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행복해졌다 - 차로, 두 발로, 자유로움으로 세 가지 스타일 30개의 해피 루트
전은정.장세이.이혜필 지음 / 컬처그라퍼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제주로의 여행은 막무가내로 휴가를 보장 받으려는 마음이 앞서서 떠난 여행들이었다. 그런 내게 제주는 대체로 흡족했다. 뻑뻑한 삶을 이리저리 쪼개서 시간을 만들고 통장 잔고를 이리저리 긁어모아서 떠났던 젊은 날의 첫 여행을 기억한다. 대한민국의 풍경이 거기서 거기일 텐데 제주만의 특별한 무언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했기에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기대감에 부풀어 잠 못 들던 여행 전날 밤도 기억한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다리가 아프도록 제주를 휘젓고 다니다가 숙소에 들어와 녹초가 되어서도 다음날 아침이면 거뜬하게 일어나 또다시 제주를 느끼며 다녔던 3박 4일 간의 꿈같은 날들은 아마도 앞으로의 제주 여행에서도 다시 느껴보지 못할 감상일 것이다. 첫 여행 이후로 ‘제주’라 하면 맹목적인 찬사를 쏟아 붓는 제주예찬론자가 되었다. 마치 내 고향에 대한 짝사랑에 수다스러워지는 그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이 책은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던 인연으로 엮인 세 명의 싱글 여인네들의 세 가지 스타일의 여행 방법에 맞는 해피 제주를 담고 있다. 달리고 주차간산(走車看山), 걷고 도보천리(徒步千里), 쉬는 유유자적(悠遊自適). 세 사람이 추천하는 세 가지 스타일의 여행 테마 중 내 마음을 또다시 설레게 하는 것은 역시 도보천리다. 유유자적 스타일은 저자와 개인적인 친분으로 엮인 특별한 인연을 이야기 하고 있어서 평범한 여행자라면 쉽게 꿈꿀 수 있는 여행 방법이 아니라 동떨어진 느낌이 들고, 주차간산 스타일은 현지 가이드까지 대동해서 제주를 휘젓고 다녔던 경험이 이미 있어서 색다른 맛이 없는데 반해 도보천리는 앞으로의 제주 여행의 테마로 계획하고 있는 부분들을 담고 있으니 마음이 그리로 끌리는 게 당연하다. 도보천리 스타일이 내 마음을 끌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다른 테마가 흡족하리라. 어느 방법을 택하든 온통 매력적인 것은 분명하다.

조.이.락. 세 명의 여행자의 세 가지 스타일의 여행. 그 중 ‘이’의 도보천리 스타일이 내게 맞춤인 것을 떠나서 ‘이’의 글맛이 내 입맛에도 딱인 모양이다. 마음에 드는 글을 만나면 차마 긋지 못하는 밑줄을 대신해서 색색의 포스트잇을 붙여두는데 ‘이’의 글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감상에 내 마음을 얹어둔 듯하게 격한 공감을 대신해주고 있다. 제주에 여행 왔다가 제주가 좋아서 제주에 눌러 살게 된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개한 ‘락’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대부분 예술인이거나 예술적인 기질이 강한 사람들, 그 속에 세 명의 저자가 네 번째 저자라고 말한 ‘제주 할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소개한 제주도 ‘설문대할망’ 신화가 눈길을 끈다.  

설화에 따르면 오백나한은 모두 설문대할망의 아들이다. 할망은 한라산의 어머니고, 슬하에 500명의 아들을 둔 거신(巨神)이다. 체구가 어찌나 큰지 빨래를 할 때면 제주 북쪽 관탈섬과 제주 남쪽 마라도에 다리를 한쪽씩 얹고 성산일출봉을 빨래통 삼고 우도를 빨래판 삼는다. 어느 날, 피곤한 할망이 한라산을 베고 누우려는데 꼭대기가 뾰족해 주먹으로 산 정상을 쳐 백록담이 생겼다고 한다. 쌀국수 먹으러 베트남 가고 생수 마시러 스위스 가고 껌 씹으러 핀란드 간다는 '허풍개그'가 이만할까. (155쪽)

세 가지 스타일의 30가지 루트를 소개하고 여행자들을 위한 최신 생생정보까지 각 루트의 말미에 친절하게 붙여두고 있다. 여행 관련된 책들이 그러하듯 풍부한 사진들도 담고 있다. 하지만 제주의 행복 속으로 날아가고 싶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도움 받을 만한 맛집, 숙소, 환상 코스의 정보가 아니라 그곳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감상과 길 위에 선 여행자의 절반쯤 탈속과 해탈의 경지에 오른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여행 자체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여행은 '몰아쉬는 숨'이다. 오래 참은 숨을 한 번에 뱉으니 발끝에서 해녀의 숨비 소리가 난다. 참은 숨을 몰아쉬러 제주에 갔다. 안정되어도 뻑뻑한 삶, 불안정해도 여유로운 삶, 양단간에 결론을 내고 싶던 어느 날이었다. 지상을 떠나 지상을 내려다본 순간, 금세 마음이 노곤해졌다. 강과 산 같은 큰 흐름만 남고 족쇄 같던 공간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사람은 더 미미해 보이지도 않았다. 숱한 아귀다툼이 우스워졌다. (164쪽)

무시로 때때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세 여인네들의 자유가 살짝 부러워지다가도 매일 아침 유치원 버스에 오르기 전에 소나기 뽀뽀를 퍼붓는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우선 몸이 매인 곳이 없으니 자유로울 수 있는 이 여인들이 부럽다가 어차피 한평생 살아가는 것은 각자의 쳇바퀴 안에서의 행보가 아니겠는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튄다. 다만 한적하고 여유롭게 내 시간들을 맘껏 운용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서 다른 쪽으로 분산이 될 수밖에 없는 앞으로의 여행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서글픔은 약간 있다.^^ 마음은 간절하나 체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할 나이가 되기 전에 제주 올레길을 걸어보리라.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라있는 이 계획이 조만간 실행에 옮겨질 날을 고대해 본다. 그동안 이 책으로 시장기를 달래야겠다. 물론 이 책은 애피타이저 보다는 성찬에 가까운 아주 맛있는 책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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