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가 그랬어 콩깍지 문고 9
양희진 지음, 김종민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꿈과 현실 환상과 실재 사이에서 적당히 균형을 이룬, 이른 여름날 녹두네 마당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대는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서 깜빡 잠이 든 녹두와 꿈 속 토끼와의 추격전을 옮겨놓은 듯도 하고, 어쩌면 실제로 동서양의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꾀 많은 토끼의 사촌쯤 되는 토끼가 짠하고 녹두네 마당에 나타났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이들은 가끔씩 금방 탄로 날 거짓말로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니 심한 장난으로 아수라장이 된 마당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토끼를 끌어다 감쪽같이 속여 넘기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아이는 유치원 친구가 생기기 전까지 늘 끼고 다니던 양 인형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곤 했었다. ‘토끼가 그랬어.’란 제목에 피식 웃음이 났었던 이유는 한동안 엄마가 빤히 보는 앞에서 일을 벌여놓고도 양 인형에게 잘못을 돌리며 “양군이가 그랬어요. 엄마는 내가 한 것 같아요?”하던 아이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씨익 웃으며 양군이가 그랬어...하는 내 아이와는 다르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고 씩씩대면서 토끼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녹두를 보자니 이런 내 이야기를 들으면 녹두가 억울해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녹두와 토끼의 첫날 소동은 큰 토끼에게 녹두가 일방적으로 기습을 당한 것이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하고 토끼를 기다린 둘째 날의 소동도 토끼의 승리로 끝났으니 녹두가 약이 바짝 올랐음이 당연하다. 녹두는 엉망이 된 마당의 상황을 해명하려 들었을 테고 엄마에게 어김없이 또 혼이 났을 거다. 하지만 아이들만 그렇겠냐마는 특히 아이들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충성을 다하는 법, 토끼에게 골탕 먹은 분한 마음에 복수를 다짐하지만 식구들 중 오직 할머니만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주시니 할머니가 정성껏 가꾼 콩밭의 콩잎을 토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 또한 녹두에게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토끼와의 결전을 준비하는데 만화책과 볶은 콩도 여름 낮의 나른한 졸음을 이겨낼 수가 없는 모양이다. 녹두가 깜빡 잠이 든 사이 어김없이 토끼들이 나타나고 볶은 콩 그릇이 원인이 되어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녹두와 두 마리 토끼는 어느새 콩 한쪽도 나눠먹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달리 꾀 많은 토끼겠는가. 마지막으로 녹두의 뒤통수를 날려주는 큰 토끼. 큰 토끼의 콩의 반밖에 되지 않는 콩을 앞에 두고 갸웃거리고 있는 녹두를 남겨두고 떠나며 살짝 돌아보는 큰 토끼의 눈빛이 짓궂다.^^   

요즘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보면 진화하는 느낌이 든다. 권선징악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착한사람 콤플렉스를 양산하던 이야기책들의 주인공들이 현실감을 찾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착한 사람도 여지없이 악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으니 무조건 착한 아이로 자라기를 강요하는 이야기들이 그동안 꽤 불편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현실의 아이는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짓궂고 적당히 꾀를 부린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녹두가 보여주는 현실감 있는 순수함을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초여름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풍경을 담은 잔잔한 그림 속에 녹아든 녹두의 이야기는 녹두나 토끼 어느 쪽의 편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힌트만 살짝 남겨두고 있다. 새로 등장한 애꾸눈 토끼와 함께 할 녹두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초여름 노곤한 햇볕 아래 마당의 평상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소일하는 녹두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바로 30여 년 전쯤의 우리 집 앞마당 풍경이 꾀 많은 토끼 두 마리와 새콩 할매네 손자 녹두와 함께 2010년에 불쑥 튀어 나왔다. 책 몇 권 옆에 쌓아두고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고 있으면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나 시원한 수박, 찐 감자, 찐 옥수수 등의 간식거리가 늦은 밤까지 계속 이어지곤 했다. 하늘 바라보며 갖가지 형상들의 기묘한 구름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스르륵 졸음에 못 이겨 낮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해가 지고 나서는 모기나 나방들 쫓으려 모깃불 피워놓고 늦은 밤까지 무슨 수다가 그리 길어졌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귀를 쫑긋 세우며 재미있어 하던 동생들에게 책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극적으로 전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었나 싶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는 그 영역을 점점 더 넓혀가고 그 주변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 가고 있으니 더군다나 이렇게 확 트인 마당을 갖고 있는 집에 사는 혜택을 누리는 도시 아이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녹두네 마당에서 펼쳐진 한바탕 소동이 부러운 이유는 어쩌면 여름 낮의 꿈인 듯 환상인 듯 감쪽같은 현실인 듯한 두 토끼와의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마당 한편의 나무 그늘에 자리한 평상에서 만들어갈 여름날의 추억이 아닐까. 마당 한 편에는 텃밭을 들이고 평상을 하나 펼쳐두고 빨랫줄 길게 매어두고 중간에 바지랑대로 지탱해두고 한가득 널어둔 빨래가 바람에 펄럭거리는 풍경...그 속에 내 아이가 있다면 아이도 나도 행복할 것 같다. 아...꿈이라도 야무지게 꿔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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