고 남의 것을 탐낸 적도 없이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내 손안에는 초라한 인생뿐이냐고 어디엔가 하소연 하고 싶은 게 인생이 아닌가. 쉼 없이 몰아치는 고난과 절망, 배신과 야유 속에서도 자기 몫을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야구에서 흔하게 통용되는 말 중에 ‘찬스 뒤에 위기가 오고, 위기 뒤엔 찬스가 온다.’는 말이 있다. 찬스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흘려보내면 곧바로 위기에 빌미를 잡힐 수 있고, 위기를 잘 극복하면 다시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앞서간다고 자만함을 경계하는 말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잘 극복해내면 희망이 있다는 우리네 인생을 위한 완벽한 조언이 아닌가. 지금 나의 인생이 행운의 여신의 비호를 받은 듯 술술 잘 풀리고 있다면 지나친 오만함을 경계하라, 지금 나의 인생이 진흙탕에서 허우적대듯 절망적이라면 이제 곧 진흙탕에서 빠져 나올만한 기회가 찾아올 것에 대비하라.

리틀 야구단의 데구치 루이는 1사 1,3루 상황의 좋은 기회에 타석에 들어선다. 지난 타석의 성적은 연속 삼진. 스퀴즈를 예상했지만 감독의 사인은 강공이다. 꼭 쳐내리라 다짐하지만 결과는 2루수 앞 땅볼. 병살타를 쳐서 팀의 좋은 기회를 날려버린 거다. 시무룩한 루이의 심부름 길에 센 형을 만나서 오늘 시합의 스윙 동작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 홈런 욕심에 스윙 동작이 컸던 루이에게 타격 자세를 알려주고, 왕정치나 조지마 같은 홈런 타자들 또한 오랜 시간의 연습과 훈련과 연구가 밑거름이 돼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센기치 형과 루이의 꿈은 딱 한번이라도 멋진 홈런을 쳐보는 거다.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집을 나갔다가 세계를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 맛을 경험해 보고 싶은 거다. 교통사고로 걸을 수도 없을 거라던 센 형은 재활훈련을 통해 다시 야구를 꿈꾸고 있고 루이는 기초훈련부터 차근차근 해서 우선 안타부터 쳐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홈런을 꿈꾼다.

아마 센 형과 루이는 평생 동안 홈런을 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야구 천재들이 모여 있는 프로야구 선수들 중에도 홈런 한번 쳐 보지 못한 선수들이 많다. 한 시즌 최고 타자 또한 열 번의 타석에서 고작 3,4번의 안타를 칠뿐이고, 최고의 홈런 타자는 자신이 넘긴 홈런의 개수의 두 배 이상의 삼진을 당하기도 한다. 최고의 타자라 불리는 몇몇 선수들은 자기를 선택해준 구단이 한군데도 없었던 연습생부터 출발해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경우도 있다. 찬란했던 순간만큼 빛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묵묵히 자신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노장 선수들도 있다. 깨끗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홈런, 분명 야구에서 꽤 매력적인 요소지만 홈런 맞을 각오하고 두려움 없이 정면 승부하는 투수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몸을 날린 호수비와 재치 있는 플레이에 더 열광하기도 한다. 오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자신이 섰던 그라운드에 입 맞추는 은퇴선수의 모습에 울컥 감동의 눈물을 쏟기도 한다.          

야구가 담아내는 이런 진한 페이소스에 야구팬들의 야구사랑 또한 감동적이다. 2005년에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88년 만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시카고의 화이트삭스 팬 중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팀의 우승을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도 많다는 뜻이다. 500만원이 넘는 월드시리즈 티켓을 구입한 어느 할머니는 화이트삭스의 광팬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도 못보고 돌아가셨던 우승의 현장에 지금 와 있는데 그 값이 얼마가 됐든 그게 아깝겠냐고 했다 한다. 나 또한 13년을 기다려 내가 사랑하는 팀의 우승을 지켜봤던 감동을 간직하고 있는 터라 충분히 공감한다.

처음으로 야구장에 갔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조명탑에 불이 들어오고 녹색의 잔디밭에 하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눈앞에서 뛰어다니던 그 꿈의 구장을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아마도 야구팬일 것이다. 야구팬의 입장에서 야구에 대해 넘쳐나는 사랑을 담아낸 그림책이다. 늘 꿈과 희망을 지니고 살라는 야구가 주는 희망적인 메시지에다 이렇게 멋진 야구에 빠져들지 않고 버틸 수 있겠냐는 손짓이 담겨있다.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 이후 리틀야구단이 많이 생기고 생활야구 시설과 경기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WBC의 도쿄대첩이 생각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하나쯤 나와 줬으면 하던 야구 그림책이 일본 작가에게서 나왔다는 게 살짝 아쉬워진다.^^ 요즘 야구에 푹 빠져서 캐치볼 글러브를 장만하고 TV 야구 중계에 집중하는 조카를 비롯해서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야구의 기분 규칙들과 함께 권해주면 좋을 그림책이다. 그렇게 야구의 재미에 빠져들다 보면 아마도 야구가 담아내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그나저나 내 인생의 홈런은 언제쯤 날릴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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