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카메라‘에 관한 오랜 공포가 있다. 찍고 있지만 상황을 냉담하게 기록할 뿐,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카메라.
이 공포는 카메라를 꺼내들어 남의 절박한 고통을 보고 듣고 기록하고 생중계하는 순간부터 시작돼 편집하고 재구성한 뒤 널리고뜨린 이후까지 이어진다. 공포의 근원은 이걸 찍어서 보여준 뒤에도 내가, 이걸 본 뒤에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못할 수도있다는 데 있다. - P28

그러니 대상화를 무작정 멈추라는 말은 함정이다. 타인에 대한말하기가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도울 기회를 알지도 못한 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이 구경이 될 수 있다는걱정에 빠져서 고통을 보는 일 자체를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인간성 실패의 시작일 것이다. 우리의 눈은 움직일 수 있다. 자랑스럽지 않은 이유로 머물렀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곳으로 분명히이동할 수 있다. 본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전달과전달, 중개와 중개를 통해 유예되어 버린 행동의 가능성이 당신에게 있으니까. - P36

고통의 포르노 운운하기 전에 인터넷이 불러온 진짜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죄책감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죄책감과 무력감의 원천이 된다. 동시에 사건 바깥에서 비난하는 무고한 위치에 자신을놓고 정의감에 빠져들거나, 거리감을 핑계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하기도 쉽다. 전에는 언론사들에만 맡겨져 있던 뉴스의 생산과유통의 몫이 얼마간 이용자에게까지 넘어가며 책무 역시 분산됐다. 사람들은 숱한 플랫폼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 P49

그저 고통의 착즙기처럼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있다는 자각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젊지만 낡아빠진 기자스러운 다짐은 어쩌면 약자에게 목소리를 빼앗겠다는, 그들의 말을 고르고 편집하여내보낼 권한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의 위선적인 버전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 P82

피해자들이 죽어갔던 금남로 5.18 민주광장 한복판에는 2016년 ‘5.18 진상 규명‘이라는 거대한 글씨가 구조물로 들어섰다. 어머니들은 40년 전에도, 지금도 울고 있는 모습으로 뉴스에 등장한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그보다 전형적인 건 가해자의 행태이니, 적어도 피해자의 전형성을 견뎌야 할 책임이 언론에있다고 믿기에 망설임 없이 그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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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는 그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죽음에 대한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단점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거기에 없었다. 그가 얼마 안 되는 오라시오 추종자들과 함께 독재자와 맞서 전투를 벌였을 때도 그는 여러 번 목숨을건 행동을 했었다.
그것은 두려움보다 더 난해하고 딱히 뭐라고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마비 상태, 즉 결단력과 이성과 자유의지가 잠들었기 때문이다. 고음의 목소리와 위선자의 시선을 지녔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몸단장에 신경 쓰고 장식한 그 남자가 가난한사람이건 부자건, 친구건 적이건 모든 도미니카 사람들에게 주문을걸듯 행사하던 활동 불능 상태였다. - P158

생각하는 것과 매일 반대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마음 후미진 곳에서 그는 트루히요에게사형선고를 내렸다. 트루히요가 살아 있는 한 자기를 비롯한 수많은도미니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불쾌감 속에서 살아가야 할것이며, 매순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며 한사람이면서도 두 사람이 되어야 하는 형벌 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즉공적인 장소에서는 진실을 감춘 채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야만 한다고확신했다. - P247

그는 살며시 눈을 감고서 조용한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트루히요가 만들 수 있었던 체제, 도미니카 사람들이 조금 빠르거나 늦은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공모자로 참여했던 체제가 얼마나사악한지 생각했다. 망명자(이들도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와 죽은사람만 빠져나갈 수 있던 체제였다. "도미니카 사람에게 가장 큰 불행은 똑똑하고 능력 있는 거야"라고 언젠가 알바로 카브랄( 그는 정말현명하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어‘라고 생각했다)이 말하는소리를 들었고, 다음의 말을 뇌리에 깊이 새겼다. "왜냐하면 조만간트루히요가 그를 불러 체제에 봉사하라고, 혹은 그 자신을 위해 봉사하라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야. 일단 호출되면 거부하는 건 허락되지 않아." 카브랄은 그런 진실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는 내각에 임명되는 것에 최소한의 저항도 하지 않았다. 에스트레야 사드알라가말했듯이, 염소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속성, 즉 자유의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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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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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때문에 손해만 봐왔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하는 <도련님>은 그 성격 탓에 조용할 날이 없는 도련님을 그리고 있다. 뛰어내리지 못한 거란 친구의 비아냥에 2층에서 바로 뛰어내리지 않나, 외제 칼날의 성능을 믿지 못하는 친구의 말에 서슴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보지 않나, 이웃 논에 논구멍을 막아 물난리를 겪게 만드는 등 도련님은 뭐든 재지 않고 해보는 탓에 집에서도 밖에서도 처치곤란한 존재이다. 부엌에서 공중제비 넘다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고도 ˝꼴도 보기 싫다˝는 말에 집을 나갔다가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본의아니게 불효자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천덕꾸러기 도련님을 단 한 사람, 사랑하고 아끼는 이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어머니도 아니고 할멈 하녀 ‘기요‘이다. 사람들 몰래 자신만 챙겨주는 기요의 행동이 못내 불편한 도련님은 사람들 눈 속여가며 나만 덕보는 건, 체질상 맞지 않다. 그런 도련님에게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기요의 일방적인 사랑과 믿음은 세상과 불화를 늘 달고 다니는 그에게 이상한 주문과 다가온다.

그놈의 앞뒤 안가리는 성격 탓에 도쿄 토박인이 도련님은 느닷없이 한적한 시골 중학교 수학교사로 가게 된다. 그런데 그 중학교는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너구리같은 눈을 가진 교장, 일년 내내 빨간 셔츠만 입는 교감, 창백한 얼굴의 끝물호박 영어선생, 밤송이머리 하고 있는 산미치광이 수학주임, 교감앞에서 간지러운 얘기를 늘어놓는 미술교사 알랑쇠 모두, 도쿄토박이인 도련님의 눈에는 죄다 이상하게 보인다. 이상한 건 선생들 뿐인가? 애들도 이상하고, 시골동네도 이상하다. 이 손바닥만큼 작은 동네에는 내 공간이 하나 없는 것 같아 도련님은 슬프기만 하다. 매일 가는 온천이며, 혼자 먹었던 경단이며, 이 동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정탐하는 것 같아 울적하다. 난 그들에게 관심 하나 없는데, 왜 가만히 있는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못하는 건지..

​ 솔직할 뿐이요, 정직할 뿐인 도련님에게 세상은 욕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의뭉스러운 곳이다. 선생이라는 작자들은 학생들 앞에서는 젠체하면서 뒤에서는 자신들의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이전투구한다. 당직 때 학생들의 짖궃은 장난으로 봉변을 당한 도련님은 학생들에게 관용을 베풀자는 교장, 교감이 이래저래 마뜩치 않다. 그러다가 우연히 교감과 영어선생, 마돈나, 이 세사람의 연애사를 듣게 되면서 도련님은 ˝인간만큼 믿을 수 없는 존재는 없다˝며 세상에 더욱 뒷짐지며 물러난다. 그런 도련님이 교감의 모략에 휘말려 벽지로 전보가는 끝물호박에 가슴 아파하고, 봉급인상으로 자신를 회유하려던 교감에게 발끈하는 것은 출세, 부, 위선으로 굴려가는 세상사에서 하찮은 것들로 밀려나는 선한 가치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 하다. 정직해서 손해보고, 솔직해서 비난받았던 도련님에게 순응하고 관대했기에 무시당하고 뺏앗길 수 밖에 없었던 끝물호박은 남같지 않았던 것이다. 급기야 산미치광이와 함께 도련님은 교감을 미행, 그의 구린 뒤를 밝혀내려고 하지만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도망가지도 숨지도 않을 거라며˝ 교감과 알랄쇠에게 최후의 대결을 통보하고 이들은 사직서를 던지고 그대로 각자의 길을 떠난다.

​ 소설에서 도련님은 정직하고, 솔직하고, 앞뒤 안가리는 성격 탓에 늘 세상과 불화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애써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것은 한 것이고 안 한 것은 안 한 것이다˝이란 신념을 가진 도련님은 아무리 세상과 불화해도 아쉬울 게 없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질 뿐, 거기에는 어떤 거창한 도덕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젠체하고 어떤 가식이나 떠는 건, 당최 도련님에게 가당치도 않는 일이다.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 못할 하찮은 놈들이라 도련님은 생각한다. 그렇기에 도련님의 행동에는 어떤 꾸밈이나 가식이 없다. 자신의 마음을 군더더기 없이 보이기에 그는 자신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드러난 욕망은 제 갈 길을 가면 되고, 자신은 그냥 뒷짐지고 쳐다보면 될 뿐이다.

민낯이 더이상 예의가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적당한 화장과 적당한 가식과 적당한 위선이 善이고, 예의가 되었다. 세상과 불화하지 않은 척 애쓰는 게 당연하고,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모든 관계가 노동이 되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 당당히 세계와 불화하면서 자신의 날 것 그대로, 아무런 꾸밈없이 살았던 도련님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 매력만점의 도련님을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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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지음, 이상길.배세진 옮김 / 킹콩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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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볼 때 노화는 [정신]구조가 점진적으로 닫히는 현상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사람은 정확히 말해 정신구조가 점점 더 경직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외부의] 자극, 요청 등에 점점 더 무디게 반응합니다. - P97

하비투스는 성향들의 열린 체계입니다. 그것은 경험들의 영향 아래 끊임없이 노출되고, 그런 경험들에 의해서 마침내 변화하게 됩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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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méconnaissances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 P19

어 a fortiori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현재란 단순히 시간상의 현 시점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입니다. 즉 현재는 투쟁의 대상이 될 정도로 충분히, 그리고 여전히 생생한무엇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예컨대 프랑스혁명이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진정한 현재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는 ‘언제나‘ 생생함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언제나 투쟁의 대상이 됩니다. - P43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사회학은 상징적 공격, 또는 상징적 조작에 저항하는 자기 방어의 도구를 제공합니다. 이런 도구는 무엇보다도 전문가들이 생산하는 담론에 저항합니다. 제가 여러 번 말했듯이, 사회학자가 상징생산에 종사하는 사람, 예를 들어 언론인, 주교, 교수, 철학자를 믿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상징생산의 종사자들은 사회세계가 이렇다고 그럴싸한 담론을 제공하면서 말로 먹고 삽니다. 사회학자는 이런 담론의 외양을 애써 조심합니다. 우리사회학자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것은 실상 사회세계에 관한 일상적 담론, 헛똑똑이들의 수사학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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